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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30현자타임] 디자인공모전의 갑질

2016.07.11(Mon) 18:03:29

“내 여자친구 좀 그려줄래?”

“얼마 줄 거냐고? 야, 친구끼리 무슨 돈이야. 그냥 그림인데!”

대한민국에서 디자인은 싸다. 미술·디자인 전공자들은 공짜로 무언가를 그려달라거나 만들어달라는 지인의 부탁에 스트레스를 받는다고 하소연한다. 얼마 하지도 않는 종이와 물감(심지어 물감은 싸지도 않다)이면 되는 그림에 돈을 받는다고 하면 사람들은 납득하지 못한다. 더군다나 컴퓨터로 포토샵 좀 하면 된다고 생각하는 디자인은 더더욱 값어치를 인정받기 힘들다.

   
 

이 포스터는 모 의류 편집숍의 로고 디자인 공모전 포스터다. 로고와 심벌을 심사하는 공모전이다. 하지만 제출내역에 ‘원본 데이터’가 있다. ai파일(혹은 psd파일)은 포토샵, 일러스트레이터와 같은 디자인 프로그램을 통해 디자인 시안을 수정할 수 있는 파일로서 이 파일이 있다면 누구든 원저작물을 자유롭게 수정할 수 있다. 즉, ai파일 제출은 디자인에 관한 모든 것을 넘기는 것을 의미한다.

더군다나 유의사항에 적힌 공모전 규정은 ‘작품의 판권, 사용권, 저작권, 지적 재산권 등 모든 권리’의 귀속을 규정한다. 또 ‘디자인 변경이 가능하다’도 아닌 디자인 변경 ‘요구’에 응해야 한다고 규정하고 있다. 마지막으로 수상작이 선정되지 않을 수 있다고 되어 있는데, 즉 주최 측이 시상조차 하지 않고 모든 응모작의 디자인 권리를 얻을 수 있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이런 ‘엄격한’ 조건의 공모전의 상품은 뭘까? 우승자 1명에게 100만 원, 그것도 현금이 아닌 본인들의 상품 중 100만 원 상당의 현물을 준다는 것이다.

무조건적으로 모든 권리를 내놓고, 주최 측의 요구에 따라 수정하는 역할까지 해야 하는데 겨우 1명에게 100만 원 상당의 자사 물건을 준다는, 황당한 갑질이라고밖에 볼 수 없는 이 공모전의 조건은 단지 이 공모전에 국한된 일일까?

   
 

그렇지 않다. 원본 파일 제출, 모든 권리 귀속, 요구 이행조건, 수상작을 선정하지 않을 가능성, 그리고 적은 상금은 거의 모든 디자인 공모전에서 찾아 볼 수 있는 ‘보편적인’ 조건이다. 필자가 조사해본 결과 80∼90%의 공모전이 이런 조건에서 벗어나지 않았으며 심지어 상금이 없는 공모전도 있다.

모든 데이터를 제공하며 주최 측의 수정요구까지 이행한다는 것은 사실상 디자인 외주를 맡기는 일과 다를 바 없다. 보통 업계에서 로고, 심벌, 포스터 디자인은 업계 1∼3년차 디자이너의 경우에도 최소 50만∼100만 원선에서 가격이 형성되어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수많은 기업들이 시장가격에도 못 미치는 상금으로 디자이너들을 마음대로 부려 먹고 있는 것이다. 더군다나 이런 문제가 광범위하게 발생하고 있다.

“그런 조건이면 네가 안 하면 되잖아.”

스펙에 한 줄이라도 쓰고 포트폴리오라도 채우고 싶은 절박한 학부생과 신인 디자이너들에게 이런 조언과 대응은 무의미하고, 현실을 바꿀 수도 없다. 얼마 전 조영남 씨가 자신의 대작행위를 ‘관행’이라며 옹호했다. 디자이너 이상봉 씨가 디자인 인턴에게 열정페이를 지급해 논란이 됐을 때도 ‘패션계의 관행’이라는 변명이 뒤따랐다. 사전에 따르면, 관행은 오래전부터 해오던 대로 한 행동을 의미한다. 하지만 대한민국에선 갑들이 행하는 수많은 부조리, 갑질이 바로 이 ‘관행’이라는 가면을 쓴 채 정당화되고 있다. 관행이 사회 전반에 걸친 부조리라는 인식을 하지 않는 한 절박하고 연약한 개인은 현실 앞에 무력하다.

“공모전은 원래 그래”가 아닌 “이건 갑질이다”라는 인식과 고발이 해결의 시작이다.

남궁민 ‘예술을 빌려드립니다’ Paleto 대표

비즈한국

bizhk@bizhankook.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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