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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30현자타임] 백마 탄 초인, 헬조선으로 오다

김영란법에 대하여

2016.08.01(Mon) 11:37:54

아주 오래된 농담이 있다. 대한민국에서 절대 제 밥값을 안 내는 직업 셋이 교수, 연예인 그리고 기자라는 농담. 그런데 곱씹어보면 저 세 직업이 모두 같은 결로 분류될 수 있는 건 아니다. 교수와 연예인이 밥값을 내지 않는 이유는 그들에게 밥을 대접하고 싶어 하는 사람들이 그만큼 많기 때문이다. 요컨대 그네들로 하여금 지갑을 열지 않도록 하는 건 ‘그들의 인기’다. 기자의 경우는 좀 다르다. 그들은 칼보다 강한 펜을 쥔 ‘무관(無冠)의 제왕들’이 아니던가. 사람들은 ‘대접하고 싶어서’가 아니라 ‘대접하지 않으면 안 되기 때문’에 그들에게 밥을 산다.

주변에 기자 친구들이 꽤 된다. 그들이 식사 자리에 간다고 하면 나는 으레 ‘좋은 거 먹겠네’ 하며 웃는다. “당연히 ‘요리’를 시킬 줄 알았는데 식사만 시켜 시무룩해졌다”는 답이 돌아올 때도 있다. 기자가 동석한 식사 자리에서는 그 누구도 메뉴판을 보지 않고 곧바로 ‘A코스’를 주문한다는 이야기도 있다. 그 집에서 제일 비싼 메뉴를 시키는 게 당연하다는 얘기다. 그러나 내가 아는 그들 한 명 한 명은 결코 양심에 숭숭 털이 난 ‘기레기’들이 아니다. 너무나 당연한 관행이자 풍토에 모두가 익숙해져 있을 뿐이다.

남 얘기 할 것도 없이, 나도 기자로 일한 일이 있다. 그 기간이 짧아 ‘한때 기자’였다기보다는 ‘잠시 기자일을 했었다’는 표현이 적절할 텐데, 아무튼 나 역시 적잖이 공짜밥을 얻어먹었다. 돌이켜보니 ‘우니’니 ‘활전복’이니 ‘캐비어’니 하는 음식들을 맛본 건 다 누군가 초대해준 식사자리에서였는데, 쓰면서도 솔직히 좀 부끄럽다.

이런 분위기에서 ‘김영란법’이 제정된 건 일견 기적으로 느껴진다. 이건 ‘소수의 비양심 언론인’을 범법자로 규정하는 것이 아닌, ‘아주 보통의 언론인’ 모두를 범법자로 규정하는 법이 아닌가. 같은 이유로, 이 법의 실효성에 대해서도 나는 의구심을 가지고 있다.

   
서울의 한 백화점에서 판매되고 있는 고급 한우세트. 사진=연합뉴스

과연 이 법이 시행되는 2016년 9월 28일 00시 부로, 전국의 모든 언론인과 공직자가 일제히 “그래, 결심했어. 이제 내 밥값은 모두 내가 낼 테야!” 하게 될까. 아마 그렇지 않을 것이다. 솔직히 말하자면, 이와 관련해 어떤 기막힌 꼼수와 편법들이 탄생할지 벌써부터 좀 궁금할 지경이다. 그러니 ‘청렴한 나라 만들기’에는 터럭만 한 기여도 못한 채, 범법자가 아니었던 이들을 대거 범법자로 만드는 유명무실한 법이 되지 않을까, 그런 우려가 들기도 하는 것이다.

나의 이런 의구심은 그러나, 기자협회의 성명과 몇몇 기자들의 반응을 보며 이내 괘씸함으로 바뀌었다. “A호텔 중식당에서 가장 싼 짜장면이 얼마, B호텔 한식당에서는 된장찌개도 최소 얼마” 하는 따위의 보도를 내는 기자들의 수준에는 새삼 실망할 것도 없었다. 정말 괘씸한 부분은 ‘김영란법에 국회의원은 예외’라는 식의 왜곡을 시도했다는 사실이다. 심지어 <중앙일보>는 지난 29일자 사설을 통해서도 그렇게 썼다. 국회의원을 ‘까는’ 내용이라면 그 무엇이 됐든 덮어놓고 절대 다수 국민의 지지를 얻어낼 수 있으니, 효과적인 시도였던 건 맞을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김영란법에 국회의원이 예외’라는 주장이 거짓임은 관련 조항을 조금만 들여다보아도 알 수 있다.

‘김영란법’은 금품수수와 부정청탁, 이 두 가지를 금지하고 있다. 국회의원 역시 이 두 가지 영역 모두에서 김영란법의 적용을 받는다. ‘식사 3만 원, 선물 5만 원, 경조사비 10만 원’의 상한선 적용도 같다. 1회 100만 원을 초과하는 금품 수수 시 국회의원도 직무관련성이나 대가성 여부를 따지지 않고 형사처벌을 받는다.

다만 김영란법은 국회의원이 “공익적인 목적으로 제3자의 고충민원을 전달하는 행위”에 대해서는 허용하고 있다. 이걸 두고 ‘국회의원은 김영란법의 적용을 받지 않는다’는 논란이 제기된 것인데, 이 예외는 국회의원이 국민의 고충민원 전달창구 역할을 하는 데 위축되지 않도록 하기 위한 것이다. 국민이 헌법상 보장된 ‘청원권’을 충실히 보장받을 수 있도록 한 것인데, ‘국회의원’이라는 직업의 존재 이유가 바로 그 역할의 수행에 있다는 걸 떠올리면 이 논란이 얼마나 터무니없는 것인지 알 수 있다.

언론이 가진 펜대의 힘을 상징적으로 드러낸 ‘무관의 제왕’이라는 다섯 자가, 이 땅의 언론인들을 제왕적 지위를 남용하며 펜을 칼처럼 마구 휘두르는 폭군으로 만들어 버린 것일까. 혹자는 “생각 없이 3만원 조금 넘는 점심을 얻어먹은 기자가 그걸로 발목을 잡혀 또 다른 강자에게 협박을 당하는 식으로 이 법이 악용될 수도 있다”고 주장한다.

‘김영란법’의 제정안이 처음 발표되고 이에 대한 논의가 시작된 건 2012년이다. 언론사의 규모와 성향을 떠나 대한민국에서 기자 직함을 달고 있는 사람 치고 이 법의 내용과 시행일자를 모르는 이가 없을 텐데, 그 정도로 생각이 없다면 그건 기자 본인이 펜대를 꺾어야 할 일이지 부정청탁 금지법을 탓할 일이 못된다.

이 법의 시행으로 내수 경제가 망할 거라는 식의 주장도 참담하긴 마찬가지다. 이건 마치 똥개들이 “우리가 거리에 똥을 내갈기지 않으면 거리의 청소부들이 일자리를 잃게 되니, 똥 싸는 일을 멈출 수 없다”고 주장하는 격이 아닐까. 당장 일자리를 잃을 이들에 대한 걱정 자체가 불필요한 것은 아니겠으나, 그게 똥개들 입에서 나올 소리는 아니라는 얘기다.

기자들과 일부 사람들이 늘어놓는 궤변을 보고 있자니, 이 법이 반드시 시행되어야겠다는 생각이 점점 확고해진다. ‘실효성’에 논란이 있을 순 있겠지만, 제 밥값 스스로 내자는 것에 대체 어떤 논쟁의 여지가 있을 수 있을까.

이 나라는 ‘더치페이’라는 것 자체를 굉장히 후진 것으로 인식하는 문화가 팽배해 있다. 더치페이라는 말은 영국이 네덜란드를 비하하고자 한 “밥값을 각자 내는 그런 찌질한 문화는 모두 네덜란드로 꺼져버렷!” 하는 의미의 “Go dutch”에서 유래했는데, 우리가 더치페이에 대해 가지고 있는 인식도 정확히 그러하다. 그러니 동등한 관계도 아닌 ‘한쪽이 좀 아쉬울 게 있는’ 관계에서 더치페이가 오가길 기대한다는 건, 이런 문화권에서 거의 불가능에 가까운 얘기다. 비단 언론계, 공직계의 문제가 아님은 물론이다. 솔직해보자. 나에게 부탁할 거리가 있는 상대를 만나면서 스스로 밥값을 내는 이가 대한민국에 과연 몇이나 될까?

이제는 바뀔 때가 되었다. 이 법의 실효성을 논하려거든, 언론계와 공직계를 떠나 국민 개개인의 의식 전환에 대한 논의가 반드시 수반되어야 한다. 공직자, 언론인의 청렴도는 그 나라 국민 전체의 청렴도와 비례한다는 게 내 생각이다. 공직자도 언론인도 어디 별나라에서 온 사람들이 아니며, 전부 우리의 가족이고 친구고 지인이다. 법 제정으로 순식간에 아름다운 세상이 되지 않을 것이라는 것 역시 자명한 일이다.

제 돈으로 밥을 사면 큰일이라도 나는 줄 아는 일부 기자들의 불편한 근성에 대고 손가락질 하는 것은 좋다. 그러나 나는 ‘김영란법’의 제정이, 나머지 네 손가락이 가리키고 있는 우리들 스스로를 돌아보게 하는 계기가 되었으면 좋겠다. 회사에 비품으로 쌓인 볼펜 몇 자루 복사용지 몇 장 슬쩍 집으로 들고 들어오고, 공짜 선물은 일단 받아놓고 보고. 그런 것들을 나부터 고쳐 나가야지, 공직자·언론인들을 향해 실컷 손가락질하는 것에서 그친다면 청렴한 세상이란 요원할 것이다.

이 법의 실효성과 부작용을 생각하면 우려되는 부분이 결코 없지 않다. 그러나 나무가 썩었으면, 썩은 부분은 전부 도려내는 게 맞다. 조금씩 도려내다가는 건강한 부위까지 썩고 만다. 썩은 부위를 모두 도려내고 나면 겨우 밑동만 남을지라도, 우리는 그 길을 택해야 한다.

밑동만 남은 나무가 아름드리 큰 나무로 자랄 때까지는 기약 없이 오랜 시간이 걸릴 것이다. 그러나 내가 결국 밑동만 보고 눈을 감을지라도, 내 아이들 내 손자 손녀들이 살아가는 세상에는 그 밑동이 자라 어느덧 아름드리 큰 나무가 되어 있지 않을까. 나는 그런 기대로 오늘을 살아가고 싶다. 이 까마득한 헬조선에 어울리지 않는 백마를 타고 온 초인, ‘김영란법’이 퍽 반갑게 여겨지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큰 강물은 비로소 문을 열었다.

정소담 <MAXIM> 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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