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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업의 흥망] 정치와 자동차, 회장님 야망이 화근 된 쌍용그룹

자동차사업 무리한 진출로 인해 전 계열사 위기…그 와중에 국회의원 출마까지

2020.08.26(Wed) 18:52:42

[비즈한국] 현재 뿔뿔이 흩어진 ‘쌍용’은 한때 재계 5위, 매출 25조를 기록한 재벌그룹이었다. 쌍용양회, 쌍용건설, 남광토건, 쌍용전기 등 많은 계열사들이 한 뿌리에서 시작했지만, 지금은 모두 주인을 잃고 청산·매각돼 각자 다른 길을 걷고 있다. 

몰락의 원인으로는 그룹의 총수였던 김석원 쌍용그룹 회장이 지목된다. 김석원 회장은 무리하게 자동차사업에 진출해 그룹을 위험에 빠뜨렸으며, 그룹이 위기를 겪는 와중에도 국회의원에 출마해 논란에 휩싸이기도 했다.

#1939년 비누공장으로 시작해 국회의원까지
 
​쌍용그룹의 역사는 ​1939년 김성곤 쌍용그룹 창업주가 비누공장인 삼공유지합자회사를 설립하면서 시작됐다. 이어 1947년 토목과 건축을 다루는 남광토건, 1948년 금성방직을 통해 면방직 사업에도 진출한다. 1962년에는 시멘트 사업을 영위하는 쌍용양회를 설립하며 ‘쌍용’ 명칭을 사용했다. ​쌍용양회는 2년 후인 1964년 시멘트를 연간 40만 톤 생산해 우리나라 시멘트 시장의 선두가 됐고, 쌍용은 이후 제지업과 정유업 등 여러 사업에 진출하며 그룹의 면모를 갖췄다.

창업주 김성곤 회장은 1952년 동양통신을 창간하고 1953년 연합신문을 인수해 언론 활동도 했으며 육영사업에도 관심이 많아 1959년에는 국민대학교를 인수했다. 

1973년 9월 4일 ​김성곤 쌍용그룹 회장이 ​대한상공회의소 제8대 회장으로 취임해 취임인사를 하고 있다. 사진=연합뉴스


김성곤 회장은 정치에도 관심을 가져, 6·7·​8대 국회의원을 역임했다. 또 ​박정희 전 대통령의 셋째 형인 박상희와 ​학창시절 ​절친해 박정희 전 대통령과도 친분이 있었다. 김 회장은 박정희의 3선 개헌을 성사시키는 주역 4인방으로 활동했다. 

그러나 1971년 10월 오치성 내무부장관 해임안을 통과시킨 ​이른바 10·​2 항명으로 ​김 회장은 정치생활에 위기를 맞게 된다. 박정희 대통령은 자신의 뜻을 따르지 않은 김성곤 회장에게 크게 분노한다. 김 회장은 이후 중앙정보부에 연행돼 콧수염을 모두 뜯기고 구타를 당하는 수모를 겪으며 정치생활을 마감했다.

이후로도 김성곤 회장은 대한상공회의소 8대 회장, 대한양회 인수, 한국신문연구소 회장 등의 활동을 이어나가다가 1975년 유명을 달리했다. 죽음을 앞둔 ​김성곤 회장은 장남 김석원에게 쌍용그룹을 맡기며 “절대로 정치에 진출하지 말라”는 유언을 남겼다.

#김석원 회장 자동차 사업 진출이 그룹 몰락 재촉

31세의 젊은 나이에 그룹을 물려받은 ​김석원 회장은 공격적인 사업 확장을 시도했다. ​1976년 쌍용중공업을 만들고 이란국영석유공사와 합작해 ‘쌍용정유'를 세웠다. 이듬해 쌍용종합건설을 창업했고, 1983년에는 효성증권을 인수했다.

김석원 회장은 1980년 쌍용양회 동해공장을 연산 560만 톤 규모로 증설했을 뿐만 아니라, 그해 쌍용정유의 이란국영석유공사 지분을 모두 인수하며 사업다각화를 성공적으로 이뤄냈다. 1995년 쌍용그룹 매출은 1974년의 192배인 15조 5240억 원을 달성했다고 한다.
 
쌍용그룹은 1997년 외환위기 직전 총매출 25조 원, 재계 순위 7위의 재벌기업으로 자리 잡았다. 젊은 나이에 그룹 회장 자리에 올라 주변의 우려를 샀던 ​김석원 회장은 ​세간의 예측이 무색할 만큼 성장을 이끌었다.

김석원 회장은 1986년 ​자동차 사업에 진출한다. ​동아자동차를 인수해 쌍용자동차로 사명을 변경한 뒤 매년 30만 대의 자동차를 생산하겠다는 꿈을 꾸었다. 하지만 무리한 투자로 인해 쌍용자동차의 사세는 위축되기 시작했다. 현대자동차, 대우자동차, 기아자동차 등이 만든 준중형 자동차가 인기를 끌었기 때문이다. 

그룹 내부에서는 쌍용자동차를 포기해야 한다는 의견이 대세였지만, 김 회장은 이를 무시하고 자신의 뜻에 반대하는 임직원을 해고하기에 이르렀다. 오히려 포기 대신 과감한 투자를 밀어붙였다. 

김 회장은 그룹이 보유한 용평리조트 등을 은행에 담보로 맡기고 돈을 빌려 쌍용자동차에 투자했다. 1990년대 중반 쌍용그룹 자산의 대부분이 은행 담보로 잡혔다. 하지만 1992년 쌍용자동차의 내수시장 점유율은 1.6%에 불과했다. 심지어 계속 하락세를 보였지만 김 회장은 1995년부터 4년 동안 3조 원의 투자를 강행했다.

1997년 12월 8일 ​대우그룹의 쌍용자동차 인수를 발표한 김태구 ​대우자동차 ​회장(오른쪽)과 김덕환 ​쌍용그룹 종합조정실 사장. 사진=연합뉴스


김석원 회장은 결국 쌍용자동차가 그룹 전체를 위기로 몰아간다고 판단해 매각을 시도했다. 당시 자동차 사업에 진출하려던 삼성그룹, 대우그룹에 협상을 진행했지만 매각은 쉽지 않았고, 은행에 수조 원의 빚을 갚아야 했던 김 회장은 판단력을 잃게 된다. 결국 채권단이 김 회장 대신 매각 작업을 ​진행했고, 1998년 1월 쌍용자동차는 대우그룹 품에 안기게 된다.

쌍용자동차로 인해 쌍용그룹은 1조 7665억 원의 빚을 안았다. 이 빚은 결국 그룹을 해체의 길로 이끌고 만다.

#절대 정치 하지 말라던 아버지 유언 잊고…

한편 김석원 회장은 절대로 정치에 입문하지 말라던 창업주 ​김성곤 ​회장의 유언을 무시한 채 1996년 15대 국회의원 선거에 출마에 당선되어 정치에 입문한다. 쌍용자동차로 인해 쌍용그룹 전체가 힘들던 시기였다. 

국회로 떠난 ​김석원 회장은 쌍용그룹 회장 자리를 동생 김석준 회장에게 넘긴다. 그러다 1997년 외환위기가 닥치자 국회의원직을 내려놓고 2년 만에 그룹 총회장 자리로 복귀한다.​

김석원 전 쌍용그룹 회장이 1995년 4월 4일 민자당 입당기자회견을 하고 있다. 사진=비즈한국 DB


하지만 국내외 채권단들은 김석원 회장의 자질을 문제 삼아 경영권을 박탈하고 쌍용그룹의 구조조정을 진행했다. 쌍용양회는 일본태평양시멘트에 매각됐으며, 남광토건은 대한전선에 인수되었다가 2016년 중소 건설업체인 세운건설에 인수됐다. 대부분 계열사들도 인수·합병·​매각되며 쌍용그룹은 해체된다.

쌍용그룹 구조조정의 와중에 김석원 전 회장은 회사 자산 310억 원을 빼돌린 혐의로 2004년 구속되어 징역 3년에 집행유예 4년을 선고받았다. 이후 2007년 특별사면 됐다. 그 뒤로도 2007년 부인 박문순 성곡미술관장 자택에서 현금 60억 원이 발견되면서 신정아 게이트에 연루되었고, 2011년에는 쌍용양회 자금 1271억 원을 위장계열사 4곳에 지원한 혐의로 징역 2년 6월에 집행유예 4년을 선고받았다. 

김석준 쌍용건설 회장이 2010년 3월 24일 기자간담회에서 4년 만에 대표이사로 복귀하게 된 배경과 각오를 밝히고 있다. 사진=연합뉴스


김석원 전 회장의 장남인 김지용 씨는 현재 국민대 이사장을 맡고 있으며 차남 김지강 씨는 2011년 자택에서 목숨을 끊었다. 2년간 그룹 회장을 역임했던 김석준 전 회장은 채권단에게 경영능력을 인정받아 현재 쌍용건설 대표이사로 남아 있다. 

정동민 기자 workhard@bizhankook.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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