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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춘욱 경제팩트] 베네수엘라 '초인플레'는 남 일이 아니다?

재정적자 늘면서 초인플레 시작…한국은 재정 '너무 건전' 되레 디플레이션 위험

2019.05.07(Tue) 09:40:48

[비즈한국] 조금이라도 시간 남을 때에는 되도록 책을 보려 노력하지만, 여건이 뒷받침되지 않을 때에는 종종 동영상 강의를 시청하고는 한다. 유튜브 등의 플랫폼은 필자가 좋아할 만한 ‘추천’ 동영상을 제시하는데 ‘초인플레이션(혹은 하이퍼 인플레이션)’의 위험을 경고하는 내용을 담은 동영상을 종종 접한다. 몇 편 보지는 못했지만, 이 주장을 펼치는 사람들은 “한국에서 초인플레이션의 위험이 높아졌으니 금을 비롯한 실물자산의 비중을 높여야 한다”는 결론을 내리는 듯하다.

 

올 3월 10일, 베네수엘라의 식료품 노점상이 정전으로 인해 직불카드로 결제할 수 없다고 말하고 있다. 직불카드는 인플레이션 때문에 가장 널리 쓰이는 결제 수단이다. 사진=AP/연합뉴스

 

최근 베네수엘라의 사례에서 보듯, 초인플레이션이 발생하는 순간 경제에 심대한 충격이 발생하니 이런 종류의 동영상에 쏠리는 관심은 어떻게 보면 당연하다고 볼 수 있다. 그러나 세계적인 경제학자 제프리 삭스 교수는 명저 ‘빈곤의 종말’을 통해 초인플레이션이 적어도 민주적인 정부를 가진 선진국에서는 발생하기 쉽지 않다는 사실을 사례를 통해 조목조목 일러준다. 

 

나는 1923년 독일을 비롯한 몇몇 나라의 초인플레이션 사례를 연구한 바 있다. (중략)  그러나 역사책에 기록된 내용들이 아니라 실제로 초인플레이션이 일어나고 있는 현장을 만나게 되리라고는 꿈에도 몰랐다. 카를로스 이투랄드라는 하버드에 유학 와 있는 볼리비아의 친구를 만나기 전까지는. (중략)

 

나는 이론적 기초는 알고 있었다. 1985년 당시 볼리비아 정부는 거대한 재정적자를 메우기 위해 돈을 마구 찍어내고 있었다. (중략) 볼리비아 정부가 군대와 광부 교사들에게 지급할 현금을 얻기 위해 볼리비아중앙은행(BCB)에 직접 채권을 매각해야 했다(국채를 발행하는 즉시 중앙은행이 인수하는 것). 이런 점에서 볼리비아의 초인플레이션은 인류 경제사의 다른 사례들과 별로 차이가 없었다. -책 139쪽

 

자료=IMF


28세의 나이로 하버드대학 종신 교수 자리를 얻고 강의에 전념하는 중인데, 볼리비아의 초인플레이션을 해결하는 과제가 주어진 것이다. 

 

그가 강의 시간에 초인플레이션에 대한 비밀이 모두 해결되었다는 식으로 이야기하자, 볼리비아에서 유학 온 학생이 “그렇게 잘 알면 우리나라 문제도 해결해달라”고 이야기한 게 제프리 삭스 교수를 ‘현실’의 경제학자로 변모시킨 첫 걸음이었다고 한다.

 

2만 4000퍼센트나 되는 인플레가 갑자기 종결될 것이라고 직관적으로 떠올리기 어렵지만, 역사적으로 초인플레이션은 완만히 떨어지는 게 아니라 급격히 중단되어 왔다. (중략) 무엇보다 볼리비아 정부가 적자 보전을 위해 중앙은행에 의존하는 상황에서 신속하게 벗어나게 해줄 일괄적 재정조치를 탐색했다.

 

볼리비아인 동료들과 토론한 결과, 볼리비아 예산의 핵심이 석유가격에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볼리비아 정부는 유류세에 재정의 대부분을 의존하고 있었으며, 정부는 석유가격을 몇 개월마다 한 번씩 바꾸었는데 이렇게 낮게 유지된 석유가격이 예산을 망가뜨리고 있었다. -책 142쪽

 

크리스틴 라가르드 IMF 총재와 함께 있는 제프리 삭스 하버드대 교수(오른쪽). 사진=jeffsachs.org


환율이 급등하면서 원유도입단가가 상승 중인데, 이걸 제때 반영하지 않으니 대규모 재정적자가 발생하고 이를 화폐 발행으로 메우니 인플레가 생기지 않을 수 없다. 제프리 삭스 교수는 한 차례의 급격한 석유가격 인상과 기타 재정조치 패키지를 제안했고, 이를 볼리비아 정부가 수용한 결과는 놀라웠다. 거짓말처럼 초인플레션이 사라졌기 때문이다.

 

볼리비아에서 초인플레이션이 사라진 이유는 국민의 기대 변화에 있었다. 석유가격 인상 및 기타 재정 패키지를 통해 “정부가 앞으로 세금을 걷어 지출하겠다”는 의지를 밝힌 것이 국민의 기대를 바꿔 놓은 결정적인 계기였던 셈이다.

 

최근 베네수엘라 상황도 1985년 볼리비아와 다를 게 없다. 차베스 정부 시절부터 재정적자가 늘어나 서서히 인플레 압력이 고조되었으며, 특히 GDP 대비 재정적자가 -10%을 넘어선 2014년을 전후해 본격적으로 초인플레가 시작되었기 때문이다.

 

물론 1985년 볼리비아와 달리 최근 베네수엘라의 초인플레이션 문제를 해결하기에는 몇 가지 어려움이 있다. 최근 발생했던 쿠데타(및 실패)에서 보듯, 정치적인 불안정성이 지속되는 한 강력한 재정긴축 정책을 시행에 옮기기 어렵기 때문이다. 1985년에는 볼리비아 정부가 어떤 대가를 치르더라도 초인플레이션을 억제하겠다는 의지를 가지고 있었기에 제프리 삭스 교수의 조언을 받아들여 재정개혁에 나설 수 있었다. 그러나 최근 베네수엘라는 “누가 재정긴축 정책을 시행할 것인가”라는 문제부터 해결되지 않기에 갈 길이 멀어 보인다.

 

이제 마지막으로 한국 사례를 살펴보자. IMF의 세계경제전망에 따르면, 2018년 한국의 GDP 대비 재정수지는 +1.3%다(“General government primary net lending/borrowing” 기준). 참고로 같은 시기 베네수엘라의 GDP 대비 재정수지는 -30.0%다. 또 2018년 소비자물가 상승률은 한국은 1.5%, 베네수엘라는 92만 9790%였다. ​

 

베네수엘라의 소비자물가 상승률과 GDP 대비 재정적자 추이. 자료=IMF

 

한국의 소비자물가 상승률과 GDP 대비 재정적자 추이. 자료=IMF


이상의 비교에서 보듯, 한국이 초인플레이션 위험에 노출되어 있다고 이야기하는 것은 사리에 맞지 않다. 한국은 재정을 너무 건전하게 운용한 나머지, 물가 상승률이 0%를 밑도는 디플레이션의 위험에 노출되어 있다고 봐야 한다. 2019년에는 적절한 재정 및 통화정책이 시행되기를 바라는 마음 간절하다.

홍춘욱 이코노미스트 writer@bizhankook.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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