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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춘욱 경제팩트] 인플레 잡으려다 디플레에 잡힐라

1980년대 이후 물가 급등세 실종…이젠 경제정책 방향 달라져야

2018.09.03(Mon) 09:45:19

[비즈한국] 한국을 비롯한 상당수의 중앙은행들은 이른바 ‘물가안정목표제’를 운용 중이다. 한국은행 홈페이지에는 물가안정목표제를 아래와 같이 정의한다.*

 

물가안정목표제(inflation targeting)는 중앙은행이 중기적으로 달성해야 할 물가상승률 목표치를 미리 제시하고 이에 맞추어 통화정책을 수행하는 통화정책 운영체제입니다.

 

1990년 이전에는 대부분의 중앙은행이 통화량, 환율 등을 중간목표로 설정하고 이를 조정하여 물가안정, 적정성장, 완전고용과 같은 최종목표를 달성하는 방식으로 통화정책을 운영하였습니다. 그러나 금융혁신, 금융자유화·국제화가 급속히 진전되면서 중간목표와 최종목표와의 관계가 불분명해짐에 따라 종전의 운영방식이 타당하지 않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지속 가능한 경제성장을 위하여 물가안정이 중요하다는 연구결과도 축적되었습니다. 이에 따라 1990년 뉴질랜드가 물가안정목표제를 처음으로 채택하였으며, 이후 도입국가가 꾸준히 늘어 최근에는 32개국(2015년 말 기준)에 이르고 있습니다.

 

한국은행은 외환위기 직후인 1998년 물가안정목표제를 도입하였습니다. 한국은행은 정부와 협의 하에 물가안정목표를 주기적으로 설정하여 공표하고 있습니다. 2016∼18년 중기 물가안정목표는 소비자물가 상승률 기준 2%(단일목표치)입니다.

 

서울 중구 한국은행 본사 전경. 사진=박정훈 기자​

 

‘물가안정목표제’가 도입된 이유는 1970년대를 지나면서 경제의 최대 현안으로 ‘인플레’ 문제가 부각되었기 때문이다. 

 

최근 흥미롭게 읽은 책 ‘한번은 경제공부’의 저자 로버트 하일브로너와 레스터 서로 교수는 20세기 후반 세계경제를 뒤흔든 인플레의 원인을 바로 ‘우연’과 ‘구조적 변화’에서 찾는다. 

 

1973년 ‘석유파동’으로 말미암아 빚어진 인플레이션을 예로 들어보자. 당시 석유수출국기구(OPEC)는 석유 가격을 갑자기 배럴당 3달러에서 11달러로 올리더니, 1980년 이란 혁명 이후에는 배럴당 13달러에서 28달러로 인상했다.

 

그러나 이제 석탄 관련 회사들이 석탄 카르텔 같은 기구를 만들어서 갑자기 석탄 가격을 네 배로 올린다고 가정해보자. 과연 석탄 카르텔이 인플레를 일으킬 수 있을까? 바보 같은 질문이 아닐 수 없다. 석탄 가격 인상은 대규모 불황을 유발할 뿐이다. 광산은 폐쇄되고, 제철소는 문을 닫고, 화물 운송량은 줄어드는 식으로 말이다. -책 269~270쪽

 

흥미로운 지적이다. 그럼 대체 1973년에 무슨 일이 있었기에 석유 카르텔의 가격 인상이 전방위적인 인플레를 낳았을까? 이에 대해 저자들은 바로 ‘민간 부문의 세력 증대’에 주목한다. 

 

대규모 민간 조직의 출현은 오늘날과 같은 인플레 성향을 가속화시킨 중요한 요인 중 하나였다. 예전에는 인플레가 최고점에 이르면 대개는 장기간의 디플레가 뒤따르곤 했다. 예를 들어 19세기 후반 내내 물가는 불규칙적으로 하락 추세를 보였다. (중략)

 

하지만 이런 흐름은 이제 경제사의 어느 구석에서나 찾아볼 수 있을 뿐이다. 오늘날 국내총생산에서 농업이 차지하는 비중은 미미하다. 또 기술발전의 결과 제조원가가 지속적으로 낮아졌고, 경우에 따라서는 극적일 정도로 대폭 인하되었다.

 

그러나 이와 같은 비용 하락은 제2차 세계대전 이후 나타난 임금과 가격의 하방 경직적 성격, 임금과 가격이 오르기만 할 뿐 절대로 떨어지지 않는 톱니 효과(ratchet effect)가 나타나면서 상쇄되어 버렸다. (중략) 

 

기업과 노동 세력의 집중화로 말미암아 상호 파멸적인 투쟁에 대한 우려가 높아지면서 임금과 가격은 한 방향으로, 즉 오르는 방향으로만 움직이게 되었다. 그에 따라 대기업들은 이제 경영 여건이 아주 좋지 않거나 죽기 살기 식의 처절한 경쟁이 벌어지지 않는 이상 임금이나 가격의 인하를 시도하지 않게 되었다. -책 271~272쪽

 

그러나 이런 상황은 극적으로 반전되었다. 아래 그래프에 나타난 것처럼, 1980년대 이후 물가 급등세는 실종되었으며 오히려 디플레를 걱정해야 하는 신세가 되고 말았다. 

 

그래프 미국 소비자물가 상승률. 자료=미국 세인트루이스 연준


왜 이런 일이 벌어졌을까? 이에 대해 로버트 하일브로너와 레스터 서로 교수는 세 가지 변화가 출현한 것에 주목한다. 

 

이와 같은 상황에 행운이 따랐다. 1980년대 접어들어 외부 충격들이 사라진 것이다. 유가의 경우 OPEC이 너무 높게 가격을 정한 나머지, 석유 생산이 급증한 데 비해 소비는 극적인 절감이 이뤄졌다. (중략)

 

인플레가 완화된 두 번째 요인은 긴축 정책 때문이었다. (중략) 카터 행정부 때 긴축 정책이 처음 시행되더니 레이건 행정부 때에는 더욱 강력히 시행되었다. 그에 따라 이자율이 20%를 웃돌게 되면서, 드디어 장기간에 걸친 급격한 경기 침체가 나타났다. (중략)

 

인플레에 마지막 일격을 가한 것은 외국의 경쟁 압력이었다. 강력한 통화긴축으로 이자율이 급등하자, 다음과 같은 일이 발생했다. 먼저 미국 이자율 상승으로 미국 채권 투자의 매력이 높아지자 외국 투자자들이 미국 채권투자에 나서게 되었다. (중략) 외국 투자자들의 달러 수요가 늘어나면서 미국 달러 가치 역시 상승했는데, 이는 결국 미국 제품의 가격을 높이고 외국 제품의 가격은 떨어지도록 만들었다. (중략) 외국과의 경쟁은 이런 식으로 인플레 억제의 또 다른 원천으로 작용했다. -책 274~276쪽

 

그리고 지금껏 세계 주요국은 인플레의 위협에서 상대적으로 자유로운 편이다. 특히 2000년대 중반부터 시작된 셰일오일 혁명 영향으로 석유 생산 능력이 확대된 데다, ‘물가안정 목표제’ 시행 과정에서 단행된 강력한 긴축정책이 인플레를 억제하는 데 큰 힘이 되었음은 물론이다. 

 

여기서 한 발 더 나아가 로버트 하일브로너와 레스터 서로 교수는 이제 경제 정책의 방향도 달라질 필요가 있다고 지적한다. 

 

우리에게 닥친 새로운 문제 중 첫 번째는 이렇듯 발생할 것 같지 않은 ‘인플레 위협’이라는 망령에 사로잡혀 꼭 필요한 잠재적 성장 가능성을 거부하고 있다는 점이다. (중략)

 

현재 전 부문에 걸쳐 국제적인 경쟁이 확대되고 있다. 그 속에서 미국 기업들의 가격 결정권은 갈수록 약해지고 있으며, 노동 비용을 비롯한 각종 비용은 새로운 기술의 개발 덕분에 급격히 떨어지고 있다. 실질 노동임금이 계속 낮아지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는 것이다. 이런 상황에서 인플레를 우려한 경제 정책을 짠다는 것은 무리가 아닐 수 없다. -책 279~280쪽

 

2009년에 발간된 책이지만, 마치 최근의 상황을 직접 본 것처럼 지적하는 ‘혜안’에 감탄을 금하기 어렵다. 실제로 아래 그래프에 나타난 것처럼, 2000년 이후 미국 근로자들의 실질임금은 단 5% 남짓 올랐을 뿐이다. 같은 기간 실질 국내총생산이 20% 이상 늘어났다는 점을 감안할 때 근로자들이 차지하는 상대적인 몫이 지속적으로 줄어들고 있는 셈이다. 

 

미국 실질임금 추이(16세 이상, 풀타임 근로자 기준). 자료=미국 세인트루이스 연준

 

이런 상황을 감안할 때, 로버트 하일브로너와 레스터 서로 교수가 지적했듯 ‘인플레 수준’에 연연해 경제 정책을 추진하는 것에 한번 고민이 필요한 시점인 것으로 판단된다. 특히 한국처럼 노령화가 가파르게 진행되는 가운데, 고용여건마저 악화되는 나라 입장에서 노 교수들의 지적은 되새겨 볼 가치가 있는 것으로 판단된다. 

 

* 한국은행(2017.2.13), “물가안정목표제(inflation targeting)란 무엇인가?”

홍춘욱 이코노미스트 writer@bizhankook.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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