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타 유럽의 도시처럼 스위스 취리히는 자전거의 도시다. 자전거는 취리히 시민들 사이에서 가장 대중적이면서도 가장 사랑받는 교통수단이다. 하지만 비가 자주 내리는 취리히에서 자전거를 타기란 사실 녹록지 않은 일이다. 짐이라도 싣고 자전거를 탈 경우에는 더욱 그렇다.
취리히에서 태어나고 자란 마커스와 다니엘 프라이탁 형제 역시 같은 고민을 하고 있었다. 지난 1993년 취리히 예술학교에서 각각 장식 디자이너와 그래픽 디자이너를 전공하고 있었던 형제는 매일 어깨에 크로스 가방을 메고 자전거를 이용해 등하교를 하고 있었다. 하지만 비가 오는 날이 문제였다. 온몸이 젖는 건 문제가 아니었다. 문제는 가방 속의 미술도구와 스케치북이 흠뻑 젖어버린다는 데 있었다.
프라이탁의 설립자인 다니엘(왼쪽)과 마커스 프라이탁 형제. 출처=프라이탁 홈페이지 |
이에 형제는 튼튼하고 기능적이면서도 방수가 되는 가방이 절실히 필요했다. 그러던 어느 날 문득 아파트 부엌 창문 밖의 고속도로를 바라보던 중 번뜩이는 아이디어가 하나 떠올랐다. 요란한 소리를 내면서 달리는 화물트럭을 보는 순간 ‘바로 저거다!’라는 생각이 머리를 스치고 지나갔던 것.
형제가 주목했던 것은 바로 화물트럭을 덮고 있는 형형색색의 방수포였다. ‘방수포를 잘라서 가방을 만들면 미술도구가 젖지 않겠다’고 생각했던 형제는 곧 이 생각을 실천에 옮겼다. 운송회사에서 다 쓰고 버린 방수포를 얻어온 형제는 아파트 거실 바닥에 방수포를 펼치고 직접 재단을 했다. 하지만 생각처럼 쉽지는 않았다. 방수포가 워낙 두껍다 보니 가위도 말을 듣지 않았고 망가진 재봉틀만 두 대였다.
며칠 동안의 우여곡절 끝에 첫 번째 프라이탁 가방이 탄생했다. 이 최초의 모델에 대해 형제는 “자전거 배달원의 메신저백에서 영감을 얻어 제작했다”고 말했다. 현재 이 모델은 ‘취리히 디자인 박물관’에 전시되어 있으며, 반드시 흰장갑을 낀 채 다뤄야 하는 귀중품으로 대접받고 있다.
이렇게 탄생한 업사이클링 가방 제조업체인 ‘프라이탁’ 역사에서 되풀이해서 등장하고 있는 핵심 요소는 바로 이 자전거였다. ‘프라이탁’의 시작은 자전거였으며, 현재 ‘프라이탁’을 이끄는 끊임없는 원동력 역시 자전거다. 프라이탁 형제는 여전히 접는 자전거인 ‘벨로’를 타고 출퇴근하고 있으며, ‘프라이탁’ 공장의 1층에는 직원들을 위한 실내 자전거 거치대 공간이 따로 마련되어 있다. 비를 맞아도 안장이 젖지 않도록, 그리고 추운 겨울에도 늘 따뜻하게 자전거를 탈 수 있도록 한 배려다. 이처럼 자전거는 ‘프라이탁’의 중요한 상징적 가치를 지니고 있기 때문에 ‘프라이탁’ 제품은 늘 ‘자전거친화적’일 수밖에 없다.
‘프라이탁’을 이야기하면서 또 한 가지 빠질 수 없는 것은 바로 업사이클링 또는 리자인(리사이클링+디자인)이다. 이는 단순한 재활용과는 조금 다르다. 버려진 물건을 재활용하는 개념에서 한 단계 더 나아가 새로운 생명을 불어넣는 동시에 디자인까지 고려하는 것이다. 이렇게 해서 환경보호에 참여하는 것 또한 물론이다.
프라이탁 열풍을 이끄는 또 한 가지 요소는 세상에 단 하나뿐인 나만의 가방이라는 한정판 개념에 있다. 그 이유는 프라이탁 가방의 제작 과정을 보면 알 수 있다. 프라이탁 가방의 주된 재료는 화물트럭의 방수포(타폴린), 폐자동차의 안전벨트, 그리고 폐자전거의 고무 튜브다. 이때 방수포는 5년 이상 된 것만 사용한다.
가방 제작과정. 모은 방수포를 잘라(1) 세척한 뒤(2) 디자인에 따라 제작해(3) 가방으로 탄생한다(4). |
방수포는 가방 원단으로, 안전벨트는 어깨끈으로, 고무 튜브는 가방 테두리로 사용되며, 방수포를 재단하고 세척하고 건조시킨 후 디자인 및 봉제하는 과정은 모두 수공업으로 이뤄진다. 이때 각각의 가방이 어떤 모양이 될지를 가늠해서 방수포를 재단하기 때문에 결과적으로는 모두 다른 디자인이 탄생한다. 다시 말해 방수포의 어떤 부분을 잘라서 만드냐에 따라 저마다 독특한 디자인이 탄생하는 것이다. 가장 인기있는 색상은 검정색과 분홍색이다. 이유는 단순하다. 그만큼 희귀하기 때문이다.
1999년 스위스의 국제관광도시인 다보스에 첫 번째 매장을 연 이래 ‘프라이탁’은 점차 전세계에 이름을 알리기 시작했다. 하지만 ‘프라이탁’을 단숨에 유명하게 만들었던 사건은 사실 따로 있었다. 바로 스위스 슈퍼마켓 체인인 ‘미그로스’의 못말리는 짝퉁 마케팅 덕분이었다. 히트 상품과 엇비슷한 제품을 만들어 팔기로 유명했던 ‘미그로스’는 지난 1998년 프라이탁 가방의 짝퉁격인 돈너스탁 가방을 내놓았다(프라이탁은 독일어로 금요일, 돈너스탁은 목요일이다). 가격은 프라이탁 가방의 4분의 1 수준이었던 약 50프랑(약 5만 원)이었다.
놀라운 일은 그 다음에 벌어졌다. 미그로스의 짝퉁 제품에 대해 스위스 방송국들이 주요 뉴스로 보도하기 시작했던 것이다. 돈너스탁 가방을 둘러싼 논란이 거세지자 결국 ‘미그로스’는 전량을 회수해야 했고, 이 사건으로 프라이탁 형제는 순식간에 스위스 전국구 유명인사가 됐다.
이런 까닭일까. 2012년 ‘스위스 어워드’의 비즈니스 분야를 수상했던 마커스 프라이탁은 마침 공교롭게도 시상을 맡았던 ‘미그로스’의 헤르베르트 볼리거 CEO를 의식해 다음과 같은 재치있는 수상 소감을 남겼다. “사실 그때 돈너스탁 가방 하나를 미그로스에서 훔쳤더랬어요. 내 평생 유일하게 한 도둑질이었죠.”
‘프라이탁’의 인기는 전세계적으로 불어닥친 업사이클링 열풍과 맞물려 해가 갈수록 높아졌다. 현재 ‘프라이탁’은 매년 35만여 개의 가방을 제작하고 있으며, 가방 제작에 사용되는 방수포는 30톤, 안전벨트는 15만 개, 자전거 튜브는 1만 8000개에 달하고 있다.
전세계에 460여 개의 매장을 두고 있으며, 현재 우리나라를 비롯해 일본, 대만, 중국 등 아시아에도 진출해 있다. 가방 가격은 20만∼40만 원대로 고가에 속한다. 그 이유에 대해 프라이탁 형제는 모든 과정이 수작업으로 이뤄지기 때문이라고 설명한다.
현재 프라이탁 가방은 두 가지 라인으로 제작되고 있으며, 메신저백 외에도 스마트폰 케이스, 시장 가방, 노트북 가방 등 다양한 모델을 선보이고 있다. 2014년부터는 의류 산업에도 뛰어들었다. 여기에도 ‘프라이탁’의 기본 개념인 친환경이 접목됐다. 5년의 연구 끝에 자체 개발한 원단인 F-ABRIC은 식물의 줄기에서 채취하는 천연섬유이기 때문에 100% 생분해되며, 폐기할 경우 퇴비로 사용할 수 있다. 심지어 집안 쓰레기통에 버릴 경우 3개월 안에 완전히 분해되어 자연소멸된다.
형형색색 다양한 가방들. 세상에 하나밖에 없는 제품이다. 출처=프라이탁 홈페이지 |
‘프라이탁’은 이제 단순한 가방 제조업체를 뛰어넘어 사회적 교류의 매개 역할도 하고 있다. 그 대표적인 예가 취리히 북부 하르트브뤼케 인근에 위치한 플래그십 스토어다. 버려진 컨테이너 박스 19개로 이뤄진 높이 25m의 이 독특한 건축물은 현재 취리히의 명소이자 사진 촬영 포인트가 됐다.
더욱이 이 건축물은 ‘프라이탁’ 제품의 전시 및 판매장일 뿐만 아니라, 문화 교류의 장으로도 활용되고 있다. 다양한 업체들이 주기적으로 이곳에서 행사를 열면서 사회적 교류를 하고 있는 것이다. 이에 대해 프라이탁 형제는 “우리는 이제 합성섬유 가방을 만드는 회사 그 이상이다”라고 말한다. 그리고 이런 자부심은 결코 과장된 것은 아닌 듯하다.
김민주 외신프리랜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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