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메뉴바로가기 본문바로가기
전체메뉴
HOME > Target@Biz > 비즈

구조조정에 한국은행 끌어들인 정부의 속내

대량해고, 정치적 부담… ‘완충재’ 기대

2016.05.12(Thu) 16:14:48

   
▲ 임종룡 금융위원장(왼쪽)과 이주열 한국은행 총재.

“뻔한 얘긴데 뭐하러 물어봅니까. 구조조정은 타이밍과 속도의 싸움이에요. 다른 나라 중앙은행들은 더 한 일도 하는데.” 금융위원회에서 최고위직을 지낸 한 인사는 기자의 질문에 다소 짜증 섞인 목소리로 답했다. “한은이 들어와야 정부에 부담이 적고 구조조정을 신속히 처리하죠. 지금은 금융위에 너무 많은 부담이 쏠려 있어요.” 정부가 조선·해운업 구조조정 문제에 한은을 끌어들이려는 이유가 뭐냐고 묻자 돌아온 대답이다.

이 관계자의 말마따나 4·13 총선을 얼마 남겨두지 않았을 때부터 정부·여당을 중심으로 한은의 양적완화론이 불거졌다. 초반에는 한은이 발권력을 동원해 인플레이션 기대심리를 자극, 내수를 살리고 고환율 정책을 도입하자는 주장이었다. 새누리당 선거대책위원장을 맡았던 강봉균 단장이 논쟁을 촉발했고 유일호 경제부총리가 맞장구를 쳤다. 그러나 한은은 정치권과 정부가 쥐고 흔들 수 있는 조직이 아니다. 통화정책을 수행하는 특수법인으로 법으로 독립성이 보장돼 있다. 때문에 시장 관계자들은 정치권의 주장을 선거용으로 치부하고 말았다.

그러나 총선이 끝난 뒤에도 이 논란은 꺼지지 않았다. 내수 부양 얘기는 쏙 들어가고, 산업 구조조정 얘기가 흘러나왔다. 구조조정 비용에 한은이 지원 사격을 해야 한다는 주장이다. 이번에 선봉장은 임종룡 금융위원장이 맡았다. 유일호 부총리 역시 거들었다. “기업 구조조정을 위해 국책은행 자본확충이 필요하다”며 박근혜 대통령까지 힘을 보탰다. 결국 한은은 두 손을 들었다. 한국판 양적완화에 손사래를 치던 이주열 한은 총재는 정부의 정책에 보조를 맞추겠다고 입장을 선회했다. 현재 KDB산업은행·수출입은행 등 국책은행에 지원하는 돈이 ‘대출’이나 ‘출자’냐 선택만 남은 상황이다.

정부는 어떤 형태로든 한은이 정부 일을 거들어 줄 것을 희망한 것으로 보인다. 총선을 전후해 주장을 바꾼 것을 보면 알 수 있다. 정부 입장에선 가뜩이나 재정도 빠듯한데, 총선 결과까지 여소야대로 나오자 당혹스러웠을 것이다. 추경편성이나 공적자금 지원 등 정부가 재정 지출을 확대하려면 공청회, 상임위원회 심사 등 입법부의 지난한 처리절차를 거쳐야 한다. 정부로선 그동안 각을 세우며 싸운 야당에 이 문제의 협조를 구하기 껄끄러운 상황이다. 실제 총선에서 승리한 더불어민주당의 김종인 비상대책위원장은 구조조정 문제와 관련해 정부의 무능과 책임론에 내세우며 최근 들어 날 선 비판을 하고 있다. 정부로선 자연스레 발권력을 가진 한은을 끌어들일 유혹에 빠질 수밖에 없다. 정부와 협의가 필요하긴 하지만, 한은은 비교적 자유롭게 돈을 찍어낼 수 있는 조직이다.

정부가 한은을 압박하면서 내세운 명분은 ‘빠른 구조조정’이다. 당장 한국 경제의 내일을 기대할 수 없을 만큼 구조조정이 시급하니 국회의 처리절차를 일일이 거치기 어렵다는 것이다. 2∼3년 전부터 제기돼 온 조선·해운 회사의 부실 문제를, 시급성을 내세워 이제야 처리하겠다고 하는 것은 다소 궁색해 보인다. 그럼에도 구조조정은 워낙 민감한 문제라, 이런 주장에 여론이 동조하는 분위기다. 정부는 한국 경제의 안정과 제2의 도약을 위해 구조조정을 속도감 있게 진행해야 한다고 한다. 일할 수 있게 도와달란 얘기다. 일단 주도권은 정부가 쥐었다.

정부가 한은을 이처럼 애타게 찾는 것은 외환위기 이후 처음이다. 경제 성장을 이끄는 정부와 안정을 추구하는 한은 사이에는 항상 미묘한 긴장감이 흐른다. 이런 긴장감은 경제의 큰 틀에서 보면 건강한 현상이다. 그럼에도 정부가 이런 관계에 파장을 일으키며 움직이는 이유는 뭘까?

구조조정은 기업의 경영상 판단 실패에 따른 부실 전이 가능성을 제거하고, 금융기관의 부실채권을 정리하는 일이 핵심이다. 대량해고 문제와 정치적 부담, 여러 관계자들의 이해관계 상충을 조정해야 한다는 점에서 부담도 크다. 일종의 뒤치다꺼리로, 잘해야 중간인 일이다. 정부 입장에선 공적자금 회수에 실패하거나, 자칫 금융권 부실을 막지 못한다면 거대한 책임론에 부딪히게 된다. 이런 부담을 덜기 위해 한은에게 국책은행 ‘출자’를 요구한 것이다.

정부의 이런 손짓에 한은은 ‘대출’ 카드로 맞서고 있다. 출자는 지분을 직접 매입함으로써 구조조정 실패 시 그 책임을 함께 떠안게 되는 데 비해, 대출은 채권자로서 떼인 돈을 받을 권리를 인정받는다. 주도권을 금융위가 쥐고 있어, 한은으로선 정부 측 입장을 쉽게 받아들이기 어려운 입장이다. 발권력을 동원할 경우 자칫 외국인 투자자금 유출로 외환·금융시장 불안이 생길 수 있다. 그러나 이는 어디까지나 한은이 치워야 할 문제다. 정부로선 한은이 훌륭한 완충재인 셈이다.

김서광 저널리스트

비즈한국

bizhk@bizhankook.com

<저작권자 ⓒ 비즈한국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