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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해림 탐식다반사] 강릉에서 1960년대 명동 거리의 낭만을 만나다

뭉툭하게 저민 등심을 간장에 적셔 굽는 독특한 '통일집' 불고기, 알고보니 명동집서 유래

2018.12.11(Tue) 09:59:06

[비즈한국] 지난해 하릴없이 강릉 중앙시장 근처를 어슬렁거리다 우연히 발견한 식당이 있다. 통일집. 1973년 문을 열었다고, 간판에부터 적혀 있다. 연노란색 페인트를 칠한 외관이며 오래된 건물임을 숨기지 못한 엉성한 구조며, 시간을 켜켜이 품고 있는 기색이 역력하다. 

 

그런데랄까, 그래서랄까, 무척 맛이 있어 보이는 기색이었다. 겉으로만 봐도 맛있어 보이는 식당이라는 것이 있는 법이다. 블로그를 뒤져 보니, 아니나 다를까 맛이 있어 보였다. 게다가 독특하기까지 했다. 서울에 없는 음식이다. 꼭 먹어야 할.

 

시간에 쫓기고 휴무에 걸려 허무하게 서울로 돌아오길 몇 번. 얼마 전 드디어 갔다. 간판에서 내세운 등심, 그리고 차돌박이를 먹었다. 집 된장으로 끓인 된장찌개와 소박한 반찬, 집에서 담근 쩡한 맛이 살아 있는 동치미까지 하나하나가 모두 정겨운 맛, 기분 좋은 식사였다. 다른 곳에서 보지 못한 맛이었다. 맛있었다. 하지만 문제는 맛이 아니었다.

 

Since 1973 이라고 써놓지 않아도 개업연도를 맞출 수 있을 것 같은 원숙한 외관. 사진=이해림 제공

 

이 집 등심, 꽤 특이해서 궁금했다. 음식 역사서에 남아 있는 ‘멱적’의 형태와 비슷하다. 고기 조각을 양념에 가볍게 담갔다 굽고, 먹는다. 저 팔판정육점의 이경수 명장에 따르면, 1960년대 후반 육절기가 국내에 수입됐다. 우래옥을 위시한 대중식당들이 종잇장처럼 얇게 저민 소고기를 양념에 재워 자박하게 국물을 둔 불고기를 시작한 시기다.

 

그 이전의 불고기는 정교한 기계 대신 사람의 손끝으로 잘라야 하니까 뭉툭하니 두툼할 수밖에 없었다. 통일집의 등심도 딱 그 뭉툭하게 저며 낸 형태다. 그 고깃조각을 집어 한방 재료를 듬뿍 넣어 발효된 간장 양념에 슬쩍 담갔다가 불구멍을 듬성듬성 막은 2중 구조의 불판에 굽는다. 독특하고, 맛있다. 강릉에서 개업과 동시에 인기 식당이 되어 유력가들이 단골 삼고 있다고 한다.

 

단지 ‘내가 이렇게 멱적 체험을 했나 보다’ 했는데 알고 보면 그보다 더 압도적인 일을 겪고 온 것이었다. 서울로 돌아온 후 사장 여건성 씨를 전화선 너머로 붙들고 그 독특한 불고기 형태의 연원을 물었더니 나온 것이 웬걸, 1960년대의 명동 풍경이다.

 

한국의 비공식 국보 중 하나인 패션 디자이너 노라 노의 양장점이 명동성당 옆 골목에 있었다. ‘명동 공원’도 있었던 시절이다. 노라 노를 앞에 두고 어깨를 맞댄 두 식당은 소고기 구이를 파는 명동집과 곱창을 파는 명월관. 여건성 씨는 1973년 강릉으로 내려오기 전 이 두 식당에서 직원으로 일을 했다. 그때 그는 20대 청년이었다.

 

명동집은 불고기가 전문. 뭇 불고기들과는 그러나 다른 형태였다. 한국인 남편과 일본인 아내가 경영하던 이 식당은 일본식 간장 양념에 소고기를 담갔다가 구워 먹는 것이 특징. 그렇게 구운 고기를 누군 소금에도 찍어 먹고, 누군 달걀 노른자에도 찍어 먹었다고 하니 스키야키와도 근연한다. 당시 서울에서도 독특한 불고기였을 것이다.

 

통일집에서 고기에 찍어 굽는 양념은 1960년대 사장 여건성 씨가 일하던 서울 명동의 명동집 일본식 양념을 변형한 것. 메주를 띄워 담근 집 간장에 한방 재료 8~9가지를 넣고 발효시켰다. 사진=이해림 제공

 

당시 소는 모두가 노동에 참여하던 농우. 배합 사료 대신 꼴을 벤 여물을 되새김질해가며 살았기에 양깃머리도 지금보다 훌쩍 컸다. 온몸의 근육이 단련되어 질기고 향도 진한 소고기는 그러나 서울시 인구 전체가 하루 200~300두밖에 먹지 못할 정도로 귀했다. 당시의 명동은 지금으로 치면 청담동 정도 되는 최대, 최고급 번화가. 지금 우리가 청담동에 나가 한우 오마카세를 먹듯이 당시의 명동 힙스터들은 명동에 나와 불고기를 구웠을 것이다.

 

그의 기억에 따르면 당시 거리엔 최불암 씨 모친의 빈대떡 집도 있었다. 한일관이 명동에 분점을 두기도 했고, 4대문 안엔 아무튼 명성 자자한 식당들이 몰려 있었다. 시인과 작가와 가수와 배우 들, 그리고 한국의 현재를 바꾼 예비 정치인들은 그 거리를 오가며 배를 채우고 곤궁한 성장기의 낭만을 그럼에도 만끽했다.

 

이토록 실감 나는 과거라니. 그리고 귀중한 변천의 증언이라니. ‘노포’니 ‘뉴트로’니 하는 어색한 신조어로부터 느꼈던 막연한 불편의 정체를 찾았다. 살아낸 그들 식당의 현재에 해시태그를 다는 일 외에, 우리는 그들의 과거를 단 한 번이나마 눈을 마주하고 질문한 적이 있었던가. 

 

여건성 씨의 옛날이야기는 그래서 명징한 이정표가 되었다. 걷기에도 갑갑한 명동 거리, 누군가의 기억이 겹쳐 보이자 그 낯섦이 무척 반갑다.​ 

 

필자 이해림은? 푸드 라이터, 푸드 콘텐츠 디렉터. 신문, 잡지 등 다양한 매체에 글을 싣고 있으며, ‘수요미식회’ 자문위원으로도 활동 중이다. ‘탐식생활: 알수록 더 맛있는 맛의 지식’을 썼고, 이후로도 몇 권의 책을 차곡차곡 준비하고 있다. 콘텐츠, 브랜딩, 이벤트 등 전방위에서 무엇이든 맛 좋게 기획하고 있으며, 강연도 부지런히 한다. 퇴근 후에는 먹으면서 먹는 얘기하는 먹보들과의 술자리를 즐긴다. 

이해림 푸드 칼럼니스트 writer@bizhankook.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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