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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빠랑] 제주 역사 기행① 탐라인은 어떻게 고려인이 됐을까

삼성혈서 시작된 탐라인의 역사, 공민왕 반원정책 펼치며 원세력 쫓아내고 고려에 완전히 복속

2022.04.26(Tue) 16:11:56

[비즈한국] 제주도를 만든 화산이 식은 후 인간의 역사가 시작되었다. 육지와 비슷한 선사시대를 거치면서 마을이 더 큰 마을로, 다시 부족을 아우르는 작은 나라로 발전했다. 제주의 옛 이름인 ‘탐라’는 나라 이름이기도 했다. 그 안에서 탐라인들은 스스로의 역사를 만들어갔다. 

 

원에서 제주에 파견된 목호 세력이 고려에 맞서 마지막 마지막 저항을 벌인 곳이 서귀포 연안의 아름다운 무인도 범섬이다. 사진=구완회 제공

 

#제주 역사의 시작, 삼성혈

 

제주시 구도심에 자리한 삼성혈은 탐라인의 역사가 시작된 곳이다. 아직 제주도에 사람이 살지 않던 시절, 이곳의 세 구멍에서 탐라인의 시조 ‘삼성인(고을나, 양을나, 부을나)’이 솟아올랐다고 한다. 이들은 가죽옷을 입고 사냥한 고기를 먹으며 살다가 오곡 씨앗과 송아지, 망아지를 가지고 온 벽랑국의 세 공주와 혼인하여 살게 되었다. 이때부터 제주도에 농경이 시작되었단다. 

 

삼성혈은 탐라인이 육지 사람들과 달랐음을 상징적으로 보여준다. 육지인의 조상인 환인과 해모수가 하늘에서 내려오는 동안 탐라인의 시조들은 땅에서 솟아났다. 여전히 세 개의 구멍이 남아 있는 삼성혈은 제주도에서 가장 신성한 곳이다. 품(品) 자 모양을 이룬 구멍 중 하나는 바다까지 통한다고 한다. 나머지도 원래는 속을 알 수 없을 정도로 깊었지만, 세월이 흐르면서 얕은 구멍이 되었다.

 

‘삼성인(고을나, 양을나, 부을나)’이 솟아올랐다는 삼성혈. 육지인의 조상이 하늘에서 내려오는 동안 탐라인의 시조는 땅에서 솟아났다. 사진=구완회 제공

 

신성한 구멍들 앞에는 ‘삼성혈’이라고 쓴 돌비석이 있고, 그 앞으로 돌로 만든 제단 셋이 나란히 들어섰다. 주변에는 제법 널찍한 부지에 아름드리 나무들 사이로 한가로운 산책로가 조성되었다. 산책로 끝에는 삼성혈과 제주의 초기 역사를 설명하는 전시실이 자리잡았다. 바로 옆 영상실에선 아이들도 쉽게 제주 신화를 이해할 수 있는 애니메이션을 상영 중이다. 

 

#고려의 역사로 편입되다, 항파두리 항몽유적지

 

삼성혈과 함께 시작된 탐라인의 역사가 육지로 편입된 것은 고려 시대의 일이다. 고려 태조가 후삼국을 통일한 뒤, 탐라국주는 태자를 보내 고려에 복속의 뜻을 전했다. 태조는 탐라국주에게 ‘성주’라는 작위를 하사했다. 이로써 탐라는 고려의 속국이 되었으나, 여전히 독립을 유지했다. 그러다 고려 숙종 10년(1105년) 탐라국을 탐라군으로 강등시켜 고려의 일개 군으로 편입시킴으로써 독립국의 지위를 잃었다. 다시 100년쯤 뒤에는 탐라에서 제주(바다 건너 큰 고을)로 이름까지 바꾸면서 고려의 일부가 되었다. 

 

이렇게 고려의 변방이 된 제주가 고려 역사에 다시 등장하는 것은 삼별초의 난 때였다. 몽골에 끝까지 항쟁을 다짐한 삼별초가 강화를 떠나 최후의 항쟁을 벌인 곳이 바로 제주였다. 배중손의 뒤를 이어 삼별초를 지휘한 김통정은 항파두리성을 쌓고 여몽연합군에 맞섰다. 제주민 중 일부는 이들의 편에서 싸웠고, 또 다른 일부는 여몽연합군의 편을 들었다. 제주민이 본격적으로 고려의 역사에 편입되는 순간이었다. 결국 삼별초는 전멸되었고, 여몽연합군의 편을 들었던 이들이 제주의 주도 세력이 되었다. 

 

항파두리성 일대는 항파두리 항몽유적지로 정비됐다. 삼별초의 항쟁을 기리는 비석. 사진=구완회 제공


얼핏 작은 언덕처럼 보이는 토성 항파두리성. 사진=구완회 제공​


삼별초가 최후 항전을 벌인 항파두리성 일대는 항파두리 항몽유적지로 정비되어 관광객들을 맞이하고 있다. 삼별초의 항쟁을 기리는 비석과 전시관 뒤편, 얼핏 작은 언덕처럼 보이는 곳이 토성인 항파두리성이다. 전시관을 보고 토성을 따라 걸으면 최후까지 싸우던 삼별초의 함성이 들리는 듯하다. 

 

#제주인의 눈으로 본 목호의 난, 범섬

 

삼별초의 항쟁이 진압된 후 제주는 원나라의 직할령이 되었다. 원은 남송과 일본 정벌을 위한 병참기지로 제주를 활용했다. 넓은 제주의 초지에 목마장을 만들어 당시 핵심 군수 물자였던 말을 키운 것이다. 이러한 일을 하기 위해 원에서 파견된 관리들이 목호였다. 이들은 여러 대에 걸쳐 제주에 머물며 제주인과의 혼인 등을 통해 현지화되었다. 

 

제주인에게는 고려인이나 원나라 사람이 모두 외부 세력이었으니, 목호에 대해서도 고려 관리 이상의 반감은 없었다. 오히려 잠시 머물다 떠났던 고려 지방관과는 달리 100년 이상 제주에 뿌리를 내린 목호는 제주인에 더 가까웠다. 지금도 제주에 남아 있는 애기구덕과 고소리술, 피순대 등이 이 무렵 몽골에서 넘어온 것이다.

 

문제는 공민왕이 반원정책을 펼치면서 시작되었다. 분명 고려인 입장에서는 원에 맞선 자주 정책이었지만 오랜 시간 몽골의 일부로 살아온 제주인에겐 그렇지 않았다. 공민왕이 원나라 대신 명나라에 말을 보낼 것을 명령하자, 목호들은 반란을 일으켰다. 목호의 난에는 수많은 제주인들도 함께했다. 목호는 이미 제주의 일부였기 때문이다. 공민왕은 이번 기회에 제주를 되찾겠다는 생각으로 무려 2만 5000여 명의 토벌군을 보냈다. 최영 정군이 이끄는 고려군은 계획대로 목호 세력을 뿌리뽑았다. 이 과정에서 목호들뿐 아니라 수많은 제주민도 죽임을 당했다. 

 

호랑이를 닮았다는 범섬에서 목호들은 마지막 전투를 벌이다 가족들과 함께 목숨을 끊었다. 사진=구완회 제공

 

목호 세력이 마지막 저항을 벌인 곳이 서귀포 연안의 아름다운 무인도 범섬이다. 호랑이를 닮았다는 범섬에서 목호들은 마지막 전투를 벌이다 가족들과 함께 목숨을 끊었다. 제주는 다시 고려 땅이 되었고, 고려의 지방관들이 파견되기 시작했다.

 

<여행정보>


삼성혈

△주소: 제주도 제주시 삼성로 22

△문의: 064-722-3315

△이용시간: 09:00~18:00, 연중무휴

 

항파두리 항몽유적지

△주소: 제주도 제주시 애월읍 항파두리로 50

△문의: 064-710-6721

△이용시간: 09:00~18:00, 연중무휴

 

범섬

△주소: 제주도 서귀포시 법환동

△문의: 064-710-6656

△이용시간: 상시, 연중무휴

 

필자 구완회는 대학에서 역사학을 전공하고 ‘여성중앙’, ‘프라이데이’ 등에서 기자로 일했다. 랜덤하우스코리아 여행출판팀장으로 ‘세계를 간다’, ‘100배 즐기기’ 등의 여행 가이드북 시리즈를 총괄했다. 지금은 두 아이를 키우며 아이들에게 들려주고 싶은 역사와 여행 이야기를 쓰고 있다.​​​​​​​​​​​​​​​​

구완회 여행작가 writer@bizhankook.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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