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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장] 한숨 가득 황학동 주방거리 "폐업 물건 받는 우리가 폐업할 지경"

"물건 들어오는데 나가지 않아"…온라인 거래 늘며 점포들 활기 잃어

2018.09.14(Fri) 20:45:04

[비즈한국]​ ‘​주방거리​’가 위치한 서울 중구 황학동은 과거 이곳 논밭에 ‘황학이 노닐었다’ 하여 붙은 이름이다. 한국전쟁 이후 사람들이 일자리를 찾아 청계천으로 모이면서 큰 시장이 생겼다. 상인들은 리어카를 끌고 다니며 쌀, 골동품, 고물 등을 팔았고 이것은 지금의 광장시장, 답십리고미술상가, 그리고 서울풍물시장의 뿌리가 됐다. 86아시안게임, 88올림픽 개최로 외식업이 성장했고 주방용품업체는 황학동으로 모였다. 주방거리는 1980년 이후 외식업의 흐름을 읽는 지표가 됐다.

 

중앙시장 입구를 지나 5분가량 걸으니 ‘중고 사고 팔고’ ‘고가매입 저가판매’가 크게 적힌 간판이 나왔다. 늘어선 간판 아래에는 각종 중고 주방기기·식기류가 높게 쌓여 있고 비좁은 도로에는 주방기기를 실은 트럭이 정신없이 돌아다녔다.

 

서울 중구 황학동 주방거리는 1980년 이후 외식업의 흐름을 읽는 지표가 됐다. 사진=최희주 인턴기자

 

간이의자에 앉아 손님을 기다리던 H 주방기기업체 대표 강 아무개 씨(60)는 “요즘 어떠세요?” 라는 질문에 “보면 몰라요. 놀고 있잖아”라며 헛웃음을 터뜨렸다. 88올림픽이 개최되던 해 가게를 열었으니 30년째다. 남들보다 먼저 자리를 잡은 덕에 목 좋은 곳에 가게를 얻었지만 요즘은 애물단지가 됐다. 

 

“지금은 자기(명의) 가게가 있거나, 아니면 장사 안 하는 사람이 승자예요.” 그는 임금 인상보다 임대료가 문제라고 했다. “일을 했으면 당연히 돈을 받아야죠. 여기 사람들이 힘든 이유는 임대료 때문이에요.” 그의 말에 옆 가게 상인들도 고개를 끄덕였다. 

 

강 씨는 “폐업이 많은 요즘 돈 버는 쪽은 나까마(중간업자)일 것”이라 했다. 트럭을 몰고 다니며 폐업한 식당에서 물건을 매입해오거나 반대로 배달해주는 ‘나까마’들은 임대료를 낼 일이 없기 때문이다.

 

한 주방용품점 사장은 “폐업 물건을 가져오는 우리가 폐업할 지경”이라고 말했다. 사진=최희주 인턴기자


국세청에 따르면 2017년 폐업자 수는 90만 8076명이었고 올해는 100만 명을 넘을 것으로 예상된다. 지속되는 경기 불황으로 주방거리도 침체기에 빠졌다.  

 

창업하려는 사람은 없지만 업종을 변경하는 사람은 종종 있다. 지금은 이들이 주방거리의 주 고객이다. “2년도 안 돼 오는 사람도 많아. 가게 자리를 바꿀 순 없으니 메뉴만 바꾸는 거야.” B 주방그릇 대표 김 아무개 씨(여·59)​는 석쇠를 받고 칼국수용 냄비를 내줬다고 했다. “잦은 업종 변경으로 빚만 불리는 자영업자도 많아.”

 

김 씨는 “경매로 넘어간 식당 집기류가 들어오는 일도 늘었다“고 했다. 무리하게 업종 변경을 하다 빚을 갚지 못했거나 임대료가 밀린 경우다. “경매로 넘어온 식당 그릇이랑 수저는 대부분 설거지가 안 돼서 오거든. 그럼 내가 다 닦아서 팔아. 어깨가 다 고장 났어.” 그는 연신 어깨를 두드렸다. 

 

H 업체는 중고 집기류들을 놓을 곳이 없어 옥상에 쌓아두고 있다. 사진=최희주 인턴기자


잇따른 폐업으로 중고 집기·식기가 쌓이지만 나가는 양은 턱 없이 적다. H 업체 대표 강 씨는 “폐업 물건을 사는 우리가 폐업할 지경”이라며 “옥상과 창고에 물건이 쌓여 있다. 가서 사진 좀 찍어보라”며 기자의 등을 떠밀었다. 

 

B 주방그릇은 원래 새 그릇만 파는 가게였다. 신품을 찾는 손님이 없어 몇 년 전부터 중고도 취급하게 됐다. 지금은 중고 식기들이 넘쳐 새 그릇을 집어삼킨 모양새다. 김 씨는 “오늘도 새로 들어온 중고 물건이 많아 가게가 점점 좁아지고 있다”고 말했다.

 

가게 앞 켜켜이 쌓인 헌 뚝배기 그릇 사이에 간간이 새 프라이팬이 보인다. 사진=최희주 인턴기자


강 씨는 “이 바닥도 먹고살 만했을 때가 있었다”고 했다. 1990년 대 말 IMF 구제금융 직후다. 폐업하는 사람도 많았지만 창업하는 사람이 더 많았다. 중고 물품이 없어서 못 팔 정도였다. 그는 “그때는 눈코 뜰 새 없이 바빴다”면서도 “시대가 변한 것 같다”고 말했다.

 

어려운 경기에도 대박 식당이 있듯, 주방거리에도 잘나가는 가게는 있다. 다양한 판매 채널 확보로 경쟁력을 키운 발 빠른 업체들이다. 주로 온라인 판매를 하므로 ‘목 좋은 자리’도 필요하지 않다. 이들은 대부분 큰 거리에서 보이지 않는 뒷골목에 자리했다.

 

강 씨는 이들 중 상당수가 ‘토박이 가게’에서 일하던 직원이라고 했다. 그는 “큰 거리엔 토박이가, 뒷골목엔 젊은 친구들이 있다. 여기서 일하면서 돈을 모아 독립하는 것”이라고 설명했다. 

 

황학동도 온라인과 미디어의 영향을 받고 있었다. 얼마 전 새로 블로그를 개설했다는 조 아무개 씨(26)는 “젊은 층에서 온라인 문의가 들어오는 편”이라며 “특히 미디어의 영향이 크다. 백종원이 출연하는 프로그램을 보고 비슷한 업종을 창업하려는 사람이 많다”고 했다. 그는 “푸드트럭이 취업문이 막힌 청년들에게 어떤 희망이 된 것 같다”고 말했다. 

 

황학동 주방거리는 외국에서도 유명하다. ‘그릇이 싸다’는 소문에 필리핀, 터키, 중국 등 각지에서 찾아온다. 그릇가게 김 씨는 “중국은 경기가 좋은가봐. 우리 가게에서 그릇을 사간 중국인이 ‘1호점이 잘돼서 2호점을 낸다’며 또 왔다”고 부러워했다. 이렇게 사간 그릇은 선박이나 항공으로 배송된다. 반면 대형 냉장고 같은 주방 기기를 파는 강 씨의 가게에 오는 외국인 손님은 “​국내에 자국 음식점을 창업하려는 사람이 대부분”이라 했다.

 

B 주방그릇이 문을 닫는 6시 무렵. 이웃 상인이 “​손님에게 팔 종지 70개만 빌려달라”​며 간장 종지 1개를 들고 왔다. 김 씨네는 같은 종지가 없었다. 김 씨는 “기다리라”더니 다른 가게 두어 군데에 전화를 해 기어코 그릇 70개를 빌려온 뒤에야 가게 문을 닫았다.​ 

최희주 인턴기자 writer@bizhankook.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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