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즈한국] A는 출중한 기술과 실력으로 업계에서 알아주는 이가 많아 회사에서 어렵게 모셔 온 경력직이었다. 생략하기 애매해서 형식상으로나마 진행했던 면접에서는 면접위원의 일부가 역으로 일어나 면접장에 들어서는 지원자에게 인사하는 진풍경도 펼쳐졌다. 불미스러운 문제가 생겨 급하게 봉합과 재건이 필요했던 조직에 마침맞게 나타난 구세주 같았다. 아니, 구세주인 줄 알았다.
연봉계약을 체결하던 때는 물론 인사 관련 자잘한 업무처리를 부탁할 때 대외적으로 보이는 A의 모습은 젠틀하기 그지없었다. 그러나 그의 연장계약 시점이 도래할 즈음 노조를 통해 괴롭힘 민원이 들어왔다. 부서 회의나 발표 중에 자신의 질문에 즉시 대답하지 못하는 팀원에게 멀쩡히 집에 계신 부모까지 소환하며 모욕적인 언사를 했다는 것이다. 워낙에 뛰어난 인물이다 보니 초반에는 뭐라도 배우는 게 있으리라는 마음으로 다소 험한 말이 섞여도 질책과 조언이라 생각하고 달게 받으며 참아왔는데 도저히 견딜 수가 없다며 노동조합에 도움을 요청했다는 내용이었다.
A는 자신의 기대보다 일부 팀원들의 역량이 너무 부족하여 그들을 가르치기 위한 목적에서 했던 말이지 모욕을 주거나 폭언을 한 적은 없고, 업무 범위를 넘어선 명령이나 지시도 일절 없었다고 부인했다. 신고인을 비롯한 팀원 전부를 면담해 보니 의견이 반으로 엇갈렸다. 절반 정도는 신고인이 그동안에도 부서에서 실수를 반복하는 저성과자였고 A의 질책 또한 업무능력 부족이나 실수에 대한 지적과 수정에 대한 것이었다고 답했다. 나머지 절반의 팀원은 신고인의 역량이 부족하기는 하나 이에 대한 A의 지적이 조금 과했다는 의견이었다.
직장 내 괴롭힘이 인정되려면 3가지 조건을 모두 충족시켜야 한다. 지위 또는 관계의 우위가 존재해야 하며, 업무상 적정범위를 넘는 행위여야 하고, 이에 따라 신체적 정신적 고통을 주거나 근무 환경을 악화시키는 행위여야 한다. A의 경우 첫째와 셋째에는 해당하였으나 업무상 적정범위를 넘겼는지에 대해서 진술이 엇갈린 것이다. 구체적인 폭언의 내용 등 행위자의 부적절한 행위가 기록된 녹취록이나 주변인의 일치하는 진술이 존재하지 않는 한 섣불리 직장 내 괴롭힘이라고 판단하기 어려운 상황이었다. (직장 내 괴롭힘 신고사례 대다수가 이 두 번째 조건을 충족시키기 꽤 어렵다)
직장이라는 곳은 대학 동아리와 달라서 오로지 결과와 업무성과로 능력을 평가받는 곳이다. 특히 A와 같은 스타급 플레이어의 인성 논란이라면 더더욱 구체적이고 객관적인 증거가 없는 이상 괴롭힘이 인정되기 어렵다. 실제로 직원 대다수가 A의 깐깐한, 혹은 철두철미한 성격에서 비롯된 에피소드 정도로 여기는 분위기였다. 신고인이 자기가 부족한 점은 깨닫지 못하고 노조를 등에 업고 설치는 것 아니냐는 뒷담화도 있었다.
A는 조사가 종료되고 어디서 누군가에게 귀띔받았는지, 자신의 말투에 다소 과한 부분이 있었다며 신고인에게 쿨(?)하게 사과했고, 신고인도 사과를 받아들이며 일단락되는 듯했다. 입사 2년 차였던 신고인은 얼마 후 이직했고 A의 망나니 칼춤 같은 폭언은 다른 직원들에게 돌아갔다. 두 번째 민원은 그의 두 번째 재계약 연장평가 시점에 집단으로 들어왔다. 이번에는 녹취파일도 함께였다.
녹취파일을 듣는 동안 사회초년생 시절 겪었던 일들이 마치 외상후 스트레스처럼 떠올라 숨이 막혀왔다. 아, 나는 왜 이런 사소한 실수를 자꾸 반복하는 거지? 머리를 장식으로 달고 다니는 건가? 정말 아무짝에도 쓸모없는 등신 머저리구나. 나 자신이 정말 무능한 사람이 된 것 같은 자괴감. 실수하면 어쩌지 하는 마음에 불안감과 우울증이 생기고, 출근할 생각만 하면 마치 물속에 빠진 것처럼 숨이 막히고 허우적대는 기분. 출근길 지하철 안에서 갑자기 식은땀이 나며 숨이 가빠와서 목적지에 다다르지 못하고 정차역마다 내려야 했던 기억까지 소환되었다.
이들은 무려 2년여간 그런 말을 들어왔던 것이다. 처음에는 그 대상이 내가 아니었을지도 모른다. 정말 좋은 뜻으로 실수를 바로잡아주고 부족한 우리를 이끌어가며 위대한 여정을 함께하기 위해 일정 부분 감수해야 하는 일이라고 생각했을 수도 있다. 사업 특성상 사소한 실수가 미치는 여파가 워낙에 크다 보니 그 정도 군기쯤이야 라고 스스로를 채찍질하는 사람도 있었을 것이다. 그렇지만 이어폰을 통해 들려오는 내용은 명백히 업무상 적정 범위를 넘어서는 것은 물론이고 심각한 수준의 가스라이팅이 틀림없었다. 1년 전 최초로 신고했던 이는 실수가 잦은 저성과자가 아니라 오히려 가장 먼저 손절하고 탈출한 현자였을지도 모른다.
아무리 잘나고 뛰어난 사람일지라도 다른 이를 함부로 대하고 존중하지 않는다면 단기간에는 가시적인 성과를 낼지 몰라도 장기적으로 봤을 때 오히려 조직에 암적 존재가 된다. 직장은 혼자 일하는 곳이 아니기 때문이다. A는 자신이 최고라는 자부심과 그에 따른 자존심은 하늘을 찌르지만, 막상 스스로에 대한 자기 자존감은 굉장히 낮은 사람이었을지도 모른다. 다른 이들을 굴복시켜야만 자신이 돋보인다고 생각하며 경쟁심 하나로 그 자리까지 올라갔을지 모르겠지만 업계에서 그의 명성이 앞으로도 쭉 지속 가능할지는 잘 모르겠다.
A는 중징계 처분을 받았고, 당연히 계약은 종료되었다. 종종 비공식적으로 A의 레퍼런스 체크가 들어오는데 늘 있는 그대로의 사실을 전달하고 있다. 일은 정말 잘하시는 분임에 틀림없다고, 하지만 그의 인성에 대해서는 당신과 나의 정신건강을 위해 노 코멘트 하겠다고.
김진 HR 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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