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용필의 노래 한 곡이 생각난다. “자알 있거라 나아는 간다아… 대저언발 영시 오오십분∼.”
원래는 1959년에 발표되었고, 조용필이 리바이벌해서 다시 인기를 얻었다. 대전은, 그래서 우리 국민들에게 ‘영시 오십분’의 기억을 남기고 있는 도시다. 대전은 근대 이후로 물류 이동과 분화의 교통 중심이었기 때문이다.
오래전, 이 기차는 목포로 가는 호남선 완행열차였다. 서울이나 용산에서 달려온 기차는 대개 대전역에서 오래 쉬었다. 출출한 배를 달래야 했다. 대전은 지금도 중장년 이상에게는 가락국수 먹던 추억을 가진 역이다. 기차가 서자마자 전력질주하여 가락국수 판매대에 줄을 서서 입을 홀랑 벗겨가며 뜨거운 국물을 마셨다. 그 국물의 주원료야 뭐 멸치에 조미료 정도가 아니었겠는가. 면도 불었다. 그래도 좋았다. 국수를 먹고 있으면 역무원의 호각소리가 들리고 기차가 이미 움직였다. 완행열차도 없어지고, 오래 정차하는 열차도 없으니 플랫폼에서 파는 국수도 시들하다. 그래도 대전역은 이 역사를 오래 이어가고 싶어한다. 역사 내에 여전히 가락국숫집이 성업하는 걸로 알 수 있다.
대전에는 플랫폼 국수 말고 전설적인 국수집이 하나 있다. 원도심, 그러니까 이제 별로 사람들도 다니지 않는 허름한 동네에 있다. 바로 신도칼국수다. 한 그릇 4000원. 말도 안 되는 가격에 엄청난 양의 국수를 담아낸다. 이것에는 역사가 있다.
신도칼국수의 칼국수 한 그릇을 직수굿하게 먹는다. 배가 부르고, 삶이 느긋해진다. |
가게 안에 사진 한 장이 있다. 창업주 김상분 여사다. 생 1926, 몰 1998. 이 간결한 시간 안에 우리 삶의 고단한 역사가 깃들어 있다. 그것은 이 집 칼국수 한 그릇으로 다시 상징된다. 국수를 시킨다. 묵묵히, 다른 이들처럼 먹는다. 칼국수처럼, 단 한 그릇의 음식에 우리 현대사가 녹아 있는 경우도 드물 것 같다. 신도칼국수의 이름은 그렇게 역사에 남아 있다.
“어머니께서 원래 역전에서 냉면집 같은 걸 하셨답니다. 나중에 이곳으로 옮겨와서 칼국수를 본격적으로 팔게 되었지요.”
며느리 이명주 씨(52)의 설명이다. 김 할머니는 외아들을 두었다. 이 씨의 남편 박종배 씨(58)다. 현재 대전역 앞의 본점은 박 씨가 담당하고, 며느리 이 씨는 월평동에서 분점을 열어 이끌고 있다. 분점을 낸 것은 15년 전의 일이다.
“지금 본점은 옆집을 사서 튼 겁니다. 원래 40석 정도 되는 작은 가게였어요. 처음엔 국수 한 그릇에 30원이었어요. 양도 많았고. 남편이 나중에 물려받고 가게를 조금 확장했어요. 오랫동안 쓰던 연탄불도 가스로 바꾸었지요.”
신도칼국수가 유명해진 것은 여러 이유가 있을 것이다. 김 할머니를 기억하는 오랜 단골들에게 단 하나를 꼽으라면 그의 너른 마음이라고 한다.
“냉면집을 하시는데, 아무래도 값이 좀 나갔대요. 당시 역 앞에는 가난한 사람들이 많았습니다. 짐꾼과 마차꾼 같은 이들이 배불리 먹을 건 뭐가 있을까 하시다가 칼국수로 업종을 바꾸신 겁니다. 기차 승객도 엄청나게 많았고, 하여튼 손님은 많았다고 해요. 그러니 그들이 배불리 먹을 음식을 하는 게 중요했던 것이지요.”
가게 한쪽 벽에는 개업 이후 바뀐 칼국수 그릇이 본래대로 쭉 붙어 있다. |
가게 한쪽에는 아주 특이한 조형물이 있다. 개업 이후 바뀐 칼국수 그릇이 본래 모양 그대로 쭉 붙어 있다. 신도칼국수의 명물이다. 과연, 개업 초기 60년대에는 지금보다 서너 배나 되는 양이다.
“지금도 양이 많은 편입니다. 그러니 당시엔 얼마나 많았겠어요. 그래도 남기는 사람은 없었다고 해요.”
김 할머니의 인심은 워낙 소문이 났다. 양은바케쓰(양동이)를 가지고 와서 2인분을 달라고 하면 가득 담아서 내기도 했다. 가난한 자들을 그냥 두고 보지 않았다. 밀가루 값이 싸니까 된다,고만 하면서 그렇게 손이 컸다. 밀가루가 싸긴 했다.
한국은 미국의 원조물자로 50년대, 60년대의 어려운 시기를 넘겼다. 그중 밀가루가 압권이다. 미국이 원조로, 나중에는 싸게 수출한 밀가루로 우리 배를 채울 수 있었다. 현재 우리의 밀가루 문화는 바로 이때 비롯된 것이다. 빵, 국수, 우동. 이것이 없었다면 우리의 영양도 엉망이었을 것이다. 이승만, 박정희 정권의 정치적 안정도 바로 밀가루에서 비롯된 것이라는 게 현대 정치학자들의 평가다.
신도칼국수에서 직수굿하게 국수 한 그릇을 먹는다. 현대사의 한 시기가 지나간다. 뜨거운 국물까지 모두 마신다. 배가 부르고, 삶이 느긋해진다. 아, 그렇게 우리는 한 세상을 넘겨왔던 것인가.
박찬일 셰프
서울에서 났다. 1999년부터 요리사로 살면서 글도 쓰고 있다. 경향에 <박찬일 셰프의 맛있는 미학>, 한겨레에 <박찬일의 국수주의자>(문자 그대로 국수에 대한 연속 칼럼)을 연재하고 있다. 단행본으로 한국의 오래된 식당을 최초로 심층 인터뷰하고 취재한 <백년식당>을 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