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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 산티아고 7] 수도꼭지에서 와인이 '콸콸'

쉬었다 가도 괜찮아…삼겹살을 굽고 '순례자 포도주'를 맛보다

2018.08.26(Sun) 19:34:41

[비즈한국] ‘쉬었다 갈까?’ 아침부터 유혹이 강했다. 고작 5일째 되는 날이었지만 내 몸은 아우성을 치고 있었다. 반면 남들은 쌩쌩해 보였다.

 

결국 6일째 되는 날 100km 지점에서 하루 휴식을 갖기로 했다. 와인이 나오는 수도꼭지를 찾았다. 사진=박현광 기자

 

“적응돼서 이제 걸을 만해요.” 

 

주비리(Zubiri)부터 함께 걸었던 ‘백자매’ 동생 희민이가 말했다. 스물두 살 왜소한 체형인 그녀는 걸으면서 힘들다고 투덜대기 일쑤였다. 백자매 언니 선주와 나는 좀만 힘내자며 희민을 다독이곤 했다.

 

그랬던 희민이 선주와 나더러 먼저 가란다. 혼자 걸으며 이 길을 만끽하고 싶다고 했다. 선주와 희민 사이엔 애초에 체결된 ‘계약’이 있었다. 순례길에 함께 오는 대신 희민이가 신호를 주면 혼자 걷게 내버려두겠다고. 그 얘길 듣고 흠칫 놀랐다. 산티아고 순례길을 찾는 사람들은 온전한 ‘자기만의 시간’을 가지고 싶은 욕심이 있다. 나도 그랬고 희민도 그랬다.

 

그래, 산티아고 순례길은 혼자 걸으며 고독을 즐기고 생각을 확장하는 곳이다. 지인과 걸으면 또 그만의 맛이 있지만 새로운 사람과 인연을 맺기가 쉽지 않다. 기특한 생각을 하는 희민을 앞에 두고 ‘쉬었다 가겠다’는 말을 입 밖으로 낼 순 없었다. 꾹꾹 눌러 담고 출발했다. 선주와 나는 새벽부터 길을 나섰다.

 

온전한 자기 시간을 갖고 싶은 욕심을 가진 이들이 산티아고 순례길을 찾는다. 길이 지겨울 법도 하지만 매번 새롭다. 사진=박현광 기자

 

대신 호기가 희민이와 함께 걷기로 했다. 호기는 군 복무를 마치자마자 엄마 손에 이끌려 순례길을 왔지만, ‘어른들 무리’에서 빠져나와 우리와 함께 걸었다. 아무래도 희민이가 걱정됐던 선주가 호기랑 함께 걸으라고 제안했다. 희민은 받아들였다. ‘익숙한’ 언니와의 분리가 필요했으리라. 혹은 선주와 내가 끌어준답시고 손잡는 장면을 봤을지도 모른다.

 

힘이 되는 건 역시나 길과 사람이었다. 차가운 새벽 공기가 촉촉하게 얼굴을 적셨다. 앞에 펼쳐진 길, 그 뒤로 걸린 하늘이 피곤을 잠시 덜어줬다.

 

“무아, 너 아침 먹었어? 안 먹었으면 이거 먹고 가.”

 

도니는 삼십 대 중반으로 보이는 스페인 남자였다. 유쾌하고 에너지가 넘쳤다. 함께 걸으면서도 지나치는 순례자에게 “하늘이 예쁘지 않니?”, “좀만 힘내” 등의 말로 힘을 돋우곤 했다. 바 앞 테이블에 앉아 있던 그가 날 붙잡았다. 도니는 바게트 빵을 가로로 반 자른 뒤에, 하몽(스페인식 슬라이스 햄)을 슥슥 집어넣었다.

 

“내가 먹던 건데 괜찮지? 이게 다 에너지야, 먹어둬.”

 

왕비의 다리라 불리며 카미노에서 가장 아름다운 다리로 유명하다. 피곤하면 눈에 들어오지 않는다는 것이 함정. 사진=박현광 기자

 

스페인식 정이랄까. 1유로짜리 하몽과 1유로도 하지 않는 바게트 빵으로 만들어진 한 끼였다. 볼품없었지만 충분했다. 어정쩡하게 메고 있던 가방을 풀어 내려놓고 의자에 몸을 묻었다. 빵을 한 입 베어 물고 커피를 한 모금 들이켰다. 하늘을 올려다보니 웃음이 샜다. 세상 행복이 응축돼 밀려왔다. “부엔 카미노”, 지나치는 순례자에게 여유롭게 손을 들어 인사했다.

 

# 물통 좀 넣어줄래요

 

선주와 나, 둘만 걷다 보니 왠지 모를 홀가분한 기분이었다. 선주는 말이 잘 통했다. 같은 나이라 비슷한 고민을 갖고 있었다. ‘뭐해 먹고 살지’ 주제를 중심으로 해도 되고 안 해도 될 이야기까지 모조리 끄집어냈다. 길은 길고 시간은 넉넉했다. 마치 오래 알고 지낸 사람인 양 편했다.

 

처음 맞는 비. 처음 만난 사이지만 순례자들은 서로를 이해하고 돕는다. 사진=박현광 기자

 

비가 왔다. 처음 맞는 비였다. 약속이라도 한 듯 커다란 나무 밑으로 순례자가 모였다. 다들 우비를 입고 가방에 레인 커버를 씌우느라 분주했다. 레인 커버를 씌우더라도 가방이 걱정되기 때문에 보통 우비로 가방까지 함께 덮는다. 가방을 멘 상태로 우비를 뒤집어쓰는 과정이 쉽지 않기 때문에 처음 보는 순례자끼리도 서로 돕는다. 선주와 나도 서로 꼼꼼히 챙겼다. 

 

“물통 좀 가방에 넣어줄래요?”

 

한 여자가 떠날 채비를 마치고 내게 와서 물통을 건넸다. 자신의 등에 업힌 가방을 가리켰다. 몸을 꼬고 팔을 뒤로 젖혀 물통을 꽂는 것만큼 고통스러운 작업은 없다. 물통을 건네받아 그녀가 메고 있던 가방에 넣었다. 약속된 상황인 것처럼 자연스러웠다. 

 

“고마워요.”

 

여자는 우비를 한 번 고쳐 입더니 이내 나무 그늘을 빠져나갔다. 일련의 과정에 정제된 몇 마디가 오갔을 뿐 서로 눈 한 번 마주치지 않았다. 무례할 수도 있지만, 그 상황이 꽤 마음에 들었다. 일상에선 사소한 부탁을 사소하게 하기 쉽지 않다. 밥 먹는 자리에서 옆 사람에게 물을 건네달라는 것마저 어렵다. 

 

밀밭 사이로 그림처럼 걸려 있는 마을, 시라우키. 마치 동화 속으로 들어가는 기분이다. 사진=박현광 기자

 

카미노 위에선 순례자 간에 모종의 끈끈함이 존재했다. 같은 고난을 겪고 있다는 사실이 매개되어 존중, 공감이 흘렀다. 방금 나는 그녀의 고통을 이해했고, 그녀는 나의 선의에 신뢰를 보냈다. 그 상황이 순식간에 이해됐다. 순례자만이 누릴 수 있는 또 하나의 기쁨이었다. 우비 안에 땀이 차는 동시에 찝찝함이 절정에 달하는 순간이었기에 더 극적으로 느껴졌다. 

 

다시 빗속을 걸으니 순수해지는 기분이었다. 눈앞엔 밀밭 사이로 마을이 그림처럼 걸려있었다. 시라우키(Cirauqui)였다. 우비를 입고 줄지어 가는 순례자 행렬이 꼭 개미 떼 같았다. 페로몬을 뿌려 동료에게 길을 알려주는 개미 떼.

 

# 힘들면 쉬었다 가자

 

“여기서 2km만 더 가면 100km 지점이래.”

 

목적지인 에스테야(Estella)에 도착했을 땐 해가 쨍쨍했다. 유독 순례자들 얼굴엔 성취감이 흘렀다. 100km를 지점을 돌파했기 때문이다. 성당이 네 개나 있을 만큼 볼거리가 많고 먹을거리도 풍부한 에스테야도 한 몫 거들었다.

 

에스테야는 바로크어로 별이라는 뜻이다. 산초 라미레스 왕이 1090년 만든 계획도시다. ‘좋은 빵과 훌륭한 포도주, 고기와 물고기가 넘쳐나고 모든 종류의 행복함이 있는 도시’라고 기록될 만큼 부유했다. 바스크인, 유대인, 프랑스인 등 여러 인종이 모여 살았던 만큼 색다른 건축물이 유독 눈에 띈다.

 

에스테야에 도착했을 땐 이미 비가 그치고 해가 쨍쨍했다. 사진=박현광 기자

 

에스테야는 나바라와 스페인 역사에서 중요도가 높다. 과거 나바라 왕의 왕위 수여식이 에스테야 성당에서 이뤄졌다. 왕은 성당에서 선서를 했고, 에스테야의 로마네스크 양식 궁전에서 지냈다. 그래서인지 하루 묵어가는 순례자 중 스페인 사람이 많은 도시다.

 

백자매는 에스테야에서 하루 묵기로 했다며 날 꼬드겼다. 처음엔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발 상태가 조금 호전되면서 욕심이 났다. 원래 계획보다 많이 뒤처져 있었다. “근처 수도원 수도꼭지에서 와인이 나온다는데?” 계속되는 유혹에 쉬었다 가기로 했다. ‘원래 계획’ 그런 게 어디 있나. 돌아갈 비행기 표를 사둔 것도 아니라 급할 이유는 없었다.

 

낯선 선택이었지만, 스스로를 더 옭아맬 필요는 없었다. 마음을 조금 내려놓고 보니, 쉬지 않아야 할 이유가 딱히 없었다. 오히려 쉬는 게 맞았다. 아니, 사실 너무 쉬고 싶었다. ‘​자신만의 까미노가 있다.’​

 

 

에스테야에서 하루를 묵고 다음 날 2km 떨어진 아예기(Ayegui)로 이동했다. 순례자 숙소인 알베르게는 1박이 원칙이기 때문에 숙소를 옮겨야 한다. 아예기에는 알베르게가 딱 한 개 있는데, 이곳에선 순례 100km 기념 도장을 찍어준다.

 

이라체 수도원으로 가는 길에 펼쳐진 포도밭. 아직은 영글지 않았다. 한 여름에 오면 포도 서리를 하는 즐거움(?)을 만끽할 수 있다고 한다. 파란색으로 보이는 표지판은 가리비로 순례길 마스코트다. 사진=박현광 기자

 

짐을 풀고 물통을 들고 와인이 나오는 수도꼭지로 향했다. 오전 11시쯤 해가 중천이었다. 일찍부터 동난다는 말을 들어서 별 기대는 안 했다. ‘와인 수도꼭지’는 이라체 수도원에 있는데, 하루 100L 와인을 무료로 제공한다. 수도꼭지를 이리저리 돌리니 와인이 흘렀다. 

 

“오오.”

 

함박웃음이 났다. 별일 아니지만 즐거웠다. 꼭 와인 때문은 아니었다. 와인 맛이 나쁘진 않았지만 구멍가게에서 산 와인과 비교해 딱히 월등하진 않았다. (물론 나는 알코올쓰레기라 잘 모른다) 그저 일광욕하고 있다는 게 한없이 여유롭고 행복했다. 몸에서 향기가 나는 기분이었다.

 

수도원을 거닐다 보니 내게 하몽이 들어간 바게트 빵을 건넸던 도니가 걸어왔다. “혹시 와인 받았어? 다 떨어졌더라.” 지난 저녁 술 먹고 뻗었다가 이제야 걷기 시작했단다. 이라체 수도원의 포도주를 마셔야 카미노를 무사히 완주한다는 전설이 있다며 한 모금 얻어 마셨다. 지금 생각해보면 그냥 이라체 포도주 맛이 궁금했던 것 아닐까. 아무래도 좋았다.

 

 

 

공용주방이 있어 삼겹살을 구웠다. 저녁을 사 먹기도 하지만 주방과 마트가 있다면 직접 요리를 해 먹는 경우가 많다. 100km를 자축하며 선주와 희민과 와인까지 곁들였다. 걷지 않으면 게을러질까 봐 걱정했지만, 오히려 잘 쉬고 나니 얼른 걷고 싶었다. 멍든 발톱에 통증이 사라졌고, 정신이 한결 맑았다. 스스로를 옥죄었던 지난날을 위로했다.

 

‘​그래, 쉬었다 가도 괜찮다.’​

 

 

아무것도 아닌 구름 한 점에 여유와 행복을 느낄 때가 있다. 그 시간은 온전히 내가 만들어야 하는 것. 사진=박현광 기자

 

[산티아고 Tip] 포도주가 나오는 수도꼭지!

 

많은 순례자가 에스테야에 묵는다. 에스테야는 아름답고 먹을거리가 풍부하기 때문이다. 100km를 지점이라는 성취감까지 더해지면 마음이 살랑살랑 인다. 하지만 더 정확히는 건너 마을인 아예기가 100km 지점이다. 

 

작은 마을이라 알베르게가 단 하나 존재하는데, 여기선 100km 기념 도장을 찍어준다. 이 알베르게에서 700m 지점에 이라체 수도원에 포도주가 나오는 수도꼭지가 있다. 이라체 수도원은 자체 포도주를 만들어 상품으로 판매하는데 순례자에게 하루 100L를 무료로 제공한다. 보통 아침 9시면 동난다고.

 

소소한 재미이니 뒷사람을 위해서 조금만 받아 가시길! 참, 에스테야에서 길이 두 갈래로 나뉘는데, 왼쪽 길을 택해야 이라체 수도원을 지나칠 수 있다.

박현광 기자 mua123@bizhankook.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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