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휴가 끝났다. 다시 출근을 해야 하는 아침. 졸린 눈을 비비며 일어났다. 그런데 이게 어떻게 된 일? 핸드폰이 있어야 할 자리에 책 한 권과 공책 한 권만 덩그러니 남아 있다. 이 노트가 그 노트가 아닌데…. 펼쳐보니 펜으로 필기한 부분들 중간중간 침으로 번져 있다. 몇 장 넘겨보니, 고등학교 국사라는 것 정도는 알 수 있었다. 달력을 확인해보니 2004년. 정황상 시험기간으로 떨어진 듯하다. 물론 그런 것은 문제 되지 않는다. 이게 사실이라면 게임은 끝난 셈이다. 미래를 예측할 수 있다는 것은 곧 부자가 될 수 있다는 이야기 아닌가.
그런데 잠깐, 한 가지 문제가 발생했다. 그것은 바로 기억이었다. 딱히 누가 일부러 지우진 않은 것 같은데, 굵직한 흐름들을 제외하면 세세하게 남아 있는 기억이 없다. 어제, 그러니까 2016년 어느 주말의 로또 1등 번호도, 적금이 만료된 내 통장의 계좌 번호와 비밀번호도, 직장 동료와 여자친구의 전화번호도, 하다못해 중간고사에 출제됐던 시험 문제들, 학번들까지도. 전부 다 모르겠다. 기억해두었더라면 좋았을 것들은, 단지 어딘가에 기록되어 있을 뿐이었다. 이래가지고는 과거로 돌아간다 해도 별 수 없다. 얼른 꿈에서 깨어나는 편이 더 낫겠다.
과학기술의 발전은 빠른 기록과 공유를 가능케 했다. 사람들이 모든 것을 통째로 기억할 필요가 없는 시대가 온 것이다. 옛날에는 머리에 많은 지식을 담고 있는 사람을 박식하다고 했다. 지금은 외부 보조 기억장치에서 그때그때 빠르게 찾을 수 있는 사람을 박식하다고 한다. 상황이 이렇다 보니 자연스레 인간의 기억력은 퇴화되었다. 마치 스마트폰의 개발자 옵션처럼, 사라진 것은 아니지만 굳이 쓰지 않는 기능을 활성화해 둘 이유가 없었다.
『1년 만에 기억력 천재가 된 남자』(갤리온)는 우리가 잠시 꺼두었던 기억력을 다시 극대화한 사람들의 이야기를 다루고 있다. ‘기억술사’라 불리는 이들은 무작위로 배열된 카드의 순서를 즉석에서 외워 단번에 재현하거나, 원주율을 2만여 자리까지 암송하는 등 보통 사람들과는 차원이 다른 기억력을 자랑한다.
이들은 말한다. 누구든지 훈련을 통해 자신들과 같은 능력을 가질 수 있다고. 이게 진짜 가능한 이야기일까? 기자 출신의 저자 조슈아 포어 역시 밑져야 본전 아니겠냐는 심정으로, 1년간의 기억력 훈련에 직접 나서게 된다.
기억술의 핵심은 기억의 ‘시각화 + 공간화’다. 인간의 뇌가 기억하기 어려운 것을 비교적 기억하기 쉬운 이미지로 바꾸어, 자신과 친숙한 가상의 공간에 저장하는 것이다. 이때 사용하는 이미지들은 그 무엇이 되어도 상관없다. 이미지가 우스꽝스럽거나 외설적일수록 더욱 효과적이다. 저장해둔 다음부터는 간단하다. 그저 가상의 공간을 떠올리는 것으로 기억을 떠올리면 된다.
기억력 훈련은 이와 같은 작업의 반복 숙달이다. 자신만의 공간을 얼마나 효율적으로 시스템화하느냐에 따라 성패가 결정된다. 저자의 경우 매일 하루 한 시간씩 일주일에 6일을 훈련에 투자했다. 전미 메모리 챔피언십 대회를 앞두고는 하루에 서너 시간씩을 훈련에 투자했다고 하니 입이 딱 벌어진다. 역시 능력자가 된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늘 그렇듯 노력 없이 얻을 수 있는 대가는 아무것도 없는 셈이다.
책은 단순히 기억력 훈련에 관한 이야기 외에도 흥미롭게 읽을 만한 부분들이 많다. 뇌의 부분적 파손으로 인한 기억 상실, 서번트 증후군 등에 대한 저자의 취재 기록, 현대 사회에서 기억이 차지하는 비중에 대한 사유 등을 자신의 체험과 엮어내는 이야기 솜씨가 돋보인다. ‘기억’이라는 키워드를 1년 내내 놓치지 않았던 저자의 집요함이 있었기에 이렇게 한 권의 책이 나온 게 아닌가 싶다. 뛰어난 기억력만큼이나 본받고 싶은 능력이다.
훗날 책의 내용은 기억 못하더라도 저자의 집요함은 반드시 기억해낼 수 있도록 나만의 가상공간에 저장해둬야겠다. 한눈에 잘 보이는 곳으로 말이다. 그리고 기왕이면 한 가지 더, 모든 창조는 우리의 기억에서부터 시작한다는 메시지도 같이.
블로거 녹색양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