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즈한국] 인사업무를 맡은지 얼마 안 되어 처음 참석한 정기 노사협의회에서 겪었던 일이다. 근로자 측 위원으로 참석했던 노동조합 지부장 A 또한 ‘장'의 자리에 오른 지 얼마 안 됐을 때였다. 사정이 이렇다 보니 양측 모두 경험과 지식 부족으로 상대에 대한 이해는 물론이고, 자신에 대한 정체성도 제대로 확립되지 못한 상태였던 것으로 기억한다.
인사팀장이라고 해봐야 어디까지나 직책, 혹은 직위에 불과할 뿐 회사의 실질적인 경영진이나 의사결정권자가 아니다. 당연히 무언가를 결정할 만한 힘도 권한도 없다. 노사협의회는 물론이고 더 나아가 단체교섭을 담당하는 주체도 되지 못한다. 다만 회사의 현재 ‘취업규칙’에 대해 가장 구체적으로 설명할 수 있고, 필요하다면 자문을 통해 노동법 등에 위배되는 내용이 없는지 인사와 노무에 관한 취업규칙을 관리하고 직원의 근로계약 등을 담당하는 실무자이기 때문에 경영진의 보좌로서 배석해 있을 뿐이었다.
노사협의회는 당장의 구체적인 단체협약보다는 직원들의 건의 사항(주로 복리후생 등 복지제도와 인사제도)을 청취하고, 가능한 범위 내에서 해결방향을 협의하기 위한 자리다. 하지만 A는 처음이기 때문이었는지, 아니면 기선제압을 위한 전략이었는지 시작부터 목소리를 높이며 협의회를 네 편과 내 편으로 갈라치고 서로의 밥그릇을 두고 싸우는 불편한 자리로 만들었다. ‘이 자리에서 바로 결정을 내려라’ 든 지, 혹은 ‘거짓말이다, 노동법 위반이다, 소송도 불사하겠다’라며 시종일관 호전적인 자세를 취했다.
인사 관련 주제가 나올 때마다 사용자 위원의 대답은 주로 ‘시간을 갖고 검토해 보겠다, 예산 문제로 지금은 확답할 수 없다’로 귀결되거나 ‘과도한 인사권 개입은 경영권 침해다’라고 방어하는 것이 최선이었다. 그도 그럴 것이 노사협의회 자리에서 즉시 무언가를 결정하고, 획기적으로 기존의 판을 뒤엎도록 안건을 의결하는 것은 현실적으로 매우 어렵다. 법적인 효력도 구속력도 없다. 소정의 절차에 따라 취업규칙, 근로계약서, 단체협약 등의 변경이라는 후속 조치가 뒤따라야 노사 간 협의했던 안건이 모든 근로자에게 실질적인 효력을 발생한다. 어쨌든 자리에 참석한 대부분의 얼굴이 벌겋게 달아오른 채로 회의는 마무리되었다.
말다툼은 회의가 파한 이후 벌어졌다. A는 회의 자리를 정리하던 필자와 인사팀 직원에게 ‘사측의 하수인’이라며 비아냥거렸다. 하수인의 사전적 의미는 ‘손을 대어 직접 죽인 사람’, 혹은 ‘남의 밑에서 졸개 노릇을 하는 사람’이다. 인사업무를 담당한다는 이유만으로 졸지에 일제강점기 시대에 나라를 팔아먹고 권력에 붙어 곁불이나 쬐던 ‘친일파’가 돼버렸다.
인사팀은 사용자를 대리해서 근로자의 인사 사항을 관리하는 주체이지만, 그에 앞서 근로자이다. 근로기준법과 노조법 제2조에서는 ‘근로자’에 대해 직업의 종류를 불문하고 임금/급료, 혹은 기타 이에 준하는 수입에 의하여 생활하는 자, 또는 이를 목적으로 사업이나 사업장에 근로를 제공하는 사람이라고 정의한다. 문제는 동일한 조항의 ‘사용자’에 대한 정의이다. 사업주나 사업 경영 담당자는 아니더라도 ‘그 밖에 근로자에 관한 사항에 대하여 사업주를 위하여 행위하는 자’에 광범위하게 인사담당자가 들어간다는 해석이 지배적이다. 특히 전결권을 갖고 책임과 권한을 행사하는 위치에 있다면 근로자인 동시에 사용자로 행위하기 때문에 노동조합원이 될 수는 없다.
하지만 노동조합원이 되지 못한다고 해서 노동조합의 권리행사를 반대하지도 않으며 사용자의 하수인으로서 엄청난 특권을 갖거나 특별한 비호를 받지도 않는다. 직장 내 괴롭힘이나 성희롱 등과 관련한 사내 갈등 사항이 늘어나면서 업무량은 늘어났고(충원은 해주지 않는다), 현장 직원들만큼 대민 업무에 따른 감정소진과 스트레스도 겪는다. 외부고객뿐 아니라 내부고객인 직원들의 감정 쓰레기통이 되는 경우도 많다. 굳이 편 가르기를 한다면 사용자보다는 노동조합의 편에 서서 근로자들의 목소리에 힘을 보태고 싶은 경우가 더 많다. 적어도 한국 사회에서 아이를 둘이나 낳고 기르며 임신기 단축 근로와 육아휴직을 사용하고 다시 복직해 아이가 아플 때는 연차휴가를 쓰면서 꾸역꾸역 커리어를 이어가고 있는 워킹맘의 한 사람으로서 늘 그들의 노력에 빚진 기분이다.
A가 공적인 자리에서 ‘노동조합의 간부’로서 직원들의 복지증진을 위해 소리 높이는 혁명가가 되듯이 인사팀 직원 역시 필요한 자리에서 사측을 대리하는 ‘위임인’으로서 메신저 역할을 한다. 우리는 모두가 주어진 역할에 충실한 배우에 불과하며 그에 대한 대가로 임금을 받는 급여생활자 동지이다. 이 많은 이야기를 그 자리에서 일일이 늘어놓지는 않았지만 ‘우리도 당신과 같은 근로자이다’라는 대답에 그는 멋쩍게 고개를 끄덕였고 표현이 과했다며 사과했다.
이를 계기로 초보 인사팀장과 초보 노조 간부는 전략적 동반자 관계를 유지하게 되었다. 적절히 필요한 만큼 서로의 동향을 주고받으며 어쨌든 좀 더 나은 방향으로 가고자 뜻을 모았다. 몸담은 회사가 안정적으로 오랜 기간 지속되길, 그래서 가족과 나의 생계를 유지하는 데 큰 문제가 없길 바라는 마음은 누구나 마찬가지니까. 가끔은 언성을 높이고 싸울 때도 있지만 각자의 위치에서 ‘일하는 사람’으로 서로를 대우하면서 ‘그 자리에서 고생하고 있는 것을 알고 있다’는 말을 주고받을 수 있는 사이. 그런 것도 연대가 아닐까. 인사팀 직원으로서 할 수 있는 최소한의 연대 말이다.
김진 HR 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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