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서원 개개인을 살펴보면 다들 면면이 뛰어나다. 어마어마한 경쟁률을 뚫고 입사한 인재들답다. ‘스마트’라는 단어는 애초에 이들을 위해 존재하는 단어가 아닐까? 딱 들어맞는 느낌이다. 이들이 한 팀이 된 이상 그 어떤 프로젝트도 문제없을 것이다. 원탁에 앉아 머리를 맞대고 ‘집단 지성’을 발휘하기만 하면 게임은 끝나는 것이다. 아주 좋아. 여기까지가 딱 반 년 전, 조직 개편을 앞둔 경영진의 생각이었다. 하지만 현실은 그리 녹록지 않았다.
언제부터인가 부서원들의 눈빛이 흐리멍덩해지기 시작했다. 회의는 이렇다 할 결론 없이 끝나는 게 태반이고, 그나마 내리는 결론들도 대부분 궁여지책이거나 수준 이하다. 보고서만 보면 물 흐르듯 잘 흘러가는 것 같지만, 실상은 전혀 그렇지 않다. 알맹이가 없다. 위태위태하다. 보다 못한 CEO가 위에서 한 마디를 툭 던지자 관련 잡무와 프로세스, 직책 들이 생겨났다.
이제는 기존 업무들의 우선순위마저 무너졌다. 프로젝트 완료 일정이 자꾸만 뒤로 밀려간다. 하지만 책임지려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이론중시자와 현장중시자의 의견 차만 계속 벌어질 뿐이다. 결국 이 조직은 각자가 알아서 자기 밥그릇을 챙겨야 하는 상황까지 치달았다. 경영진은 다시 한 번 생각한다. 도무지 직원들의 열정이 보이지 않는군. 이래서야 ‘집단 지성’이 구현될 수 없지. 조만간 조직 개편을 통해 이 상황을 타개해야겠어. 상벌도 좀 강화하고, 혁신 가치 키워드도 재고하고 말이야.
이거 혹시 우리 회사 이야기 아니야? 하고 고개를 갸우뚱할 수도 있다. 심지어 이 글을 쓰고 있는 나조차도 그랬으니 말이다. 상당 부분 유사하지만 우리 회사 이야기는 아니다. 위 이야기는 세계적인 기업 IBM 출신의 군터 뒤크가 쓴 책 『왜 우리는 집단에서 바보가 되었는가』(비즈 페이퍼)에 묘사되는 ‘집단 어리석음’의 재구성이다. 한국 기업에서만 느낄 수 있는 고유의 문화가 아니다. 저자는 독일인이다. 게다가 회사도 IBM이다. 하지만 나는 책을 읽은 지 채 10분도 지나지 않아 깨닫고 말았다. 그들도 별 수 없었다. 똑같은 ‘집단 어리석음’에 빠져 있었다. 진정한 의미의 ‘We are the world’였다.
그동안 ‘집단 지성’을 다루는 책들은 많았다. 그러한 책들에서 ‘집단 어리석음’의 예시는 ‘집단 지성’의 탁월함을 설명하기 위한 밑간 정도에 불과했다. 『왜 우리는 집단에서 바보가 되었는가』는 정확히 그러한 책들과 정반대 지점에 위치한다. ‘집단 지성’의 유토피아가 아닌 ‘집단 어리석음’의 디스토피아에 대해 열변을 토한다. 평범한 직장인이었다면 “사회생활 참 거지 같네” 하고 소주 한 잔 쭉 들이켰을 그 한 줄의 이야기를 460여 페이지의 분량으로 끄집어낸다. 저자가 직장에서 겪었던 경험과 학교에서 배운 이론을 바탕으로 챕터마다 적확한 예시를 늘어놓는다. 경영진과 실무자의 입장, 북 스마트(이론중시자)와 스트리트 스마트(현장중시자)의 입장, 집단 어리석음에 빠져 기업들이 저지르는 꼼수들에 대해서도 가감 없이 파헤친다.
무척 현실적인 책이다. ‘어떻게 해볼까’보다는 ‘어쩌다 이 지경까지’에 중점을 둔 채로 풀어나간다. 그래서인지 이 책을 읽다 보면 나도 모르게 분노하게 되는 순간들을 여러 차례 맞닥뜨리게 된다. 연휴 내내 읽었더니 오랜만에 출근한 사무실이 전혀 낯설지 않아 보이는 효과도 있었다. 퇴근과 동시에 회사에서 멀어지고 싶은 분들에게는 이 책이 어마어마한 스트레스로 다가올 수도 있다는 점을 미리 경고한다. 같은 이유로 신입사원들보다는 최소 직장에 3, 4년 이상 재직 중인 분들께, 또 3, 4년차보다는 실제로 회사를 이끌어가는 경영진에게 이 책을 권하고 싶다. 당신들이 뽑아놓은 인재들이 왜 바보가 되어가고 있는지, 직원들이 왜 창의적인 일은 마다하고, 바보 같은 일들에만 힘쓰고 있는지, 그 답이 이 책에 쓰여 있다. 개인만이 문제가 아니다. 집단의 근본적인 방향을 돌려야 한다.
끝으로 한 가지 더, 이 책을 읽고 “그래서 뭘 하면 되는데?”가 아니라 “그래서 뭘 하지 말아야 되는데?”에 대해 생각해보시길 바란다. 지금 행하고 있는 ‘어리석음’ 중 몇 가지만 사라진다 해도 직원들의 출근길은 훨씬 가벼워질 것이다. 바야흐로 과잉의 시대다. 터질 것 같은 100의 압박보다 여유 있는 85의 유연함이 더 소중한 순간임을 잊어서는 안 된다. ‘집단 지성’은 바로 그 유연함에서부터 시작되는 법이다.
블로거 ‘녹색양말’
--------------------------------------------------
지하철 독서를 즐기는 4년차 직장인, 서평 블로그 verdesox.com 운영 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