혐오의 해라고 기록될 2015년을 지나 2016년이 되었지만 혐오의 범람은 현재진행형이다. 인터넷상에서 모두가 ‘-충’이라는 이름의 벌레가 됨으로써 역설적으로 평등이 이뤄지면서 세대, 계층, 지역을 불문한 전쟁이 인터넷은 물론 대학가까지 번지고 있다.
하지만 근래 전쟁이 벌어지는 핫플레이스는 이념과 지역, 계층이라는 한국사회의 고전적 주제가 아닌 남녀갈등이다. 넘치는 에너지와 스마트폰 타자속도로 언제든 싸울 준비가 되어 있는 대학생들에게 남녀갈등은 신천지, 신세계다. 대자보에선 젠더와 페미니즘을 논하며 점잖게, 학내 커뮤니티에선 어느 과 아무개를 ‘저격’하는 글들이 난무하고, 익명게시판에선 ‘한남충’과 ‘김치녀’들의 이전투구가 벌어진다.
기성사회에선 수면 밑으로 조용히 흐르던 남녀갈등 문제가 왜 대학사회와 이들이 주로 활동하는 인터넷에서 이렇게 첨예하고 뜨거운 것일까.
최근에는 ‘메갈리아’라는 페미니즘 여성 중심의 인터넷 커뮤니티가 갈등의 중심에 있다. 과거의 ‘김치녀’ 논란처럼 일방적으로 여성들을 비판하며 촉발된 논쟁과는 다른 양상이다. 지금의 갈등은 비등비등한 진영이 경합을 겨루는 말 그대로 ‘전쟁’이다.
데이트 폭력, 성희롱, 성폭행 문제부터 ‘-녀’라는 단어를 둘러싼 논란처럼 언어 사용의 성차별까지 수많은 원인이 거론되지만, 내가 지켜본 대학 내 여성들의 가장 큰 불안과 불만의 원인은 다른 곳에 있다. 취업시장에서 여성들이 절대적으로 불리한 현실이 그들을 불안하게 하고 분노하게 만든다는 것이다.
내가 군대를 가기 전 1학년 때까지 여자 동기들은 언제나 앞서갔다. 수석과 차석은 으레 여자 동기들이었고, 남자 동기들이 숙취에 찌들어 결석할 때 여자 동기들은 꼼꼼히 스케줄표를 따라 과제를 하고 출석을 하며 학점을 쌓아갔다. 가장 가까웠던 여자 동기 A는 성실성과 특유의 정보력을 바탕으로 자신의 꿈을 위해 공부했고 그 어렵다는 CPA 1차 시험까지 통과했다. 내가 전역하기 전까지 A는 동기 모두에게 모범이자 선망의 대상이었다.
전역을 하고 여자 동기들이 졸업반이 됐을 때, A와 이런저런 얘기를 하며 취업은 거뜬해 보이는 그 친구에게 부럽다고 했다. A는 잠시 뜸을 들이더니 말했다. “그런데 난 네가 가진 스펙이 없잖아. 남자라는 거.” 당시 전역한 지 얼마 안 된 나는 그 말이 단지 나를 배려하는 의미인 줄만 알았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고 동기와 선배들을 만나며 그 말이 빈말이 아니었음을 깨달았다. A가 부럽다는 나의 말에 “그래 봐야 취업 힘들지. 여자는”이라는 대답이 취직한 선배에게서 돌아왔다. 동기들은 “A는 뭘 그렇게 열심히 해? 너무 독한 거 같애. 몇 년이나 일한다고…”라고 얘기하곤 했다. 이때 깨달았다. 나에게 ‘남자라는 스펙’을 얘기하던 중 뜸을 들였던 그 시간 A가 어떤 생각을 했는지. 내가 2년간 군생활을 하며 시간을 보낼 때 사회를 더 일찍 겪은 그 친구가 본 현실이 무엇인지.
여성 대학 진학률이 74.6%로 67.6%의 남성을 훌쩍 뛰어넘는 세대, 남녀는 평등하다고 교육받고 자란 세대, 집안에서 ‘계집애’라는 말 한번 듣지 않고 남자와 동등한 교육을 받고 자란 세대가 마주한 현실은 여성이 근무하기 힘든 혹독한 직장문화와 그 앞에서 느끼는 좌절감이다. 출산하는 순간 직장에서 아웃될 수밖에 없다는 현실. 마치 초등학생때까진 까불던 남자애들과 똑같이 주먹질을 주고받던 여자아이들이 중학교에 가서 느끼는 격차를, 이제 졸업과 취업을 앞둔 상황에서 다시 느끼는 것이다.
이 구조의 피해자는 여성뿐 아니다. 젊은 세대들은 모두가 취직을 바라면서도 취직 후 잃어버릴 많은 것들을 두려워한다. 야근으로 사라질 저녁과 주말근무로 사라질 주말이 두려운 건 모든 젊은 세대들의 두려움이고 구조적 문제다. 하지만 기성사회의 부조리하고 낙후된 사회구조에서 비롯된 문제가 20대 남녀 간의 갈등으로 터져나와, 서로를 향해 삿대질하는 현실을 보면 서글프다.
20대 남녀갈등은 결국 잠재적 피고용자들이 느끼는 불안에서 촉발된 것이다. 대학생 A와 B의 갈등은 곧 신입사원 A와 B의 갈등이기도 하다. 정확히는 예비 신입사원 A와 B의 갈등이다. 20대 남녀들이 서로에게 삿대질하며 하세월할 때, 기성사회는 대답할 준비가 되어있을까? 이 문제가 ‘애들끼리 투닥거리는’ 소란이 아니라는 것을 사회가 받아들이고 함께 고민해야 하지 않을까.
남궁민(경제를 전공하는 대학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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