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14일 중소기업 A 사 대표는 일본 도레이가 최대주주인 도레이케미칼코리아(도레이) 대표이사와 실무진을 서울중앙지검에 고소했다. 흔한 갑과 을의 빤한 이야기 같지만 고소장 하나에 한 중소기업 대표의 피눈물이 담겨 있다. 고소인인 윤 아무개 A 사 대표(55)는 “잘하는 짓인지 모르겠다. 절벽으로 나아가는 기분이다”라고 표현했다. 대체 무슨 일이 일어났던 걸까.
▲ 서울 여의도 전경련회관에 위치한 도레이케미칼 본사. 사진=박은숙 기자 |
이번 고소의 발단은 지난 2010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당시 A 사는 무역업을 주력으로 창업 10년여 만에 연매출 300억 원대를 돌파했다. A 사와 거래하는 수출입 국가도 전 세계에 걸쳐 있었다. 지난 2010년에는 무역업에다 기존 10여 년 수출대행을 해주던 도레이(당시 웅진케미칼)와의 관계로 인해 제조업 임가공 비지니스로도 사업을 확장했다.
잘나가던 A 사에 그림자가 드리우기 시작한 건 도레이와 제조업으로 인연을 맺은 2년 뒤인 2012년부터다. 제조업을 강화하려던 윤 대표는 경북 구미에 있는 섬유공장에 생산라인을 추가하려고 했다. 그때 마침 도레이가 윤 대표에게 한 가지 제안을 했다고 한다.
윤 대표는 “추가 생산 설비 마련에 부족한 20억 원 선급금을 주고, 원자재도 줄 테니 설비를 완공해 임가공품을 납품해달라는 제안이 들어왔다. 도레이가 직접 자사 공장을 증설하려면 최소 150억 원이 드는 만큼 비용과 리스크를 덜 수 있고 설비 강화를 하려는 우리 회사의 입장과도 맞아 떨어져 윈-윈이 될 것으로 봤다”고 상황을 설명했다.
다만 걸리는 점이 없지는 않았다. 계약기간이 2012년 7월 1일부터 2017년 6월 30일로, 보통 1년 단위로 계약하는 업계 평균보다 지나치게 길었다. 또한 계약이 해지되더라도 협력사는 임가공한 제품과 동일한 제품을 3년 동안 생산 및 판매할 수 없다는 조항도 포함돼 있었다. 생산라인을 갖추기 위해서 추가 자금이 필요했던 윤 대표는 “라인이 완성되는 대로 임가공 물량을 주겠다”는 말을 믿고 따를 수밖에 없었다. 윤 대표는 20억 원도 필요했지만, 지난 10여 년간 거래를 잘해온 기업의 안정적 일감이 필요했기 때문이다.
결국 2012년 초 계약서에 도장을 찍었다. 선급금 20억 원은 생산라인 준비가 끝나고 도레이가 임가공 물량을 주기로 한 지난 2013년 1월부터 6개월 뒤인 같은 해 7월부터 24개월간 분할 상환키로 했다. 하지만 약속과 달리 도레이의 물량은 오지 않았다. 윤 대표는 “‘조금만 기다려봐라’며 차일피일 미루던 도레이 관계자들은 접촉도, 전화도 피했다. 어렵게 연락이 닿아도 ‘회사의 방침이고 나는 실무자라 아무것도 모른다’고 말할 뿐이었다”고 말했다.
물량은 오지 않는데 선급금 변제 기간은 다가왔다. 단 한 건의 물량도 없어 생산라인은 멈춰 있는 채로 돈만 내야 했다. 결국 건실한 기업이었던 A 사는 지난 2014년 2월 기업회생을 신청했다. 도레이(당시 웅진케미칼)는 A 사가 기업회생을 신청하자 계약마저 해지했다.
본격적인 도레이의 ‘갑질’은 웅진케미칼이 도레이로 완전히 매각된 지난 2014년 4월부터 시작됐다. 기업회생에 들어간 A 사에게 도레이는 선급금인 20억 원에 대한 반환금 명목으로 지난 2014년 8월부터 지난 5월까지 매달 약 3500만 원씩을 받아갔다.
도레이는 A 사에게 지난 2010년부터 맺어온 기존 거래라인에서 물량을 제공하고 임가공료를 지불하고 있었는데 임가공료의 약 15%를 이 반환금 명목으로 선제하고 지급한 것이다. 지난 5월까지 A 사가 도레이에게 변제한 금액은 8억 원에 달한다.
채무자회생및파산에관한법률에 따르면 법정관리인인 윤 대표가 채무자 중 도레이에게만 빚을 변제하는 것은 불법에 해당한다. 윤 대표는 “기업회생 상태로 허덕이고 있는데 임가공료 중 3500만 원씩 떼고 지급해 완전히 회사가 망할 위기에 처해 있다”며 “수없이 도레이에게 불법인 점을 설명하고 이렇게 돈을 내주면 더 이상 버틸 수 없다, 나중에 회사가 좋아지면 갚겠다고 호소해도 절대 변하지 않았다”고 말했다.
이번 윤 대표의 고소는 도레이의 태도가 전혀 변하지 않는 데서 나왔다. 자신이 법정관리인으로서 정당하게 빚을 변제하지 않았다는 죄를 스스로 밝히는 위험을 감수하면서도 도레이에게 이 같은 채무변제를 그만해달라는 호소였다.
윤 대표는 “지난 5월 18일 이영관, 니시모토 야스노부 도레이케미칼 공동대표 등에게 채무자회생및파산에관한법률에 근거하여 5월 25일까지 원상회복하도록 요청하고 그렇지 않을 경우 제가 양심선언을 하며 고소고발하겠다고 했음에도 오늘 현재까지 아무런 조치가 없는 것에 좌절했다”며 “만화 <송곳>의 한 장면처럼 ‘여기서는 그래도 되니까’라는 태도인 것 같아서 안타깝다”고 말했다.
지난 14일 결국 윤 대표는 도레이의 불법적인 채권 추심을 결재하고 승인했다며 최고경영자인 이영관 도레이케미칼 회장, 박찬구 전 도레이케미칼 대표이사와 실무진 및 책임자 2명을 채무자회생및파산에관한법률 위반 및 업무상 배임에 대한 공동정범 혐의로 서울중앙지검에 고소했다.
윤 대표는 “고소고발을 한다고 해서 이득은 없고 저 역시 처벌을 받을 가능성이 크다. 그러나 만일 법 항목에 고소고발하지 않을 수 없게 만든 그들의 죄가 없다면, 중소기업이 슈퍼갑과의 임가공 하청 관계에서 사업이 파탄 나고 개인의 삶 역시 영원히 신용불량자가 되는 결과가 만연할 것이다”고 밝혔다.
도레이 관계자는 “윤 대표의 소송에 대해서는 자세히 알아보며 준비 중이다”며 “윤 대표가 제기한 혐의에 대해서는 소명 자료를 법원에 제출했다. 앞으로 법원에서 모든 것이 밝혀질 것이다”고 밝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