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코피노.’ 우리 사회의 어두운 그림자 중 하나다. 단어만 놓고보면 코피노는 한국인과 필리핀인의 혼혈을 뜻하는 말이다. 하지만 부정적으로 쓰이는 경우가 많다. 코피노의 의미가 ‘한국인 아버지로부터 버림받고 필리핀 어머니가 혼자 양육하는 한국 혈통의 필리핀인’으로 통용될 때가 더 많기 때문이다.
지난 3월 <SBS 스페셜> ‘아빠 찾는 게 죄인가요’ 편에는 엄마 아미 씨(30)와 아들 김루터 군이 등장해 눈시울을 붉히게 한 바 있다. 새하얀 피부, 사슴 같은 눈망울의 루터는 다섯 살이다. 겉으로 보기엔 귀여운 개구쟁이로 보이지만 G6PD(적혈구 효소 결핍에 의한 용혈성 빈혈)이라는 난치병을 앓고 있다.
<SBS 스페셜>에 등장한 다섯 살 루터 군의 모습. 출처=방송화면 캡처 |
지난 2011년 7월 아미 씨는 필리핀 마닐라에서 영어강사로 일하던 중 학생이던 한국인 김 아무개(28) 씨를 만나 사랑에 빠진다. 그러나 김 씨는 아미 씨의 임신을 알게 되자 낙태를 강요했다. 그러다 부모 핑계를 대며 한국으로 돌아가 버렸다. 아미 씨와 가족들은 부족한 살림이지만 아이를 사랑으로 키웠다. 넉넉하진 않아도 아미 씨는 필리핀 명문대를 졸업하고 회사에 취업해 루터를 혼자 키울 수 있었다.
하지만 루터의 병 때문에 상황이 달라졌다. 루터가 앓고 있는 G6PD는 평생 음식을 주의해야 하고 혹시 음식을 잘못 먹으면 온몸에 멍이 들거나 최악의 경우 생명을 잃을 수도 있는 난치병이다. 루터를 돌보기 위해 아미 씨는 회사를 그만두고 시간제 비정규직을 선택했다.
2년 전쯤 아미 씨는 루터의 수술비를 마련하고자 메신저와 이메일 등을 통해 생부 김 씨에게 연락했지만 전혀 답장이 없어 포기한 상태였다. 하지만 루터의 상태가 더욱 심각해지자 2014년 5월 김 씨를 상대로 양육비 청구소송을 제기했고, 약 1년 후 1000만 원가량의 돈을 받을 수 있었다. 하지만 겨우 받은 이 돈도 앞으로의 모든 양육비를 일시불로 받은 셈이라 이후 지원도 기대할 수 없고, 연락도 할 수 없다.
어렵게 받은 이 돈은 꼬박 루터에게 들어간다. G6PD 때문에 콩을 먹으면 빈혈이 심해지고 혈액암도 유발할 수 있어 루터는 아무 음식이나 먹을 수 없다. 보통 분유보다 3~4배 비싼 특수 분유도 먹어야 했다. 병원비만 한 달에 50만여 원이 들었다. 필리핀에서는 한 달 월급에 맞먹는 금액이다.
최근 루터의 상황이 더욱 심각해졌다. 또 다른 병이 있다는 것을 알았기 때문이다. 루터의 치아가 감염됐고 종양까지 생겼다. 볼이 부풀어 올랐고 통증을 호소하고 있는 데다 당장 수술을 받지 않으면 종양이 뇌와 심장으로 번져 생명이 위독해질 수 있는 상태였다. 더군다나 필리핀에는 치아종양 수술을 할 만한 병원이 없다고 한다. 한국에 오고 싶지만 수술비와 체류비까지 합하면 약 2000만 원 정도가 필요할 전망이다.
루터와 엄마 아미 씨. |
안타깝게 발만 구르던 아미 씨에게 한 줄기 빛이 나타났다. 루터의 사연이 전파를 탄 직후인 4월 초 한국의 건설회사 본부장인 A 씨가 후원자로 나서겠다며 연락을 해온 것이다. 아미 씨와 친분이 있는 임하진 씨는 “그 소식을 들은 저와 아미는 너무 감사하며 같이 기뻐하였고 루터의 수술이 잡혀 한국 오면 꼭 만나서 같이 회포를 풀자 이야기하였다”며 당시 분위기를 전했다.
하지만 약속한 6월 17일 수술은 할 수 없었다. A 씨가 병원 측과 본인의 사정으로 인해 날짜를 7월로 미루자고 했기 때문이다. 루터의 증상이 점점 더 악화되고 있었지만 지원을 받는 입장에서 아무 말도 할 수 없던 아미 씨와 가족들은 그저 속만 태우며 기다렸다. 두 번째 약속된 7월 15일도 지켜지지 않았다. 결국 A 씨는 루터의 수술은 없다고 입장을 바꿨다. 몇 달 동안 루터 가족에게 A 씨는 ‘병원과 협의가 됐다’며 후원자로 믿고 기다리라고 말했지만, 그 약속은 지켜지지 않았다.
코피노지원단체를 이끌고 있는 구본창 위 러브 코피노(WLK) 대표(53)는 “A 씨가 갑자기 후원을 끊은 이유는 알 수도 없었고 연락도 안 된다. 병세는 악화되는 데 시간만 끌다 후원을 안 한다는 점이 너무나 원망스럽다”며 “빨리 수술을 받지 못하면 입 안 종양 때문에 턱 밑 전체를 절개해야 한다. 기부 등을 통해 소액이라도 큰 힘이 될 수 있으니 도움을 줄 수 있었으면 좋겠다”고 밝혔다.
사람을 믿은, 한국을 또 한 번 믿은 루터 가족은 다시 한 번 상처를 받고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상황이다. 이 같은 상황에서도 아미 씨는 한국인을 원망하지 않는다. 도와주기 위해 손 내밀어 준 것 자체가 고맙다는 것이다. 아미 씨는 “루터를 위해 일해주시는 한국 사람들에게 너무 감사하게 생각한다. 루터가 크면, 얼마나 많은 한국 사람들이 루터를 도와주었는지 꼭 말해줄 것이다”라고 말했다.
그럼에도 현실의 시간은 냉혹하다. 시간이 지날수록 루터의 병세가 더욱 심각해지고 있다. 도움이 절실하다. 임하진 씨는 “루터와 아미의 가족들은 한국인 아버지에게 버림받은 상처를 가지고 있는데 이번에 한 번 더 한국이 그들을 버렸다는 상처를 가지게 생겼다”며 “누군가 나서 루터를 도와줬으면 좋겠다. 이번에는 한국이 루터 가족에게 손을 내밀었으면 한다”라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