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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드라마] TV 켜고 집밥 먹는 느낌, '미우나 고우나'

미워할 수 없는 사고뭉치 아들의 감동 성장기…김치싸대기 날리는 아침드라마 보다 '순한맛'

2020.09.23(Wed) 16:56:46

[비즈한국] 익숙한 풍경들이 있다. 저녁식사를 마친 가족들이 거실에 모여 앉아 과일이나 주전부리를 먹으며 담소를 나누거나 그렇지 않더라도 굳이 거실에서 각자의 일에 집중한 모습. 무심하게 켜 있는 TV에는 드라마가 흘러나온다. 누군가 채널을 돌리려고 하면 빨래를 개키던 엄마가 한마디 던진다. “그냥 둬라, 보고 있다.” 이때 방영되는 드라마는 일일 드라마일 가능성이 높다.

 

일일 드라마는 보통 아침이나 저녁 식사를 마친 시간대에 방영된다. 남편 출근과 아이들 등교까지 한바탕 전쟁을 치른 전업주부들을 위해 아침 일일 드라마들이 오렌지주스를 줄줄 흘리거나 김치로 싸대기를 날리는 등 과격한 ‘매운 맛’을 선사한다면, 저녁 일일 드라마는 온가족이 함께 하루를 마무리하는 분위기 때문인지 막장의 탈은 쓰지만 아침보다는 순한 편이다(그래도 주부와 노년층이 가장 큰 시청자들).

 

일일 드라마 특성상 몇몇 가족과 무대를 중심으로 주요 인물들의 관계가 복잡하게 얽혀 있다. 사돈지간인 데다 엄마들끼리 앙숙인 친구 사이인 강백호(김지석)와 나단풍(한지혜)가 겹사돈을 맺게 되고, 단풍이 약혼할 뻔한 남자는 백호의 동창이고, 백호의 삼촌 달현(김찬우)이 재혼하려는 소냐(에바 포피엘)는 전처 미애(이자영)네 세입자이고, 선재가 차버린 지영이 새로 사귀게 되는 우진(이상윤)은 선재가 본부장으로 있는 봉쥬르식품의 연구원인 식. 그럼에도 따스한 가족극의 모습을 보이며 평균 시청률 39.7%, 최고 시청률 44.2%라는 큰 인기를 얻었다. 사진=KBS홈페이지

 

매일 30분가량 짧게 방영하되 50부작은 기본이요 100부작도 우스울 만큼 장기 방영하는 만큼 일일 드라마는 대체로 느린 전개와 쉬운 스토리 플롯을 선보이는데, 방송사마다 콘셉트가 있는 점도 눈에 띈다. 임성한 작가와 김순옥 작가들의 활약했던 MBC와 SBS가 ‘마라맛’ 같은 막장 드라마로 재미를 본다면 KBS, 특히 ‘9번’으로 통칭되는 KBS1의 일일 드라마는 매일 먹는 집밥 같은 느낌이랄까. 그래서 오랫동안 은근히 기억나는 일일 드라마를 떠올려보면 KBS1 일일 드라마가 많다. 2007년 9월부터 약 8개월간 방영한 ‘미우나 고우나’도 그 중 하나.

 

어릴 적 사랑했으나 부모의 격렬한 반대로 헤어진 봉만수(이정길)와 오동지(김해숙)가 각자 자식들 다 키운 중년이 되어 다시 만나 결혼을 하게 된다. 황혼의 재혼가정인 건데, 부모는 죽는 순간까지 자식들 걱정을 그칠 줄 모른다고, 이 재혼 가정 또한 진정한 가족이 되기까지 성장통이 만만치 않다. 먼저 넉살 좋고 낙천적이지만 아직 헛바람이 잔뜩 들어 있는 동지의 사고뭉치 백수아들 강백호(김지석)가 문제다.

 

젊을 적 반대로 이루어지지 못했던 봉만수(이정길)와 오동지(김해숙)는 각각 딸과 아들을 데리고 늦은 나이에 재혼에 성공한다. 어린 자녀뿐 아니라 다 큰 성인 자녀더라도 재혼가정이 헤쳐나가야 할 관문이 많다는 걸 ‘미우나 고우나’는 잘 보여준다. 호적 및 유산 상속 문제, 전처의 제사 문제, 의붓자식에 대한 대우 등등. 사진=KBS홈페이지

 

엄마의 곗돈을 홀랑 사기성 투자와 경마 등으로 날려 버린 대책 없는 백호는 졸지에 생긴 재벌 새아버지 때문에 인생이 피는데, 뭐든 공짜로 얻는 법은 없는 법. 동지와 자신을 눈에 가시같이 보는 만수의 어머니 최 여사(김영옥) 때문에 눈물 흘리는 엄마도 불쌍하고, 자신보다 어리면서 오빠 취급은커녕 마음 한 자락 내주지 않는 봉수아(유인영)도 까칠하고, 기껏 새아버지가 사장으로 있는 봉쥬르식품에 계약직으로 입사하지만 사돈뻘이자 상사인 나단풍(한지혜) 팀장에게 듣는 지청구도 만만치 않다. 

 

‘미우나 고우나’는 강백호가 차츰 성장해가고 사랑을 이루면서 재혼 가정의 편견과 어려움을 극복해가는 과정을 보여준다. 객관적으로 백호는 한심한 ‘무스펙’이지만 요즘 보기 드물게 명랑하고 싹싹한 청년이고, 배운 것은 모자랄지언정 재기 어린 아이디어와 순발력이 뛰어난 편이다. 직장에서의 성공은 물론 나단풍과 결혼 성사, 최 여사의 인정을 받기까지 ‘주인공 버프’가 있긴 하지만 과히 말도 안 된다는 생각이 안 드는 건 강백호라는 인물이 서서히 주변인들에게 정과 신뢰를 쌓는 캐릭터라서 가능했다(이름부터 ‘슬램덩크’의 강백호랑 같잖아!)

 

주인공인 백호와 단풍을 연기한 김지석과 한지혜의 통통 튀는 연기가 돋보였다. 특히 김지석은 이 작품으로 첫 주연을 맡았는데 건강하고 넉살 좋은 강백호를 훌륭히 소화해 그해 KBS연기대상에서 신인상을 수상했다. 한지혜 또한 귀여운 철부지 새댁을 연기한 ‘낭랑18세’에 이어 한층 성숙한 똑부러진 새댁 단풍을 연기하며 사랑을 받았다. 사진=KBS홈페이지

 

겹사돈 문제, 경영권을 두고 벌어지는 알력, 절정의 순간 뇌출혈로 쓰러지며 고조시키는 긴장 등 어디서 많이 본 고리타분한 설정들이 훑고 지나가지만 ‘미우나 고우나’는 KBS1 일일 드라마답게 극악의 막장으로 치닫지는 않는다. 부잣집 외동딸로 자라 안하무인 천방지축인 봉수아도 어처구니없는 행동을 일삼긴 해도 천성이 악한 인물은 아니고, 성공을 위해 오랫동안 사귄 여자친구 황지영(이영은)을 버리고 봉수아를 선택한 단풍의 오빠 나선재(조동혁)도 비자금 조성 및 뇌물수수 등의 비리를 저지르지만 선은 지킨다. 아마 여타 막장 드라마였다면 선재의 비리를 알고 쓰러진 봉만수를, 선재가 결코 그냥 두진 않았을 거다. 최소한 호흡기를 떼려는 시도 정도는 했을 거라고.

 

부잣집 외동딸로 자라 철이라곤 전혀 없는 봉수아(유인영). 나선재(조동혁)에게 반해 적극적인 구애 끝에 결혼하지만 청렴결백한 공무원 집안 며느리로 살기란 그녀에게 무척 어려운 일이다. 그럼에도 여리고 어린애 같은 구석이 많아 차마 미워할 수 없는 캐릭터. 사진=KBS홈페이지

 

해피엔딩이 기본값인 일일 드라마답게 ‘미우나 고우나’ 또한 마지막은 해피엔딩의 연속이다. 성공의 욕심으로 봉쥬르식품을 위기로 몰고 갔던 나선재는 몰락한 뒤 철저한 반성 후에 자수하여 새 사람이 되고, 백호는 단풍과 알콩달콩 결혼생활을 이어가면서 능력도 인정받아 기획본부장이 되고, 백호와 백호 엄마 동지를 미워하던 최 여사 또한 그들은 인정하고 받아들이며 진정한 한 가족이 된다. 물론 여기에는 급한 해피엔딩을 위해 ‘알고 보니 백호가 만수의 친아들이더라’라는 굳이 하지 않아도 좋았을 설정을 더하긴 하지만 최 여사 또한 백호가 친손자라는 사실을 알기 전에 그가 괜찮은 사람이라는 걸 인정하니까 뭐. 

 

지금도 ‘미우나 고우나’가 가끔 생각나는 건, 그처럼 따스하고 상식적인 인물들을 요즘은 보기 힘들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악역인 선재와 제 핏줄 외에 다른 사람은 중요치 않은 최 여사가 거슬리긴 했지만 대체로 ‘미우나 고우나’의 인물들은 성실하고 상식적이고 따스하다.

 

선재와 단풍의 부모인 이종순(김혜옥)과 나기태(강인덕) 차관. 아내 이종순은 속물적이지만 귀여운 구석이 있는 현실적인 어머니, 나기태는 보기 드문 강직한 공무원으로 존경받는 아버지의 모습을 보여준다. 그나저나 이런 아버지 밑에서 어떻게 선재는 그런 과오를 저지르게 된 거지. 사진=KBS홈페이지

 

평강공주처럼 강백호의 성장을 인도하는 ‘똑순이’ 나단풍은 보기 드물게 프로페셔널한 직장인의 모습을 보여주고, 뒤늦게 사랑을 확인하며 자식들과 한 가족으로 거듭나려 애쓰는 봉만수 사장과 오동지 여사도 자기 철학이 확실한 인물들이다. 건설교통부 차관으로 근무하며 청렴결백한 공무원의 상징으로 등장하는 선재와 단풍의 아빠 나기태(강인덕)는 ‘저런 사람들만 고위 공무원 해야 할 텐데’ 싶을 정도로 믿음직하고, 살짝 고구마스러운 모습도 보이지만 황지영도 줏대 있고 단단한 여성의 모습을 보여준다.

 

무엇보다 특출난 능력이나 가진 것은 없어도 특유의 낙천전 성격으로 어려움을 극복해가는 대기만성형 인물인 강백호를 연기한 배우 김지석이 그 특유의 능글맞음과 밝음으로 적절한 선을 지켜서 좋았다.

 

넉살 좋은 돌쇠 같은 강백호와 그를 영리하게 인도하는 나단풍 커플. 특히 나단풍은 회사에서는 최연소 팀장을 다는 능력 있는 여성이면서 집안에서도 웃는 얼굴로 문제들을 차분히 헤쳐 나가는 현명한 모습을 보이며 아들 가진 부모라면 누구나 탐낼 만한 ‘똑순이’였다. 사진=KBS홈페이지

 

일상의 소소한 것들이 실은 굉장히 행복을 줄 수 있는 것들이란 걸 깨닫는 코로나 시대에, 특별할 건 없지만 자극적이지 않고 따스한 집밥 같은 ‘미우나 고우나’가 그리워진다. 어쩌면 올바른 마음씨를 가지고 열심히 노력하면 결국 세상이 알아주는 진리(?)가 통하는 세상이 그리운 건지도. 

 

필자 정수진은? 

영화와 여행이 좋아 ‘무비위크’ ‘KTX매거진’ 등을 거쳤지만 변함없는 애정의 대상은 드라마였다. 드라마 홈페이지의 인물 소개 읽는 것이 취미로, 마감 때마다 옛날 드라마에 꽂히는 바람에 망하는 마감 인생을 12년간 보냈다. 최근에는 신대륙을 탐험하는 모험가처럼 유튜브 이곳저곳을 기웃거리는 중.​ 

정수진 대중문화 칼럼니스트 writer@bizhankook.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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