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즈한국] 이 집은 몇 가지 전설이 있다. 노가리를 처음으로 이 골목에서 판 것, 당시 오비맥주에서 공급한 1천 시시짜리 잔이 여럿 보관되어 있는 것, 30년 넘은 단골이 수두룩한 것, 낮 12시가 넘으면 손님이 찾아오는, 아마도 전국에서 가장 빨리 문을 여는 생맥주 전문점이라는 것. -책 ‘노포의 장사법’에서
‘글 쓰는 요리사’ 박찬일 셰프는 을지OB베어에 대해 이렇게 썼다. 박 셰프가 책에서 꼽은 100여 곳의 노포 가운데 음식점이 아닌 가게는 팔판정육점과 을지OB베어뿐이다.
중소기업벤처부가 선정한 백년가게, 서울시가 지정한 미래유산 등 화려한 수식어를 가진 데 비해 을지OB베어의 외양은 소박하다. 13㎡(약 4평) 남짓한 규모와 단출한 메뉴. 30년 단골인 60대와 레트로 감성 사진을 찍기 위해 찾아온 20대가 나란히 앉아 생맥주에 노가리를 먹는 흔치 않은 광경이 펼쳐지는 곳이다. 그러나 이런 모습을 더는 볼 수 없을지 모른다. 을지OB베어가 문닫을 위기에 처했기 때문이다.
#을지로의 저녁, 40년 자리 지킨 생맥주 한 잔
8월 14일 금요일 늦은 오후, 을지로 노가리골목은 늘 그렇듯 활기찼다. 이른 저녁부터 금요일의 생맥주 한 잔을 즐기기 위해 골목을 찾은 이들로 북적였다.
오후 5시 50분, 이미 을지OB베어는 손님으로 꽉 차 있었다. 오늘 꼭 여기서 마셔야 한다는 생각에 언제쯤 자리가 날지 묻자 강호신 사장은 미안한 기색을 비치며 확답을 줄 수 없다고 말했다. 가게 앞 노상(路上) 음주는 6시 30분부터 가능하다는 게 골목 전체의 룰이었다.
아쉬운 대로 을지OB베어 바로 맞은 편의 뮌헨호프로 갔다. 가게마다 판매하는 노가리는 가격이 1000원으로 같다. 7시가 넘어가자 가게 앞 노상 테이블까지 사람들로 가득 찼다. 중장년층 넥타이부대, 20~30대 직장인, 대학생 등으로 붐비는 테이블 사이로 아르바이트생들이 한 손에 맥주 두 잔씩 들고 오갔다.
골목 풍경은 계속 바뀌었지만 을지OB베어는 1980년 12월 문을 연 뒤 2대째 같은 자리를 지키고 있다. 지금은 창업주 강효근 씨의 딸 강호신 사장이 디스펜서 앞에서 맥주를 따른다. 강 사장의 대학생 아들은 가게에서 아르바이트를 한다.
이날 친구들과 을지OB베어를 찾은 이 아무개 씨(24)는 “레트로 감성이 좋아 자주 온다. 우리 세대가 공유하는 추억은 아니지만 여기 오면 편안함을 느낀다. 근처 가게들이 비슷한 메뉴를 팔지만 꼭 을지OB베어를 찾는 이유”라고 말했다.
#낮, 을지OB베어가 유지하는 원칙들
8월 19일, 을지로 노가리골목의 낮을 보기 위해 다시 찾았다. 일주일이 채 지나지 않았지만 그사이 코로나19는 다시 일상을 균열 내고 있었다. 방금 막 소독한 탓에 거리엔 회색 연기가 뿌옇게 내려앉았다. 오후 3시에 찾은 을지OB베어 가게 내부에는 이미 낮술 손님 2팀이 있었다. 나이가 지긋한 손님 2명 한 팀과 30대 직장인으로 보이는 손님 2명 한 팀. 자리 앞 생맥주 한 잔씩과 가운데 노가리 한 접시는 같았다.
강호신 사장은 생맥주를 따르는 디스펜서 앞을 떠나지 않았다. 아흔넷의 창업주 강효근 씨가 정정하기 때문에 을지OB베어의 원칙은 지금까지 유지되고 있다. 가게를 넓히지 않고 지금 위치를 유지하는 것, 노가리 가격 1000원을 지키는 것, 외국인 종업원이 아닌 대학생 아르바이트생을 고용하는 것, 안주 개수를 무리해서 늘리지 않고 냉장 숙성된 맥주 맛을 알 수 있을 정도만 유지하는 것, 열 시 반부터 주문을 받지 않고 열한 시에 문을 닫는 것까지.
인터뷰를 부탁하자 강호신 사장은 생맥주 한 잔을 내주며 남편인 최수영 대표를 소개했다. 맥주 케그(통)를 보관하는 냉장고가 있는 가게 뒷공간에 테이블과 의자를 펼쳐 자리를 잡았다. 인터뷰 내내 강 사장은 가게 뒤 공간을 들락거렸다. 케그를 가게 안의 냉장고로 옮기기 위해서다. 맥주 케그를 잠깐도 상온에 노출하지 않는 게 맥주 맛의 비결이다.
최 대표는 “코로나19가 다시 유행하면서 가게 소독과 QR코드 기록 등 여러 부분을 신경 쓰고 있다. 재계약 불가 문제로 몇 년간 시달리다 보니 코로나19처럼 내가 어쩔 수 없는 위기는 아무렇지 않아졌다”고 말했다.
노가리골목의 절반은 수표도시환경정비사업에 포함돼 사라질 위기에 처했다. 을지OB베어 맞은편 뮌헨호프가 세 든 건물도 철거 예정이다. 수표도시환경정비사업은 청계천변 남측 수표동 일대를 재개발하는 도시재생사업이다. 을지면옥 등 오래된 가게가 사업 지역에 포함돼 논란이 일기도 했다.
이 와중에 을지OB베어 바로 옆에 위치한 ○○호프는 공격적으로 점포를 확장하고 있다. 노가리골목 일대에만 점포가 8개다. 석 달 전 골목 끝자락 빠삐용호프를 인수했고, 그 뒷편 에이스호프도 인수할 계획이다. 을지OB베어의 재계약을 막고 그 자리를 계약한 것도 ○○호프다. 올해 3월에는 을지OB베어가 자리한 건물의 지분 일부를 인수하는 가등기를 설정했다.
#이제 곧 40주년, 을지OB베어는 지금
을지OB베어는 2018년부터 건물 임대계약 연장을 놓고 건물주와 소송을 벌이고 있다. 2013년 건물주와 5년 재계약을 했는데 계약 만료를 두 달 앞둔 2018년, 재계약 불가 통보를 받았다. 2018년 9월 명도소송 이후 2심까지 패소해 상고를 접수한 상황이다. 현행 상가건물임대차보호법의 보호를 받을 수 없어 법적으로 불리하다.
최수영 대표는 “서울시장이 왔다 가도, 여당·야당 정치인이 왔다 가도 실질적인 도움을 주진 않았다. 백년가게로 선정돼도, 미래유산으로 지정돼도 변한 건 없었다. 재개발 재건축 지역에서 오래 장사한 세입자가 쫓겨나는 건 을지OB베어만의 문제가 아니다”라고 말했다.
8월 12일 을지OB베어 앞에서 ‘을지오비베어와 노가리골목의 상생을 위한 공동대책위(공대위)’ 출범식이 열렸다. 공대위는 을지OB베어가 처한 상황이 골목 재개발 문제와 밀접하게 연결돼 있다고 말했다. 최 대표는 “골목 점포들은 세운재정비촉진지구사업으로 월세 인상의 위기를 한 차례 겪은 것도 모자라, 수표도시환경정비사업으로 상점 대부분이 사라질 상황에 놓였다. 이 과정에서 건물주는 막대한 이익을 얻게 되고 골목은 사실상 특정 점포만의 거리가 될 것”이라고 말했다.
올해 12월 6일은 을지OB베어 40주년이다. 최 대표는 “코로나19 영향도 있고 재계약 문제가 어떻게 될지 몰라 올해 행사는 좀 미리 할 계획”이라고 웃으며 말했다. 더불어민주당 중구성동을지역 노동위원회, 맘편히장사하고픈상인모임, 민생경제연구소, 서울교통공사노동조합, 진보당 종로중구지역위원회, 촛불교회 등 정치계, 시민사회계, 종교계까지 참여한 공대위는 보도자료 마지막 문단에 이렇게 썼다.
“시간이 흐르면서 도시의 변화는 필요할 수 있다. 그에 따른 정비사업도 할 수 있다. 하지만 이 과정에서 고려되는 사람은 도시의 토지나 건물을 ‘소유’한 이들뿐, 실질적으로 도시를 가꾸고 만들어낸 주거·상가 세입자들은 고려조차 되지 않은 채 내몰리고 있다. 불합리한 현실이지만 수십 년간 바뀌지 않은 이 현실은 재개발·재건축 사업에 있어 일종의 철칙이 됐다. 이 철칙은 지금 노가리골목에도 동일하게 작용하고 있다.”
김보현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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