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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빠랑] 우리가 놓친 시공간을 찾아, 광주 1

2016.07.22(Fri) 09:07:39

번듯한 상가와 아파트 단지가 들어서지 않으면 지역이 낙후되었다며 탄식을 늘어놓는 이 나라에서 100년의 시간과 그 궤적을 한 번에 만나는 도시가 있다는 건 너무나 반가운 일이다. 게다가 비교적 최근의 현대사까지 폭넓은 시간의 스펙트럼을 두르고 있는 경우는 더 드물다.

그런 이유로 광주는 1900년 초반에서 1980년, 그리고 20세기 초반의 생활공간이 재해석되고 재생되어 다시 빛을 발하는 곳에서의 풍성한 경험이 가능한 인상적인 도시이다. 그 시간을 거닐며 마주할 역사와 사람의 이야기들이 있어서이다.

# 1980년 5월의 광주

“아빠가 초등학교 2학년 때였어.” 

“그럼 나보다 한 살 어렸을 때네?”

“응, 그때 봤던 신문이랑 TV가 지금도 아주 또렷하게 생각나.”

“전쟁이 난 거 아니었어?”

“전쟁은 아니었지.”

“군인들이 총을 쏘고 사람이 죽고 그랬다며?”

“…그러게….”

그러고 보니 정말 딱 아들 녀석 또래였다. 광주에서 폭동이 났다는 숱한 뉴스를 접했던 것이. 제한된 채 전해진 사진들과 TV 화면을 보며 정말 이러다가 큰일 나겠다 싶던 기억이 생생하다. 그 이야기를, ‘5월의 진짜 광주’를 초등학교 3학년 아이에게 설명하기란 한계가 있다 싶어 결정한 광주행이었다. 그러니까 당연히 그 첫 여정은 80년 5월의 그 거리였다.

   
옛 전남도청은 민주평화교류원과 국립아시아문화전당 건물로 쓰이고 있다. 분수만이 옛 모습 그대로다.

광주에 도착해 처음 방향을 잡은 곳은 옛 전남도청. 시민군의 마지막 항전이 있던 상징과도 같은 곳. 그러나 만약 당신이 그 언젠가 ‘5월 광주’의 현장을 온 적 있었고, 그 뒤로 꽤 오랜만에 다시 찾았다면 도청과 그 주변의 달라진 모습이 어색할지 모른다.

2005년 무안으로 전라남도청의 기능이 이전하면서 옛 도청 본관과 부속 건물들은 이제 민주평화교류원 혹은 도청 뒤에 웅장하게 자리한 국립아시아문화전당의 부속 건물로 쓰이고 있다. 다행히 오랜 흑백 사진과 영상으로 기억되던 그 건물의 형체는 짐작하기 충분하다. 심지어 몇 번의 리모델링을 거치는 사이 새하얀 외벽에 그럴듯한 세련미까지 갖추었다.

그러나 훗날 어른이 되어서 충격 속에 마주했던 사진과 영상 속, 시민군의 피로 물들었던 도청의 계단이며, 깨진 유리창, 벽 곳곳의 탄흔은 어디서도 볼 수 없다. 알고 보니 리모델링 과정에서, 그리고 민주평화교류원으로 기능을 더하는 사이 5·18민주평화기념관(옛 전남도청 본관)의 복도며 화장실 등에 그 전까지 남아 있던 탄흔을 아예 긁어낸 후 시멘트를 덧발랐고, 시민군의 방송실과 상황실도 아예 없애거나 옛 모습을 알아볼 수 없게 개조했단다. 이 때문에 요즘 광주 지역이 시끄럽다. 이 건물의 유지 관리 책임을 맡은 문화체육관광부는 이미 끝난 공사이고 예산도 부족해서 복원이 힘들다는 입장이지만 광주의 시민 단체들은 거세게 반발하고 있다.

이 도시의, 우리 현대사의 가장 아픈 역사가 이토록 바삐, 꼼꼼하게 덮어야 했던 것일까 싶은 마음에 씁쓸함이 밀려온다. 일제강점기의 흔적은 큰 예산을 들이고 최대한 옛 모습을 되살려 관광객 한 명이라도 더 유치하려는 우리의 모습과 절묘한 엇박자를 연주하고 있는 셈이다.

도청 앞의 분수대는 그나마 옛 모습에 더 가까운 편이다. 계엄군을 광주에서 몰아낸 시민들이 매일 같이 구름처럼 모여 연설을 하거나 듣고 궐기 대회를 열었던 예의 그 장소로 사람들에게 익숙한 공간이다. 이 분수대 주변 너른 광장을 오가는 이들은 솟아오르는 물줄기를 배경으로 기념사진을 찍곤 한다.

이 옛 전남도청 건물과 광장, 분수대를 중심으로 1980년 5월 광주의 주요한 사건들이 벌어졌던 금남로가 지나간다. 그 역사의 현장들은 이제 ‘오월길’이라는 이름의 걷기 길이자 순례길로 조성되어 있는데, 계엄군 첫 발포지, 전남대학교 정문, 녹두서점, 옛 광주 MBC 등마다 당시를 알리는 사실을 담은 기념비가 세워져 있어 많은 이들이 발길을 이어가고 있다.

# 고층빌딩 옆에 자리한 고통의 역사

5월의 광주 거리에서 계엄군에 붙잡혀 중죄인 취급 받으며 광주 시민들이 끌려온 곳은 상무대였다. 그러니까 광주민주화운동의 전반에서 비교적 덜 알려진, 광주 도심에서의 폭압 이후에 시민들에게 그 못지않은 고통이 시작되었던 공간이다.

   
5·18 당시 모습을 재현한 5·18 자유공원. 곱게 자란 푸른 잔디가 되레 역설적이다.

상무대는 원래 보병, 포병, 기갑, 화학, 공병 등의 병과를 부여 받은 장병들이 교육을 받았던 육군 최대의 군사 교육 시설이었다. 그만큼 규모도 방대했는데, 80년 5월 이곳은 계엄군의 거점 구실을 하였다. 그러다가 90년대 후반 전남 장성으로 상무대가 옮겨가고 그 자리는 대단위 아파트 단지와 상업 시설, 김대중컨벤션센터 등이 들어서며 ‘상무지구’라는 이름을 얻었다. 그러나 바로 그 폭력의 역사를 말해주는 ‘5·18 자유공원’이 조성되어 있다. 빼곡한 아파트와 컨벤션센터, 상가와 외국계 호텔과 바로 이웃하고 있어 얼핏 부조화스럽긴 하지만 지난 역사의 생명과 같은 현장성을 지켜낸 것만으로도 의미는 충분하다.

이곳에서 계엄군에게 끌려간 광주 시민들이 어떤 취급을 받으며 서슬 퍼런 폭력에 시달렸는지를 생생히 접하게 된다. 옛 군사 법정과 영창, 헌병 내무반과 사무실 등의 공간이 그대로 복원되어 있고, 마당과 건물 안 곳곳에서는 당시 시민들에게 자행된 갖은 악행들이 마네킹 재현과 설명, 사진 자료 등을 통해 전해진다. 곱게 자란 푸른 잔디가 묘하게 역설적이다.

옛 모습 그대로 자리만 살짝 비켜 재현되어 있는 영창에서 모진 구타와 고문, 몸조차 제대로 뉠 수 없이 빼곡하게 수용되었다는 사실을 접하고, 군사 법정에서 죄인 아닌 죄인이 되어 포승줄에 묶인 채 서 있는 시민의 모형을 보는 것만으로도 섬뜩했던 잔혹함과 공포가 전해지는 느낌에 등골이 오싹해진다.

   
소리 없는 통곡이 가득한 국립 5·18 민주묘지.

이곳에서는 사전 예약에 따라 영창에서의 구속과 재판 과정을 경험하는 체험 프로그램도 운영해 학생과 일반인들의 참가가 끊이지 않는다. 36년 전 이 창살 너머에서 모진 폭력에 시달렸을 (어쩌면 그렇게 세상을 떠났을지 모를) 이름 모를 그 누군가에 대한 아픔으로 여전히 가슴이 먹먹해지는지 이곳에서 확인해보기를 권한다.

그리고 광주 곳곳에서 숨져 간 시민들이 마지막으로 안식을 얻은 그곳, 국립 5·18 민주묘지로 향했다. 가지런히 놓인 비석과 묘 앞에 서면 1980년 5월의 어느 하루로 삶의 시계가 멈춘 이들의 최후가 더 생생한 현실로 다가 온다. 묘비는 말로는 차마 다 못할 슬픔들을 전하고 있다. 이 넓은 묘지에 가라앉은 적막 사이로, 17살에 거리에서 숨을 거둔 아들에 보내는 엄마의 편지와 먼저 간 아내에게 남기는 남편의 통곡이 소리 없이 가득하다.

남기환 여행프리랜서

(2편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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