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제 술 한 잔 하자’라는 남자의 말은 ‘안녕, 잘 가!’의 다른 말이다. 그런데 ‘내 단골 바(BAR)로 초대할게’라는 말은 다르게 들린다. 그가 건설한 원더랜드의 문을 조심스럽게 열어주는 것 같아서다.
남자가 술을 권할 때, 여자는 종종 그 술의 종류로 자신의 가치를 체크하게 된다. 소주를 권하는 남자에게는 친구나 후배가 되고, 와인을 권하는 남자에게는 스스로 ‘여자’로 대접 받는 느낌이랄까.
그도 그럴 것이, 오랜만에 만난 선배들은 한결같이 말하지 않나. “소주나 한 잔 하자!”고. 대부분은 저녁 메뉴까지 따라붙는다. “삼겹살에 소주나 한 잔 하자!” 물론 선배의 ‘소주 제안’이 싫지는 않다. 게다가 삼겹살도, 소주도 좋아하는 나로서는 선배의 격의 없는 제안이 반가울 때가 많다. 다만, ‘소주’를 제안하는 선배에게서는 섹시함이 느껴지지 않는다. 시끌벅적한 고깃집에서 잔에 소주를 부으며 지친 하루를 서로 위로하는 광경에 섹시함이 끼어들 자리는 없으니까. 이때, 그와 나는 전우와 다를 바가 없다.
그런데 허물없이 지내던 남자 선배가 “오늘 저녁 위스키 어때? 내 단골 바로 초대할게”라고 제안한다면? 이때는 얘기가 달라진다. 남과 여 사이에 느낄 수 있는 적당한 긴장감이 생긴다고 할까.
혹자는 ‘술의 종류만 달라졌을 뿐인데! 너무 오버하는 거 아냐?’라고 반문하겠지만, 여기서 중요한 건 술의 종류가 아니라 술을 마시는 공간의 변화다. ‘단골 바’라는 사적인 영역에 여자는 ‘어떤’ 기대감을 갖게 된다. 음탕한 상상은 제쳐두고라도, 갑자기 그의 취향에 호기심이 생기는 것만은 분명하다. 마포든, 광화문이든, 청담동이든, 어떤 동네여도 비슷하게 느껴지는 고깃집과 달리, ‘단골 위스키 바’는 그의 라이프스타일이 드러나는 곳이기 때문이다.
아이러니하게도, 술집에 한해서는 트렌디한 감각이 오히려 남자의 매력을 떨어뜨릴 때가 많다. “저는 남자가 ‘핫한 바’라고 소문난 곳에 데리고 가는 게 싫더라고요. ‘Y1975’나 ‘더 브릿지’에 데리고 가면, ‘이 남자, 좀 노는구나’라는 생각이 들거든요. 그랜드하얏트의 ‘JJ마호니스’에 가는 남자는 ‘이 남자, 예전에 좀 놀았구나’라는 생각이 들고요. 최근 인기 있는 루프탑 바도 많잖아요. ‘PP서울’이나 ‘하베스트 남산’처럼 툭 트인 곳에서 서울의 야경을 내려다보며 술을 마시는 기분은 색다르지만 그의 취향이 느껴지진 않아요. 오히려 유명하진 않지만 바텐더의 느낌이 좋은 곳, 낡았지만 분위기가 좋은 바에 데려가면 그 남자가 달라 보여요. 이 남자 안에 내가 몰랐던 ‘뭔가’가 많을지도 모른다는 기대감이 들거든요.” 15년차 브랜드 컨설턴트 A의 말이다.
나 역시 여기에 동의한다. 힙스터들이 가는 바에서는 어쩐지 남자의 취향이 느껴지지 않는다. ‘나, 능력 좀 되거든?’이라고 허세를 부리는 것 같아 보기가 불편하달까. 오히려 입소문이 나지 않은 곳, 자신만의 단골바가 있는 남자가 더 섹시하게 느껴진다.
‘내 남자’가 혼자 가는 단골바 하나 없는 남자라면 좀 슬플 것 같다. 또 그가 매력적인 바의 단골손님이었으면 좋겠다. 오너 겸 바텐더와 술에 대한 소소한 이야기를 즐기는 그의 옆모습은 얼마나 매력적일 것인가. 키핑해둔 위스키를 꺼내 내게 따라주고, 바에서 흘러나오는 음악에 대한 추억을 들려주는 남자였으면 좋겠다. 그가 켜켜이 때가 묻어 더욱 근사해 보이는 데크가 있는 바에 데려가 줄 수 있는 남자이기를 바란다.
박훈희 칼럼니스트
‘좀 놀아본 언니’라는 필명의 섹스 칼럼니스트로 알려져 있지만, 실제 직업은 콘텐츠 기획자이다. 매거진 <퍼스트룩> 편집장을 거쳐 현재 책뿐 아니라 영상, 오프라인 행사 등 모든 종류의 콘텐츠를 기획·제작한다. 저서로는 <어땠어, 좋았어?>가 있다. ‘왓위민원트(What women want)’에서는 여자가 원하는 남자의 스타일에 대해서 이야기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