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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쓸비법] 서면 계약서가 '을'은 물론 '갑'에게도 중요한 이유

'계약서=권리'라는 법인식…회의록이나 회의 명단에 서명받는 것도 방법

2020.04.28(Tue) 10:21:20

[비즈한국] 기업들은 때론 돈만 가지고는 설명하기 어려운 결정을 한다. 그 속에 숨어 있는 법이나 제도를 알면 더욱 자세한 내막을 이해할 수 있다. 새로 시작하는 ‘아두면 모 있는 즈니스 률’은 비즈니스 흐름의 이해를 돕는 실마리를 소개한다.

 

간혹 변호사들이 보수조건을 구두로만 논의한 채 위임계약서 없이 업무에 착수하는 경우가 있다. 지인으로부터 부탁을 받거나 신속한 업무처리가 중요한 사건에서 위임계약서가 없다는 이유로 업무를 거절하는 것은 매정해 보이므로, ‘추후 위임계약서를 전달해 주겠다’는 의뢰인의 말만 믿고 일단 업무에 착수하는 사례다. 

 

이런 경우에는 사건이 예상보다 일찍 끝나 당초 논의된 조건대로 보수를 청구하기가 애매해지는 문제가 어김없이 발생한다. 그러나 변호사가 위임계약서도 없이 업무를 처리하다가 보수를 제대로 받지 못했다는 것이 알려지면 그 변호사의 평판에 좋을 것이 없으므로, 대부분 혼자 끙끙대다가 보수를 포기해 버리게 된다.

 

변호사도 이러한 일을 겪는데 갑을관계에서는 이러한 일이 얼마나 많았을까하는 생각이 든다. 민법상 계약은 계약서를 작성하지 않아도 성립한다. 즉 당사자 간 의사표시의 합치(합의)에 의해 성립하고, 반드시 계약서 작성과 같은 절차나 방식이 필요하지 않다. 그러나 이러한 일반적인 법리만 믿고 계약서 없이 일을 진행할 경우 틀림없이 계약의 존재나 조건을 입증할 수 없는 문제를 겪게 된다.

 

일반적인 법리만 믿고 계약서 없이 일을 진행할 경우 틀림없이 계약의 존재나 조건을 입증할 수 없는 문제를 겪게 된다.


이러한 취지에서 하도급법과 대규모유통업법은 사전에 원사업자 또는 대규모유통업자가 계약서 등을 발급하지 않으면 행정상 제재를 부과하는 조항을 규정하고 있다. 공정위는 ‘원사업자가 제조 등의 위탁을 하는 경우 수급사업자에게 서면을 사전에 발급하도록 하는 것은 수급사업자가 서면을 발급받지 못할 경우 거래 과정에서 자신의 권리를 보장받지 못할 우려가 있을 뿐만 아니라, 향후 분쟁 발생 시 소송 등 사후적 권리구제를 실현하는 것을 어렵게 할 우려가 있으므로 사전에 이를 방지하기 위한 취지’라고 설명한 바 있다(2010. 5. 6. 의결 제2010-053호).

 

서면 발급의 중요성은 다음과 같은 사례에서 극명하게 나타난다. 판례는 수급사업자가 추가공사를 했다 하더라도 원사업자와 사전합의가 없었던 이상 수급사업자는 공사비 증가분을 당연히 공사대금으로 청구할 수 있는 것은 아니라는 입장이다(대법원 95다38066, 38073). 때문에 수급사업자가 원사업자의 현장 소장으로부터 구두로 공사가 끝나면 공사비를 보전받기로 약속받았다고 하더라도, 그 현장 소장이 ‘실행예산이 부족하다’, ‘발주자로부터 추가공사를 인정받지 못했다’는 등의 핑계를 대며 추가공사비 약정을 부인하면 추가공사비를 받기가 막막해진다.

 

서면 발급뿐 아니라 서면에 기재된 내용도 중요하다. 하도급법은 원사업자가 수급사업자에게 발급하는 서면에 당사자들의 기명날인이 있어야 하고, 법령에서 정한 내용이 모두 기재되어야 한다고 규정하고 있다. 만약 기명날인이나 법정 기재사항이 누락됐다면 서면 하도급법에 위반된다. 예를 들어 공정위는 원사업자가 수급사업자에게 레미콘 제작을 위탁하면서 ‘레미콘 반입 요청서’를 교부한 사례에서 요청서에 당사자들의 기명날인이 누락되었다는 이유로 위법하다고 판단했다(공정위 2009. 6. 23. 의결 제2009-165호).

 

하도급법과 대규모유통업법은 사전에 원사업자 또는 대규모유통업자가 계약서 등을 발급하지 않으면 행정상 제재를 부과하는 조항을 규정하고 있다. 2014년 제2롯데월드 공사현장 사진으로 기사의 특정 내용과 관련없다. 사진=임준선 기자


공정위 고시는 경미하고 빈번한 추가 작업으로 인해 물량변동이 명백히 예상되는 공종에 대해 시공 완료 후 즉시 정산합의서로 계약서를 대체한 경우에는 적법한 서면발급으로 본다고 규정하고 있다. 이는 일반적으로 건설공사는 최초 실시설계가 유지되는 경우가 거의 없고 추가·변경공사가 이루어지는 것이 일반적임을 반영한 조항이다. ​

 

그러나 공정위 고시는 다른 조항에서 ‘시공과정에서 추가 또는 변경된 공사 물량이 입증되었으나 당사자 간 정산에 다툼이 있어 변경계약서 또는 정산서를 발급하지 않은 경우는 원사업자가 구체적으로 적시하지 않은 책임이 있는 것으로 보아 서면 미발급으로 본다’고 규정하고 있다. 공사가 잘 끝나 원사업자와 수급사업자 간에 정산 합의가 완료됐다면, 분쟁 자체가 발생할 일이 없을 것이다. 따라서 일반적인 분쟁사례에서는 틀림없이 정산내역이나 금액에 다툼이 있다고 봐야 한다. 이러한 상황에서 원사업자가 서면을 발급하지 않았을 경우 위 조항에 따라 하도급법 위반이 인정된다.

 

과거에는 법 위반행위로서 서면 미발급만이 문제 됐다면 공정위가 경고만을 부과해 사건을 종결시키는 경우가 많았다. 그러나 최근에는 계약의 존재 자체를 불분명하게 만드는 서면 미발급이 하도급 분쟁의 근본 원인이 된다거나, 하도급법상 부당 특약보다 법 위반의 정도가 중대하다는 인식이 있어 시정명령이 부과되는 사례가 많다. 사안이 중대하면 과징금까지 부과되는 사례도 있다.

 

서면 발급의 중요성이 강조되고 있는 최근 분위기상 법 위반에 대한 제재 수위가 낮아질 가능성은 크지 않아 보인다. 제2롯데월드 공사현장 사진으로 기사의 특정 내용과 관련없다. 사진=임준선 기자


종합건설사 등 원사업자는 △실시설계가 자주 변경되는 건설공사의 특성상 서면 발급을 강제할 경우 추가·변경공사를 제때 진행할 수 없게 되고 △현장 소장에게 서면 발급에 필요한 모든 권한을 위임할 경우 현장 소장의 비행을 관리하는 것이 불가능해진다는 등의 이유로 서면 미발급에 대한 제재를 부담스러워하는 경우가 많다. 

 

그러나 서면 발급의 중요성이 강조되고 있는 최근 분위기상 법 위반에 대한 제재 수위가 낮아질 가능성은 크지 않아 보인다. 따라서 △현장 회의 시 회의록에 수급사업자 관계자의 서명을 받거나 △발주자와의 회의에 수급사업자를 배석시키고 회의 명단에 서명을 받는 등 계약서 등에 갈음해 수급사업자와의 협의 사실을 입증할 자료를 확보하는 노력이 필요해 보인다.

 

대규모유통업자와 납품업자간의 거래도 상황은 비슷하다. 대규모유통업법은 대규모유통업자가 납품업자 등과 납품 거래 등을 하는 경우 대통령령이 정하는 계약사항이 명시된 서면을 교부하여야 한다고 규정하고 있다. 이에 대한 규제 역시 강화되고 있다. 가령 서울고법은 홈쇼핑사업자가 재방송·​순환방송을 하더라도 납품업자에게 별도로 서면을 교부하지 않은 것은 위법하다고 본 공정위의 판단을 수긍했다(2015누50353). 또 설령 방송일 직전 서면을 교부하였다고 하더라도 여기에 납품업자의 서명을 받지 않았다면 위법하다고 본 공정의 판단도 받아들였다(2015누49308).

 

원사업자 등의 입장에서 서면 발급을 강조하는 최근의 정책은 기존의 관행과 달라 당혹스러운 면이 있다. 그러나 계약서 한 장 없이 수 억, 수십 억 원의 거래가 이루어졌던 과거 관행은 더 이상 유지될 수 없는 관행이다. 그리고 서면 발급 의무는 하도급법상 다른 의무와 달리, 서면 미발급이라는 사실 그 자체만으로 법 위반이 인정되고, 사후적으로 이를 정당화할 방법도 마땅치 않으므로 기존의 관행을 개선하는 노력이 필요해 보인다.​ 

정양훈 법무 writer@bizhankook.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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