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빅아’ 리버풀이 결승에 진출했다. 비록 UEFA 챔피언스리그가 아닌 유로파리그지만 유럽대항전 결승이었다.
▲ 안양에 위치한 리버풀펍. |
우승컵은 어느 팀이나 들고 싶고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 하지만 이번 결승전에서는 리버풀이 더 절박함을 보였다. 세비야는 이미 2013-14시즌과 2014-15시즌 유로파리그 2연패를 한 바 있다. 한국의 네티즌들 사이에서는 ‘유로파 깡패’ 세비야가 유로파리그 우승을 위해 챔스 32강 조별예선을 광탈해 유로파로 내려왔다는 우스갯소리가 나올 정도였다.
반면 리버풀의 유럽대항전 우승 도전은 지난 2006-07시즌 챔스 결승 이후 9년 만이다. 당시 리버풀은 AC밀란을 만나 2 대 1로 패하며 우승을 놓쳤다.
리버풀은 자국 리그 내에서도 최근 몇 년간 우승과 거리가 멀었다. 앞서 위르겐 클롭 감독 부임 이후 지난 2월 캐피털원컵 결승에 올랐지만 맨체스터 시티에 승부차기로 패하며 아쉽게 준우승에 만족해야 했다. 리버풀이 마지막으로 우승컵을 들어 올린 것은 지난 2011-12시즌 칼링컵(현 캐피털원컵)이다.
이에 잉글랜드 현지 팬들뿐만 아니라 전 세계 리버풀 팬들은 이번 유로파리그 결승전을 앞두고 들뜬 기대감을 선보였다. 국내 리버풀 팬들도 서울 홍대와 안양 등의 스포츠펍에서 단체관람 계획을 세웠다.
이쯤 되면 기자도 안양의 리버풀펍을 직접 찾아 그곳의 열기를 느껴보기로 했다.
SBS 스포츠 중계화면 캡처. |
안양 안양1동에 위치한 리버풀펍은 리버풀과 안양FC를 응원하는 스포츠펍으로 축구팬들 사이에서 유명한 곳이다. 리버풀펍에서는 경기 전날부터 SNS 등을 통해 “결승전을 앞두고 엄청난 문의전화가 오고 있다. 일찍 오셔야 명당자리 잡을 수 있다. 늦으면 서서 보셔야 한다”고 알렸다.리버풀과 세비야의 2015-16 유로파리그 결승전은 지난 19일 새벽 3시 45분(한국시각) 스위스 바젤에 위치한 세인트 야콥 파크에서 열렸다.
▲ 리버풀펍 페이스북 |
이에 기자 역시 경기 시작 3시간 전인 밤 12시쯤 리버풀펍을 찾았다. 하지만 술집 내부는 이미 경기를 기다리는 팬들로 북적였다. 대형 TV가 잘 보이는 20여 석 규모의 바는 꽉 차 있었고, 일반 테이블도 자리가 없어 간이의자에 앉아야 했다.
술집 내 맥주를 마시는 팬들은 대부분 리버풀 유니폼까지 챙겨 입고 나왔다. 유니폼의 등번호와 이름 마킹은 아직까지도 지금은 팀을 떠난 리버풀의 심장 스티븐 ‘디 풋볼’ 제라드(Steven ‘The Football’ Gerrard)가 제일 많았다. 유니폼을 입고 있는 3명 중 2명은 8번 제라드였다. 다르게 보면 제라드 이후 리버풀에 팬들의 사랑을 사로잡을 스타플레이어가 나오지 않았다는 반증이기도 했다.
▲ 스티븐 제라드가 마킹된 리버풀 유니폼을 입고 나란히 앉아 경기를 관람하는 팬. |
오랜 기다림 끝에 경기가 시작했다. 간이의자도 부족해 상당수의 팬들이 서서 경기를 관람해야 할 지경이었다. 리버풀펍의 사장 정재용 씨는 “결승전 관람을 위해 오늘 300명 정도가 찾은 것 같다”고 말했다.
리버풀 선수들 플레이 하나하나에 300여 팬들의 환호와 탄식, 박수가 끊임없이 터져 나왔다. 특히 전반 35분 다니엘 스터리지의 감각적인 왼발 아웃프런트 킥이 세비야의 골망을 흔들자 팬들의 환호로 펍이 떠나갈 정도였다. 요나스 에릭손 주심이 세비야 선수들의 페널티박스 안에서의 세 차례 핸드볼 반칙을 모두 불지 않자 거센 항의의 목소리가 나오긴 했지만, 리버풀이 1 대 0으로 앞선 채 전반을 마쳐 하프타임에는 펍 내 분위기가 나쁘지 않았다.
▲ 리버풀과 세비야의 유로파리그 결승전을 보기 위해 수백 명의 팬들이 리버풀펍을 찾았다. 늦게 와 자리가 없는 팬들은 서서 경기를 관람해야 했다. |
그렇게 후반전이 시작했다. 그런데 ‘후반전 시작했네’라고 생각하고 TV로 눈을 고정시키기도 전에 세비야가 동점골을 성공시키며 경기를 원점으로 되돌렸다. 리버풀펍 내부는 차가운 정적이 흘렀다.
리버풀은 전반과 같은 팀인지 의심이 들 정도로 무기력한 모습을 보였다. 결국 리버풀은 후반 15분과 19분 세비야에 연속으로 골을 허용하며 순식간에 점수차는 3 대 1까지 벌어졌다. 분위기가 완벽하게 세비야 쪽으로 넘어간 것이다.
경기가 생각처럼 풀리지 않자 늦은 새벽 취기가 제법 오른 팬들 사이에서 알베르토 모레노 등 경기력이 떨어지는 선수들에 대한 욕이 나오기 시작했다.
세비야의 세 번째 골에 대해 오프사이드 논란이 일자, 팬들은 앞서 핸드볼 파울에 대해 페널티킥을 선언하지 않은 것까지 떠올리며 스웨덴에 살고 있을 에릭손 주심의 부모의 안부까지 묻기 시작했다. (결론적으로 세 번째 골은 오프사이드가 아니었다.)
▲ 롤 채팅 화면. (출처=온라인 커뮤니티 사이트) |
리버풀 클롭 감독이 수비수를 빼고 오리기, 벤테케 등 공격수들을 투입하며 골사냥에 나섰지만 패색은 짙어져만 갔다. 후반 35분이 넘어가자 한숨과 함께 술값을 계산하고 펍을 나서는 사람들이 생기기 시작했다.
결국 경기는 3 대 1 세비야의 우승으로 끝이 났다. 경기 종료 휘슬과 동시에 리버풀펍 안에 수백 명의 손님들은 말도 없이 순식간에 빠져나갔다. 리버풀펍에서 경기를 관전한 한 팬은 “전반 세 번의 핸드볼 파울 중 한 번이라도 인정됐어야 했다”고 판정에 화를 내며 “이번에는 우승하나 해서 수원에서 안양까지 찾아왔는데, 너무 아쉽다”고 밝혔다.
▲ 세비야가 리버풀을 꺾고 2015-16시즌 유로파리그 우승을 차지했다. (출처=유럽축구연맹 공식 페이스북) |
리버풀펍을 나서니 아침 5시 45분이었다. 어느덧 해가 떠 날이 밝았다. 번화가 안양1번가는 전날 저녁의 네온사인의 화려함과 취객들의 시끌벅적함을 보내고 길거리에는 버려진 전단지와 쓰레기, 적막함만이 남아 있었다. 리버풀 팬들만이 삼삼오오 모여 다시금 아쉬움을 되새기고 있었다.
그때서야 기자 역시 ‘지구 반대편 공놀이 따위를 보겠다고 밤을 새고, 돈까지 써가면서 술을 마셨나’ 하는 후회가 밀려들기 시작했다. 출근도 새삼 걱정됐다.
하지만 인간은 같은 실수를 반복한다. 3개월 뒤 2016-17시즌이 개막하면 오늘의 감정은 모두 잊고 다시금 맥주를 마시며 유럽축구를 보며 환호하고 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