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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수진의 계정공유] 궁극의 판타지 '닥터 차정숙', 슬의생처럼 욕하지 않고 보는 이유

아줌마 엄정화가 선사하는 유쾌·통쾌한 매력…같은 판타지라도 훨씬 인간적인 면모가 공감 포인트

2023.05.11(Thu) 10:42:35

[비즈한국] 약 2년 전, ‘나는 왜 욕하면서도 ‘슬기로운 의사생활’을 보는가’라는 제목의 글을 썼다. 여러 가지 이유가 있었지만 ‘슬기로운 의사생활’(이하 ‘슬의생’)이 그려내는 지나치게 완벽한 40대의 판타지가 거슬린다는 내용이었다. 요즘 재밌게 보는 드라마 중 하나는 ‘닥터 차정숙’이다. ‘닥터 차정숙’은 그야말로 판타지의 결정체인데, 나는 간간히 궁시렁대긴 하지만 욕하지 않고 재미나게 본다. 왜 ‘슬의생’은 욕하면서 봤고, ‘닥터 차정숙’은 그렇지 않을까?

 

남편과 함께 구산대 의대를 졸업했으나 출산과 육아로 인해 레지던트 과정을 포기하고 전업주부로 살았던 차정숙. 목숨이 절체절명에 달하는 사건을 겪고서 자신의 완벽했던 가정이 허상이었음을 깨닫는다.

 

‘닥터 차정숙’은, 하나하나의 팩트만 놓고 보면 웃지 못할 이야기로 가득하다. 의대를 졸업했으나 혼전임신으로 경력을 포기하고 오랫동안 전업주부였던 차정숙(엄정화)의 헌신이 헌신짝처럼 치부되었다는 사실이 가장 뼈아프다. 급성 간염에 걸린 정숙이 간이식 수술을 받아야 했으나 공여 조건이 가능했던 남편 서인호(김병철)는 시어머니 곽애심(박준금)의 반대를 빌미로 죽음을 앞둔 아내를 외면한다. 이 얼마나 뼈아픈 배신인가.

 

게다가 혼전임신으로 결혼했다지만 남편은 첫사랑 최승희(명세빈)와 20년 가까이 불륜을 저지르는 데다 혼외자식인 최은서(소아린)까지 둔 처지다. 차정숙이 남편의 불륜을 눈치챈 건 8화에서지만, 그 이전에도 차정숙은 남편과 10년간 각방을 쓰며 따스한 애정도, 반려자로서의 존중도 받지 못하며 살아왔다. 코미디의 외피를 둘러 경쾌하게 표현되고 있으나 결코 웃을 수 없는 이야기들인 건 분명하다. 

 

‘닥터 차정숙’에서 최종 빌런인 차정숙의 남편 서인호. 의대 내에서 최승희와 소문난 커플이었으나 하룻밤 실수로 차정숙과 결혼했고, 또 다시 미국 연수에서 재회한 최승희와 실수로 혼외자를 갖게 되며 지난한 불륜을 이어간다.

 

그러나 동시에 ‘닥터 차정숙’은 디즈니 영화의 세계관을 구현하는 듯한 느낌으로 모든 것이 밝고 선명하다. 차정숙은 간이식을 받지 못해 죽을 뻔 했으나 마침 뇌사 판정 환자가 등장하며 무사히 간을 공여받아 살아난다. 간이식 사건을 겪고 각성한 차정숙이 포기했던 레지던트 과정을 밟고자 100일 준비 끝에 50점 만점 전공의 시험을 49점이라는 우수한 성적으로 가뿐히 합격한 것도 그렇다.

 

정숙의 간이식 수술을 성공시킨 젊고 잘생기고 미혼의 전문의 교수 로이 킴(민우혁)이 정숙이 근무하는 구산대병원으로 옮긴 것이 작은 판타지라면, 정숙이 주치의를 맡은 오창규 회장(송영창)이 유체이탈을 경험하며 혼신의 힘을 다해 자신을 살리려는 정숙을 목격하고 구산대병원에 100억원을 기부하며 정숙을 지원사격하는 건 판타지의 정점에 해당한다. 이 정도면 ‘슬의생’의 재벌급 금수저 안정원(유연석)이 친구들에게 고액 연봉을 제시하며 자신의 병원으로 스카우트한 정도는 다큐멘터리급으로 보일 정도다.

 

차정숙을 돕는 조력자인 로이 킴과 오창규 회장. 잘생긴 젊은 미혼의 전문의 로이 킴이 전형적인 클리셰 캐릭터라면, 100억원을 기부하며 차정숙을 지원사격하는 오창규 회장은 동화 속 산타클로스 같은 존재다.

 

전공의 시험은 49점을 받았어도 오랜 경력단절로 실전에서 실수투성이인 ‘성장캐’ 차정숙의 모습은 탈인간급으로 그려지는 ‘슬의생’의 ‘99즈’와 비교해 훨씬 인간적으로 보이며 공감을 자아낸다. 나이를 재단할 수 없을 만큼 ‘탈꼰대’였던 ‘99즈’와 비교되는 모습도 도리어 차정숙에 이입되는 포인트. 40대 후반의 차정숙은 20대 후반의 선배 레지던트 전소라(조아람)의 모습에 불편함을 느끼는 모습을 많이 보여준다.

 

이 드라마에서 가장 이해가 안 가는 인물은 서인호와 20년 가까이 불륜을 저지르는 최승희일 것이다. 병원 재벌의 딸인 최승희가 아비 없는 자식을 낳아 기르면서까지 서인호에게 집착하는 이유를 알다가도 모르겠다.

 

특히 전소라가 자신의 아들 정민(송지호)과 사귀는 사이란 걸 알아채면서 하는 상상들-설거지하지 않는 며느리를 기함하며 보는 모습, 며느리에게 과일을 깎으라 하는 모습-은 시어머니에게 모진 시집살이를 겪은 차정숙도 별 수 없는 ‘꼰대’임을 보여주는 대표적 장면. 그러나 차정숙은 꼰대지만 자신의 한계를 인지하고, 적어도 옳고 그른 것을 구분할 줄 아는 모습으로 현실감을 준다. 상상 속에서 며느리가 된 전소라가 하는 발언들에 기함하면서도 “근데 기분 나쁘게 다 (하는 말들이) 맞는단 말이야”라고 괴롭게 수긍하는 모습이 그렇다. 

 

차정숙이 20년의 경력단절에도 불구하고 앞을 향해 나아가는 모습은 절로 통쾌한 맛을 선사한다. 이 통쾌한 맛은 익숙한 것이기도 한데, 2000~2001년 인기를 끌었던 드라마 ‘아줌마’나 2008년 드라마 ‘내 생애 마지막 스캔들’을 떠올려보면 흡사한 점을 느낄 것이다. ‘아줌마’의 원미경이나 ‘내 생애 마지막 스캔들’의 故 최진실처럼, ‘닥터 차정숙’의 차정숙도 새로운 것에 도전하기 주저되는 중년의 나이에, 모두의 무시를 받다 자신을 깨닫고 한 발 앞으로 나아가는 모습으로 강렬한 대리만족을 선사한다. ‘닥터 차정숙’의 시청률 고공행진에는 특히 동년배 중년들과 전업주부들의 강력한 지지가 뒷받침되고 있음이 분명하다.

 

차정숙의 시어머니 곽애심은 알뜰살뜰하게 며느리를 부려 먹고도 아들의 간이식을 반대한 빌런 시어머니다. 그러나 아들 정민과 사귀는 전소라를 보는 차정숙의 심경도 곽애심의 발치 정도는 따라가는 수준. 전형적인 ‘요즘 애들’인 전소라를 겪으며 변화할 차정숙의 모습도 기대된다.

 

‘닥터 차정숙’의 말도 안 되는 판타지에도 주인공에게 응원을 보내게 만드는 데에는 단연 엄정화의 공이 크다. 한국의 마돈나로 불리며 배우 겸 가수로 독보적인 존재감을 자랑하는 엄정화는, 특유의 유쾌하고 낙천적인 모습에 오지랖 있지만 넉넉하고 따스한 ‘아줌마스러움’을 더하여 자칫 ‘민폐 캔디’처럼 비쳐질 수 있는 차정숙을 사랑스럽게 그려낸다. 이는 엄정화가 다져온 연기 스펙트럼과 50줄에 들어선 엄정화의 연륜과 넉넉함이 자연스레 배어 나온 결과일 것이다. 

 

8화까지 방영하며 반환점을 돈 ‘닥터 차정숙’. 남편 서인호와 최승희의 불륜을 알아챈 차정숙이 앞으로 선사할 ‘사이다 반격’이 기대되는 시점이다. 지금까지 행보로만 봐도 의술이 무척 뛰어나진 않더라도 따스하고 인간적인 의사가 될 것으로 보이는 차정숙의 미래도 계속 지켜보고 싶어진다. 무엇보다 이 풍진 세상에 차정숙 한 명 정도는 조건없이 무조건 행복해졌으면 하는 바람. 그러면서 우리도 흐뭇한 미소를 짓게 되니 말이다.

 

남편이지만 신뢰가 없는 서인호와 차정숙의 믿음직한 친구 포지션을 꿰찬 로이 킴의 반목은 계속될 전망이다. 잘생긴 연하남이라는 클리셰 캐릭터인 로이 킴과 차정숙이 어느 정도까지 단계를 밟을지도 기대와 염려의 시선으로 바라보게 된다.

 

필자 정수진은?

여러 잡지를 거치며 영화와 여행, 대중문화에 대해 취재하고 글을 썼다. 트렌드에 뒤쳐지고 싶지 않지만 최신 드라마를 보며 다음 장면으로 뻔한 클리셰만 예상하는 옛날 사람이 되어버렸다. 광활한 OTT세계를 표류하며 잃어버린 감을 되찾으려 노력 중으로, 지금 소원은 통합 OTT 요금제가 나오는 것. 

정수진 대중문화 칼럼니스트 writer@bizhankook.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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