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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덕일기5] 강민, 날개를 펴다

2016.07.22(Fri) 10:38:31

스타크래프트는 테란의 역사다. 임요환, 이윤열, 최연성, 이영호까지 시대를 휩쓸고 시대를 정립한 선수는 모두 테란이다. 심지어 삼성전자 소속의 한 게이머는 “테란해라”라는 명언을 남길 정도니.

   
 

하지만 동방의 신이 일어난다는 의미의 동방신기처럼, ‘Nal_rA’라는 아이디를 가지고 그야말로 ‘날아’다닌 선수가 있다. 프로토스가 나아갈 방향을 제시하고, 몸소 그 길을 걸어간 유일한 구세주. 바로 ‘광렐루야’이자 ‘광통령’이자 ‘몽상가’인 강민이다.

   
 

강민은 한 단어로 정의내릴 수 없다. 2002년 데뷔해, 2003년에 전성기를 맞이한 선수였다. 그의 전성기는 화려했다. ‘테란의 황제’이자 ‘토막’인 임요환을 4강에서 꺾었다. 토스전을 못하는 임요환이지만, 강민만 만나면 김성근(SK) 앞의 김경문(두산)처럼 맥없이 무너졌다. 임요환을 꺾은 건 그렇다고 치자. 사실 성공한 프로토스 중에 임요환 못 잡은 게이머가 없다. 그런데, 이 강민이 이윤열마저 잡았다. 2002년에 전성기를 맞이한 이윤열을 결승전에서 0:3으로 셧아웃시켰다. 생방송 도중에 콧물을 풀기 위해 게임을 멈춘 게이머가 황제와 천재를 꺾고 왕좌에 등극하는 순간이다.

   
 

강민은 프로토스의 선두주자였다. 아니, 새로운 방향을 정립한 선수였다. 안철수 의원의 새정치만큼 모호한 듯 들렸지만, 강민은 본인이 직접 게임으로 보여줬다. 보여주고 증명하는 선수. 힙합이다.

   
 

프로토스의 정석은 기존 임성춘-박정석으로 대표되는 단단한 물량, 즉 한방토스였다. 하지만 강민은 우직한 프로토스를 유연하고 전략적인 모습으로 ‘재구성’했다. 강민의 플레이스타일은 아비터 리콜, 캐리어리버, 더블넥서스 등 소위 ‘사파’로 대표된다. 꾹 참고 한 방, 병력으로 쌈싸먹기 등으로 상징되던 소위 ‘정파’ 프로토스들과 매우 대비된다. 택뱅리쌍 시대 이후 정파와 사파의 분류는 의미가 없는 것으로 정리됐지만, 저때(2006년 즈음)까지만 해도 나름 유의미했다. 정파의 박정석, 사파의 강민, 적당한 5:5의 박용욱. 3대 토스 시절이다.

   
 

사실 단순 ‘사파’로 분류되기에 강민의 족적은 너무나 크다. 강민은 더블넥서스-커세어리버-캐리어리버 등으로 기억되는 ‘수비형 토스’의 선구자였다. 강민 이전 프로토스 선수들의 저그전은 꾸역꾸역 버텨서 한 방에 치고 나가거나 하드코어 질럿으로 저그를 찢어발기는 원시인 같은 야생스러움이 묻어났다. 김병만, 베어그릴스스러움이 프로토스의 자랑이던 시절이다.

하지만 강민은 원게이트빌드를 유연하게 쓰고, 더블넥서스 이후 버티고 막멀티 이후 커세어 리버 등 신개념 빌드를 만들었다. 심지어 이 더블넥서스 빌드가 추후에 김택용의 기반이 된 것을 감안하면 현대 프저전의 아버지라고 불려도 손색이 없다. 사실 강민이 더블넥서스를 개발하진 않았지만, 더블넥서스가 스타크래프트 초창기에 흥했다가 사장된 빌드임을 감안하면, 강민은 더블넥서스를 ‘재’개발한 셈이다. 스마트폰은 노키아가 처음 만들었지만, 애플이 스마트폰으로 가장 많은 꿀을 빤 것과 같은 이치다.

   
 

MSL을 점령하고, 강민은 온게임넷으로 눈을 돌린다. 올림푸스 스타리그 이후 마이큐브 스타리그는 강민의 첫 스타리그 입성이었다. 임요환을 4강에서 꺾고, 이윤열을 결승에서 꺾은 프로토스의 희망. 김동수와 박정석이 이루지 못한 최초의 프로토스로서의 양대 스타리그 우승을 달성할지가 관심이었다.

하지만 몽상가의 꿈은 악몽으로 끝났다. 가을을 맞이한 제철의 메뚜기가 그의 꿈을 깨버렸다.

구현모 필리즘 기획자

비즈한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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