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국이 국민투표를 통해 유럽연합(EU)을 탈퇴키로 결정했다. 앞으로 영국은 독일·프랑스·스페인 등 EU 국가는 물론 EU와 자유무역협정(FTA)을 맺은 나라와의 수출에서 관세 혜택을 받지 못한다. 반대로 다른 나라로부터 수입하는 물품에도 관세 혜택을 적용하지 않는다. 자원과 상품은 물론 사람의 이동까지 규제한다. 영국 국민들이 40년 전 자국 중심주의 경제체제로 돌아가겠단 선택을 한 것이다.
이런 신고립주의는 선진국을 중심으로 세계 곳곳에서 나타난다. 먼저 사실상 미국 공화당 대선 후보로 뽑힌 도널드 트럼프는 세계 최대 경제통합체인 환태평양경제동반자협정(TPP) 탈퇴를 주장하고 있다. TPP가 미국의 무역적자와 실업률을 키우고 있다며, 지난 20년간 이어진 블록경제체제를 뿌리째 흔들고 있다.
영국의 EU 탈퇴로 평소 EU 체제에 불만을 갖고 있던 나라들의 연쇄 탈퇴도 우려된다. 현재 네덜란드와 스페인의 탈퇴 가능성이 제기되고 있으며, 덴마크·체코·프랑스 등도 거론된다. 대부분 난민과 일자리 문제, 상대적 박탈감 등을 느끼는 나라들로 실제 EU 가입으로 득보다 실이 많은 입장이다. 현재 상황에서 한두 국가만 추가로 EU체제에서 벗어나면 도미노 탈퇴에 따른 EU의 붕괴 가능성은 높아진다.
서구 선진국의 이런 불만의 대상은 대개 한국·중국·일본 등 제조업 중심의 아시아 국가다. 조선·중공업·자동차·철강처럼 고용창출 능력과 경제유발효과가 큰 산업을 모두 신흥국에 뺏기며 선진국의 일자리가 줄고 경제 규모가 축소된 것이 문제다. 급격한 경제성장을 일군 아시아 국가들은 맹렬한 기술 개발과 경쟁을 통해 제조업에서 막강한 경쟁력을 갖춘 데 비해 독일을 제외한 대부분 서구 선진국은 이런 흐름을 따라오지 못했다.
이 때문에 신고립주의와 국가 간 통상 문제는 앞으로 장기화, 국제문제화 될 가능성이 높다. 특히 국내총생산(GDP)의 90%가 교역에서 나오는 한국의 경우는 철저하게 대비해야 한다. 류승민 국제무역연구원 수석전문위원은 “정부가 그간 관세 장벽을 낮추는 노력을 해왔는데, 보호무역의 기류가 강해지면 관세 장벽이 부활하고 통상 마찰이 늘어날 가능성이 높다”고 우려했다.
그렇다면 현재 기업들의 준비태세는 어떨까. 삼성전자·현대자동차를 중심으로 한 10여 개 수출 대기업을 상대로 조사한 결과 신고립주의나 교역 위축에 따른 대응책을 준비 중인 기업은 단 한 곳도 없었다. 갑작스런 외부 충격에 대비한 단기 컨틴전시 플랜이나 환율 대응 방안을 보유한 기업도 찾아볼 수 없었다. 브렉시트의 후과를 묻는 질문엔 모두 “큰 영향이 없을 것”이란 내용의 대답만 돌아왔다.
한 그룹은 사회적 비판여론을 의식한 듯 ‘노코멘트’로 공식 입장을 표명했다. 하지만 내부적으론 유럽의 가전제품 판매에 영향을 살피는 정도에서 브렉시트 문제를 접근하고 있다는 전언이다. 다른 그룹 역시 “시장은 위축되겠지만, (경쟁사들이) 모두 동일한 조건이기에 큰 영향은 없을 것”이라며 대수롭지 않다는 반응을 보였다.
환율에 민감한 영향을 받는 유통업계도 무덤덤하긴 마찬가지다. 유통은 상품 수출입이 주된 일이라 글로벌 경영환경 변화와 환율 변동에 직접 영향을 받는다. 현대기아차의 경우 환율이 10원 떨어지면 영업이익이 2000억 원 감소한다. 현대차 전체 영업이익의 30분의 1 수준이다.
그럼에도 국내 최대 의류 유통업체 관계자는 “6개월 단위로 환 헤지를 하기 때문에 큰 영향은 없다”고 했다. 국내 최대 화장품회사 관계자는 “환율 불확실성은 있지만 큰 위험요소는 아니다”라고 했다.
그러나 브렉시트 이후 원·달러 환율은 1146.30원(6월 23일 기준)에서 1183.50원(6월 27일 기준)으로 40원 급등했고, 같은 기간 원·엔 환율은 100엔당 1083.20원에서 1165.15원으로 80원 치솟았다. 유통업계가 현재 상황을 안일하게 판단하고 있다는 얘기다.
또 다른 대기업 관계자는 “상황을 예의주시하고 있지만 보호무역주의가 확산할 것이란 생각은 안 한다”고 답했다. 이 기업의 회장이 “보호무역주의 확산으로 수출에 중대한 차질이 우려된다”는 내용의 편지를 임직원에게 발송하기 직전에 들은 얘기다. 타이어 회사 관계자도 “유예기간 동안 대응책을 마련하면 된다”는 반응이었다. 기업 오너 등은 최근의 분위기를 상당히 엄중하게 보고 있는데 비해 실무진에선 상황을 다소 가볍게 여기고 있는 셈이다.
국내 기업들은 2008년 글로벌 금융위기 이후 연달아 발생한 PIGS(포르투갈·이탈리아·그리스·스페인)·MENA(중동·북아프리카) 위기에 제대로 대처를 못해 심각한 자금난에 시달리는 등 호되게 당한 바 있다. 국제 위기는 시차를 두고 전이되기 때문에 시차를 두고 파장이 다가온다. PIGS 위기 때도 서유럽 국가들이 PIGS 국가에 자금을 추가 투입하기 위해 한국 등 동남아시아 투자금을 대거 회수하면서 위기가 커졌다. 여기에 당장 유럽 국가들의 소비가 줄면서 국내 제조업체의 수출도 타격을 입었다. 모두 위험이 발생한 뒤 3∼4개월 지나 생긴 일이다.
서진교 대외경제정책연구원 본부장은 “그간 선진국이 블록경제를 주도해 왔는데 갑자기 미국·EU가 보호무역주의로 기울면 한국에 타격이 불가피하다”며 “통상에 미칠 영향을 냉정히 분석해 대응 방안을 마련해야 한다”고 조언했다.
김서광 저널리스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