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롯데정책본부가 조직적으로 증거를 인멸한 정황이 드러났습니다.”
지난 15일 서울중앙지검 롯데수사팀(특수4부·첨단범죄수사1부·방위사업수사부) 관계자가 기자들에게 밝힌 압수수색 결과다. 17일 압수수색 후에도 같은 말을 반복했다. 검찰 관계자는 “롯데그룹이 검찰 수사를 앞두고 디가우징(강력한 자기장으로 하드 등을 복구할 수 없도록 물리적으로 파괴)이나 WPM 프로그램(영구 삭제프로그램, 데이터 복원이 불가능)을 활용해 각종 중요 자료를 조직적으로 삭제, 검찰 수사를 방해했다”며 “롯데 직원들이 오너 일가를 보호하기 위해 입을 맞춘 것들을 하나씩 확인하고 있다”고 ‘경고성 메시지’를 보냈다.
증거 인멸에 대해서는 롯데그룹 측도 일부 인정하는 분위기다. 롯데정책본부 관계자는 “검찰 수사가 진행될 것이라는 얘기가 올해 초부터 돌지 않았느냐. 알면서 가만히 있는 게 오히려 바보”라면서도 “개인정보가 중요해지면서 회사 차원에서 주기적으로 데이터를 지운 부분도 있는데, 그 맥락에서 진행된 것까지 증거 인멸이라고 언론을 통해 비난하는 것은 검찰의 언론 플레이”라고 항변했다.
▲ 6월 10일 검찰 관계자가 롯데그룹 본사를 압수수색하기 위해 들어서고 있다. 사진=최준필 기자 |
롯데그룹 측도 가만히 있지 않았다. 비자금 조성(횡령)과 오너 일가에 대한 특혜(배임) 의혹으로 검찰 수사가 한창임에도 변호인단을 통해 검찰에 항의한 것. 그러고는 ‘검찰 수사를 보고 받은 신격호 총괄회장이 배스킨라빈스31 아이스크림을 먹고 난 뒤 딸(신영자 롯데복지재단 이사장)에 대해 수사를 철저히 해달라고 요청했다’는 ‘찌라시성’ 내용도 언론에 확인해줬다.
검찰은 왜 유독 롯데 수사에서 ‘언론전’에 나선 걸까. 검찰은 앞서 진행된 정운호 네이처리퍼블릭 대표와 홍만표·최유정 변호사의 ‘법조 로비 사건’ 중에는 언론 대응을 최소화했다. 주요 참고인이나 피의자의 진술도 구체적으로 알려주지 않았다. 정운호 대표 측에게 1억 원을 받은 현직 검사가 등장했음에도 ‘수사 중’이라며 확인해주지 않았다. 최근 몇 년 사이 진행된 사건 대부분에서 ‘증거 인멸’ 시도가 있었음에도 유독 롯데 사건에 대해서만 ‘조직적인 증거 인멸 시도가 있었다’며 롯데를 압박했다.
수사 진행상황도 신속하게 공개했다. 롯데 오너 일가의 비서 역할을 담당한 임원이 검찰 조사에서 “롯데 계열사들이 매년 신동빈 회장에게만 200억, 신격호 회장에게만 100억 원가량을 배당금으로 지급한다. 비밀 금고에서 나온 30억 원가량의 현금은 그분들에게 큰돈이 아니”라는 맥락에서 한 진술을, ‘300억 원가량이 계열사에서 매년 오너 일가로 흘러들어간 것으로 확인했다. 해당 금액이 비자금인지 확인하고 있다’고 언론에 공개했다. 다음날 주요 신문과 방송 톱뉴스는 ‘롯데 오너 일가 300억 비자금 의혹’으로 도배된 것은 당연한 결과다.
일각에서는 ‘홍만표 변호사 법조 로비 사건을 덮으려는 의도’라는 음모론도 제기되고 있지만, 그보다는 검찰이 언론전도 수사의 한 맥락으로 삼아 신격호 롯데그룹 총괄회장과 신동빈 회장을 압박하려는 것이라는 풀이가 힘을 받는다.
과거 검찰의 대기업 수사를 돌이켜보면 좀 더 쉽게 이해할 수 있다. 지금으로부터 10년 전인 지난 2006년, 대검찰청 중앙수사부(채동욱 수사기획관)는 현대차 비자금 사건을 수사했다. 현대자동차 본사 압수수색 과정에서 검찰은 정몽구 현대차그룹 회장의 비밀 금고를 ‘터는’ 데 성공했다. 1000억 원 상당의 비자금 규모는 물론, 현대글로비스를 통해 정의선 기아차 사장에게 경영권이 승계된 과정의 문제점도 여러 차례 언론에 확인해줬다.
언론전에서 밀린 정몽구 회장은 수사 말미, 검찰 고위 관계자와 직접 담판을 지었다고 한다. 정몽구 현대차 회장과 정의선 기아차 사장의 승계 과정에서 자행된 여러 범죄 혐의 중 기소 범위와 유무죄 인정 여부를 놓고 검찰과 ‘모종의 거래’를 한 것. ‘부자’ 중 아버지(정몽구 회장)만 구속 기소된 것도 정 회장 측의 의사가 반영된 결과로 알려졌다. 정몽구 회장 측은 재판 결과가 나오기 전에 1조 원 사회 환원을 발표하며 검찰에 백기 투항했다.
이번 롯데그룹 비자금 수사 역시 앞선 현대차 수사와 비슷한 맥락으로 진행될 가능성이 높다는 게 검찰 관계자의 전망. 롯데수사팀 관계자는 언론이 지속적으로 제기하고 있는 제2롯데월드 인허가 비리 의혹에 대해서도 “구체적인 혐의가 있다면 수사할 수 있다”며 신격호, 신동빈 부자를 압박하고 있다. 롯데수사팀이 매일 진행하고 있는 언론 티타임 내용은 실시간으로 롯데그룹 측에 전달되며 압박 카드 역할을 훌륭하게 해내고 있다.
롯데그룹 수사는 변수가 많다. 지금은 ‘비자금’이 수사 대상이지만 언제든 정·관계를 향한 로비 수사가 확대될 수 있다. 롯데그룹이 이명박 정권 시절 인수 합병 등을 통해 급격히 계열사를 늘리는 과정에서 정권 핵심 관계자들에게 ‘로비’를 벌였다는 의혹이 지속적으로 제기됐기 때문인데, 정·관계 로비를 입증하기 위해서는 공여자의 진술이 절대적이다.
로비 수사로 확대될 경우 공여자에 해당하는 이는 롯데 오너 일가가 된다. 검찰이 ‘언론전’까지 동원해 신격호 총괄회장, 신동빈 회장, 신영자 이사장의 ‘백기’를 받아내려는 것이 이 때문이라고 검찰 안팎에서는 보고 있다.
남윤하 저널리스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