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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썬데이] ‘권투 황제’ 알리, 나비처럼 날아 벌처럼 지다

2016.06.05(Sun) 11:04:29

“Float like a butterfly, and sting like a bee.(나비처럼 날아 벌처럼 쏜다.)”

이는 권투 역사상 가장 성공했고 인종차별에 맞서 투쟁했던 ‘무하마드 알리’가 자신의 권투 스타일을 자평한 말로 지금도 그를 상징하는 문구다. 

알리가 선수시절 ‘펀치 드렁크에서 비롯된 파킨슨 씨’ 병에 30여 년간이나 시달리다가 3일(현지시간) 합병증인 호흡기 질환으로 74세에 타계했다. 알리가 20여 년간 헤비급 복서로 활동하면서 조 프레이저, 조지 포먼, 켄 노턴, 리언 스핑크스 등과 대결한 그 시절은 세계 프로 복싱사의 황금기였다. 알리는 이들과 싸우면서 타이틀을 잃기도 했으나 세 차례나 세계 헤비급 타이틀을 거머쥐면서 그간 플로이드 패터슨이 가지고 있던 두 차례 헤비급 타이틀 획득 기록을 갈아치웠다. 축구 황제가 펠레라면, 권투 황제로 꼽히는 인물은 알리다. 

   
▲ 무하마드 알리의 젊은 시절. 출처=muhammadali.com

1942년 미국 켄터키주 루이빌에서 태어난 알리의 본명은 캐시어스 마셀러스 클레이 2세(Cassius Marcellus Clay, Jr.)다. 알리는 클레이라는 이름으로 1960년 로마 올림픽 라이트 헤비급에서 금메달을 땄으나 흑인을 멸시하는 현실을 개탄하며 금메달을 호수에 던져버린 뒤 프로로 전향했다. 그렇게 분실한 금메달은 그가 1996년 미국 애틀랜타 올림픽에서 파킨슨 씨 병으로 불편한 거동을 이끌고 성화 주자로 나오면서 새로 제작한 금메달을 다시 받는 드라마틱한 상황도 연출됐다. 

알리의 프로 통산 전적은 56승(37KO) 5패다. 알리는 ‘떠벌이’로도 유명했는데 경기 전 인터뷰 등에서 상대 선수를 교묘하게 도발하면서 몇 회에 어떠한 방식으로 이긴다고 예언했다. 경기에 대한 두려움을 없애고 자기 암시를 주기 위한 일종의 허세였지만 신기하게도 그대로 적중한 적이 많아 사람들을 놀라게 했다. 알리는 클레이 시절 1962년 세계 라이트헤비급 챔피언 아치 무어와 대결에서 대기실 칠판에 “무어를 4회에 KO시킨다”고 쓴 뒤 링 위에 올라갔고 그대로 4회 KO승을 거뒀다. 바로 ‘떠벌이 전설’의 시작이었다. 클레이는 1964년 세계 헤비급 타이틀전에서 소니 리스턴을 7회 TKO로 물리치고 챔피언이 됐다. 리스턴과 경기 후 그는 선조들이 노예 시절 받은 클레이라는 성과 캐시어스는 이름을 버리고 그해 ‘네이션 오브 이슬람’에 가입한 것을 계기로 무하마드 알리란 이름으로 개명했다. 1975년 그는 이슬람교로 정식 개종했다.

이후 9차 타이틀 방어에 성공한 알리는 1967년 베트남전 징병 거부를 이유로 헤비급 타이틀과 함께 프로복서 라이선스를 박탈당하는 시련을 겪어야 했다. 법정 싸움까지 가는 3년 5개월간 그는 경기를 치르지 못했다. 긴 공백기는 그의 복싱 스타일을 바꾸었다. 초기에 알리는 경량급보다 더 빠른 스피드의 아웃복싱 스타일로 상대의 주먹을 반사신경만으로 피하는 ‘노 가드’ 전술을 썼지만, 예전만큼 스피드를 회복하지 못한 것을 자각하자 링 로프의 신축력으로 상대 펀치의 충격을 흡수하는 전술을 터득했다. 복싱사적 관점에서 알리의 위치가 높은 이유는 나이가 들면서 인파이팅과 아웃복싱 스타일을 자유자재로 구사하는 등 상대에 따라 자신에게 맞는 스타일을 연구하고 개척해 나간 진화형 ‘만능 복서’였기 때문이다.

알리는 복귀 후 1971년 조 프레이저에 도전했으나 패했고 1973년 켄 노턴에게도 패하면서 한물간 듯보였다. 하지만 1974년 자이르 킨샤사에서 WBC, WBA 헤비급 타이틀 대결에서 권투 역사상 최강의 펀치력으로 꼽히는 조지 포먼을 8회 KO로 물리치고 챔피언에 다시 올랐고 이후 10차 방어에 성공했다. 알리는 1978년 2월 15일 리언 스핑크스에 판정패하며 타이틀을 상실했으나 그해 9월 스핑크스에게 판정승하며 세 번째 타이틀 획득에 성공했다. 1979년 은퇴를 선언했다가 1980년 과거 스파링 상대였던 래리 홈즈가 갖고 있던 WBC 헤비급 타이틀에 도전했지만 10회 TKO 패를 당했고 1981년 트레버 버빅에게도 패하면서 그는 권투생활에 종지부를 찍었다. 

알리는 권투 이외에도 1960년대 말부터 불기 시작한 흑인 인권운동에 동참해 미국 흑인들의 권익 향상에 많은 노력을 기울였다. 그의 이런 성향과 이슬람교 개종에 영향을 준 사람은 급진적 흑인 인권운동가인 ‘말콤 엑스’였다. 1974년 조지 포먼과의 경기를 아프리카에서 가진 것도 그런 이유다. 

   
▲ 무하마드 알리가 조지 포먼과 1974년 시합에서 8회 KO승을 거두고 있다(왼쪽). 1975년 시합에서 조 프레이어저에게 훅을 작렬시키는 알리. 이 경기에서 알리는 14회 TKO로 이겼다.

알리는 대중문화에도 지대한 영향을 끼쳤다. 알리의 활약상이 두드러진 시절에는 유독 명작 권투 영화들이 쏟아졌다. 무명의 실베스터 스탤론을 스타덤에 올려놓온 <록키(Rocky, 1976)>는 무하마드 알리를 상대로 15라운드를 버티고 다운까지 빼앗은 백인 권투선수 척 웨프너의 시합에서 영감을 받아 만들어진 작품이다. 여기에 1950년대 무패의 백인 헤비급 챔피언 록키 마르시아노의 이름에서 제목을 따온 것. 록키는 1977년 아카데미 시상식에서 작품상 등 3개 부분을 수상했다. 대표적 연기파 배우 로버트 드 니로에게 아카데미 남우주연상을 안긴 <성난 황소(Raging Bull, 1980)>도 권투를 다룬 영화 중에서 손꼽히는 명작이다. 또한 홀 앤 오츠와 함께 20세기 미국 최고의 남성 듀오였던 사이먼 앤 가펑클의 히트곡 <더 박서(The Boxer, 1969)>는 바로 알리에 대한 노래다. 

알리의 선수 시절 라이벌이었던 조 프레이저는 2011년 암으로, 그의 턱뼈를 부순 켄 노턴도 2013년 심근경색으로 타계했고 알리마저 세상을 떠나며 모두 추억의 이름으로 남게 됐다. 조지 포먼만이 은퇴 후 복귀해 45세에 세계 타이틀을 다시 획득해 권투 역사에 한 획을 그었고 현재도 선교와 함께 사업가로 왕성한 활동을 하고 있다. 

우리나라에서 권투의 인기는 예전같지 않다. 힘들고 위험한 운동이라는 인식 때문이다. 하지만 1980년대까지만 해도 이른바 ‘라면 먹고 싸운다’는 ‘헝그리 복서’들이 대거 등장해 많은 세계 챔피언을 배출했고 아마추어 복싱은 올림픽과 아시안 게임에서 메달 박스 역할을 했었다. 알리는 그 시절과 권투를 얘기할 때 빼놓을 수 없는 아이콘이다.

장익창 기자

sanbada@bizhankook.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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