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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수진의 계정공유] 변희봉이란 고목에 꽃을 피운 '플란다스의 개'

봉준호의 발칙한 데뷔작 통해 재발견된 남다른 존재감…세상을 떠난 명배우를 추모하다

2023.09.22(Fri) 14:50:20

[비즈한국] 지난 9월 18일, 배우 변희봉의 별세 소식을 듣고 많은 사람들이 그가 출연한 영화와 드라마를 떠올렸을 것이다. 대다수는 1300만 명의 관객을 동원한 ‘괴물’을 먼저 떠올리지 않았을까? 괴물을 향한 샷건의 탄환이 다 떨어졌음을 인지하고 자식들을 걱정하며 도망치라고 손짓할 때의 장면. 한국영화에서 가장 인상적인 장면들을 꼽으라면 빠지지 않을 장면 중 하나다. 그럼에도 내가 가장 먼저 떠올린 영화는 ‘플란다스의 개’다. 변희봉의 존재감을 확고히 각인시켰던, 봉준호 감독의 장편 데뷔작.

 

2000년 2월 개봉한 봉준호 감독의 장편영화 데뷔작 ‘플란다스의 개’. 잃어버린 개를 둘러싼 작은 소동극을 그린 블랙코미디인데, 들여다보면 사회비판적 메시지가 곳곳에 깃들어 있다. 흥행에는 실패했지만 독특하게 재미난 블랙코미디로, 거장의 시작이 궁금하다면 지금이라도 시청할 것. 사진=영화 ‘플란다스의 개’​ 화면 캡처

 

2000년 2월 개봉한 ‘플란다스의 개’는 흥행으로 따지면 실패작이다. 10만 명 남짓한 관객을 동원했으니, 당시 이 영화를 극장에서 본 사람을 주변에서 찾아보기 힘든 편이다. 나도 2000년 2월에 ‘반칙왕’과 ‘아메리칸 뷰티’를 봤던 기억은 있지만, ‘플란다스의 개’는 선택지에 없었던 것으로 기억한다. 비디오로 영화를 접하고 여기저기 입소문을 내긴 했다. 이후 ‘살인의 추억’이 성공한 뒤엔 깝죽거리는 멘트도 덧붙였던 것 같다. “내가 데뷔작부터 알아봤다니까?”

 

‘플란다스의 개’에서 아파트 단지 경비원 변씨로 출연한 변희봉. 개를 잡아먹는다는 설정 때문에 지금 보면 눈살을 찌푸릴 사람도 많겠지만, 지하실에서 ‘보일러 김씨 괴담’을 장장 6분 가까이 늘어놓는 장면은 변희봉의 연기인생에서 놓칠 수 없는 장면이다. 사진=영화 ‘플란다스의 개’​ 화면 캡처

 

각설하고, ‘플란다스의 개’는 20년이 흐른 지금 봐도 인상적이다. 대학교수를 희망하는 시간강사 고윤주(이성재)와 아파트 관리사무소에서 일하는 박현남(배두나)이라는, 전혀 접점이 없어 보이는 두 인물이 주인공. 교수 임용에 실패해 그렇지 않아도 신경이 곤두서 있는 윤주는 아파트 전체에 카랑카랑 울리는 개 짖는 소리로 스트레스를 받고 있다. 그러던 중 아파트 복도에서 발견한 강아지를 소음의 주범이라 생각하고 납치, 강아지를 죽이려다(!) 아파트 지하실에 가둔다. 강아지를 잃어버린 소녀는 강아지를 찾는 전단지를 아파트 내에 붙이고자 관리사무소의 현남을 찾아오고, ‘용감한 시민상’을 받는 것이 소원인 현남은 아파트 내에서 늘어나는 강아지 실종사건에 주목하게 된다.

 

교수 임용을 노리는 시간강사 고윤주로 분한 이성재. 똑똑한 지성인인 척 하지만 실상 1500만 원을 바쳐서라도 교수가 되고 싶은, 자신의 스트레스를 더하는 강아지를 납치해 죽이기도 인물. 사진=영화 ‘플란다스의 개’​ 화면 캡처

 

‘플란다스의 개’의 등장인물은 윤주와 현남 외에 윤주의 아내 은실(김호정), 현남의 친구 장미(고수희), 강아지 실종사건의 주범으로 의심되는 부랑자 최씨(김뢰하) 등으로 단출하다. 변희봉은 윤주가 사는 아파트 단지 경비원 변씨로 등장하는데, 크레딧으로 따지면 이성재, 배두나, 김호정에 이어 네 번째 등장이다. 그럴 만도 한 게, 이 영화에서 경비원 변씨는 짧은 분량이지만 어마무시한 존재감을 발휘한다. 특히 아파트 지하실에서 죽은 개로 보신탕을 끓여 먹으려다 등장한 관리소 주임에게 늘어놓는 장광설은 압권. “아, 근디 말이여. 가마이 쪼까 들어봐요이~”로 느릿하게 입을 뗀 변씨는 아파트 시공사와 관리자가 담합해 부실시공을 한 것을 알아챈 ‘보일러 김씨’가 살해당해 아파트 지하실 벽 속에 묻혔다는 ‘보일러 김씨 괴담’을 장장 6분 가까이 들려준다.

 

봉준호 감독은 ‘플란다스의 개’ 오디션장에서 졸고 있는 배두나를 보고 현남이란 캐릭터 그대로라고 생각해 캐스팅했다는 후일담을 전한 바 있다. 배두나는 이 작품에서 인상적인 연기를 펼치며 청룡영화상 신인여우상을 수상한다. 사진=영화 ‘플란다스의 개’​ 화면 캡처

 

빨리 훼방꾼을 쫓아내고 보신탕을 먹어야 하는 변씨가 느릿느릿한 전라도 사투리로 “보일라 돈다이~ 보일라 돌아뿌제이~” 하며 괴담을 늘어놓을 때의 그 기묘한 몰입감이란! 변희봉의 천연덕스러운 연기에, 연극무대 핀조명마냥 손전등으로 비춘 변씨의 얼굴을 아래에서 위로 올려다보며 클로즈업한 앵글이 더해지면서 이야기의 경청자인 관리소 주임과 숨어서 그 이야기를 듣고 있던 윤주는 물론 화면 너머로 보던 나도 덩달아 눈을 똥그랗게 뜨게 만들던 기억이 새록하다.

 

봉준호 감독은 어릴 적부터 좋아했던 변희봉을 자신의 데뷔작에 캐스팅하기 위해 마포의 한 호텔에서 만나 그의 출연작을 줄줄이 읊으며 출연을 부탁한다. 그때 변희봉은 연기를 접고 낙향할까 고민했던 시기였고, ‘플란다스의 개’ 시나리오 속 변씨의 캐릭터도 마음에 들지 않았다고 했다. 하기야, 아파트를 돌아다니는 개를 잡아먹는 경비원이라니, 좋을 리는 없었을 것 같다.

 

현남의 친구 장미(뚱녀)로 등장하는 고수희, 봉준호 감독의 단편 ‘백색인’ ‘지리멸렬’부터 함께한 김뢰하, 윤주의 아내로 나오는 김호정 등 지금은 잘 알려진 배우들의 초창기 모습을 보는 재미도 쏠쏠하다. 사진=영화 ‘플란다스의 개’​ 화면 캡처

 

영화가 개봉하고 나서도 극장에서 볼 생각이 없었다가, 봉 감독과 함께 영화를 보고 “지금껏 봤던 어떤 영화와도 달랐다”고 감탄하게 됐단다. ‘플란다스의 개’를 시작으로, 변희봉은 ‘살인의 추억’ ‘괴물’ ‘옥자’에 이르기까지 봉준호 감독과 4편의 영화를 함께했다. 극중 배역 이름이 모두 ‘희봉’이었을 만큼, 변희봉에 대한 봉준호의 애정과 신뢰는 각별했다. 변희봉의 연기인생 또한 봉준호를 만나며 한층 풍성하고 드라마틱해졌다. ‘옥자’로 칸국제영화제에 갔을 때, 변희봉은 “70도 기운 고목나무에 꽃이 핀 기분입니다”라며 감격의 인사를 남기기도 했다.

 

기껏 장을 봐오다 빠뜨린 딸기우유를 사다 달라는 아내의 말에 슈퍼를 100미터도 지나쳤다며 귀찮아하는 윤주. 그렇게 시작된 작은 논쟁(슈퍼가 100미터 밖이냐 안이냐)을 위해 두루마기 휴지가 쓰이는 등 재기 발랄한 장면들이 많았다. 사진=영화 ‘플란다스의 개’​ 화면 캡처

 

수십 년간 연기를 펼쳤던 만큼 배우 변희봉을 추억할 작품은 무수히 많다. OTT에서 볼 수 있는 작품도 봉준호 감독의 영화 외에 ‘화산고’ ‘선생 김봉두’ ‘시실리 2km’ ‘더 게임’ ‘양자물리학’ 등의 영화와 드라마 ‘조선왕조 500년 한중록’ ‘하얀거탑’ ‘내 여자친구는 구미호’ ‘꽃할배 수사대’ ‘동네변호사 조들호 2’ 등 여럿이다. 그럼에도 ‘플란다스의 개’를 추천하는 건 이 작품이 변희봉이란 고목에 꽃을 피운 출발점이고, 또 김호정, 고수희, 김뢰하 등 지금은 잘 알려진 배우들의 초창기 얼굴을 만날 수 있기 때문이다. ‘미술관 옆 동물원’ ‘주유소 습격사건’ 등으로 얼굴을 알린 이성재는 그때도 좋아했지만, 김호정과 고수희는 ‘플란다스의 개’로 처음 발견했던 신선한 얼굴들. 그리고 지금 봐도 재기 발랄한 장면들, 그 속에 숨겨진 발칙한 함의도 이 영화의 재미다. 티빙에서 시청 가능하다. 단, 심장이 약한 애견인에겐 비추천.  

 

필자 정수진은?

여러 잡지를 거치며 영화와 여행, 대중문화에 대해 취재하고 글을 썼다. 트렌드에 뒤쳐지고 싶지 않지만 최신 드라마를 보며 다음 장면으로 뻔한 클리셰만 예상하는 옛날 사람이 되어버렸다. 광활한 OTT세계를 표류하며 잃어버린 감을 되찾으려 노력 중으로, 지금 소원은 통합 OTT 요금제가 나오는 것. 

정수진 대중문화 칼럼니스트

writer@bizhankook.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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