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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권 패트롤] 엇갈리는 '노가리-공구' 을지로3가의 부침

한쪽에선 밤마다 '축제' 이웃 공구거리에선 '생존권 투쟁'

2018.08.09(Thu) 16:33:50

[비즈한국] 서울 을지로 ‘노가리 골목’​은 밤마다 값싼 생맥주와 안주를 찾는 사람들로 인산인해를 이룬다. 50~60대 장년층은 물론 20~30대 젊은이까지 연령대도 다양하다. 하지만 20m의 도로 하나만 건너면 전혀 다른 풍경이 펼쳐진다. 삶의 터전을 잃을 위기에 놓인 공구단지 상인들의 생존권 투쟁 현장이다. 

 

# 한국판 옥토버페스트 을지로3가역 ‘노가리 골목’

 

지난 3일 저녁 7시. 서울 지하철 2·3호선 을지로3가역 4번 출구를 나와 골목으로 들어가자 낯선 풍경이 펼쳐졌다. 대로변에는 인쇄용지를 가득 실은 삼륜차들과 인쇄업소들이 즐비한 가운데, 이면도로에는 간이 테이블 수백 개가 펼쳐져 있었다. 밤에도 30℃를 넘나들 만큼 무더운 날씨에도 이곳은 넥타이를 푼 회사원과 젊은이들로 가득했다. 테이블에는 생맥주와 노가리가 빠짐 없이 자리하고 있었다. 한국판 옥토버페스트​로 불리는 서울 을지로 노가리 골목의 모습이다.   

 

지난해 서울 중구청이 을지로 인쇄골목 일대 옥외영업을 허용하면서 이곳은 ‘한국의 옥토버페스트’로 불릴 정도로 호황을 맞고 있다. 사진=연합뉴스


한 호프집에 들어가 테이블에 앉자마자 점원이 주문하지도 않은 생맥주 500cc 한 잔을 내밀었다. 당황한 기색을 보이자 그는 “백이면 백 생맥주 주문하시니 일단 먼저 드실 수 있게 가져오는 것”이라며 “안주는 천천히 주문해도 된다”고 말했다. 고객들의 연령대는 다양했다. 10년 전 퇴직했다는 김 아무개 씨(69)​는 “종로로 직장 다닐 때부터 이곳 단골이었다”며 “그때는 아저씨, 아줌마밖에 없었는데 지금은 젊은 친구들 보는 재미에 찾곤 한다”고 말했다. 

 

행정상으로 을지로13길과 충무로9길 등에 위치한 노가리 골목의 본래 이름은 ‘​을지로 인쇄골목’​이다. 상대적으로 저렴한 임대료 덕에 인쇄소와 관련 가게가 많이 밀접해 있다. 이곳에서 가장 오래된 호프집은 ‘​을지OB베어’​로 1980년 문을 연 뒤 40년 가까이 운영 중이다. 최근 이 가게는 정부로부터 ‘​백년가게’​로 선정되기도 했다. 맞은편 ‘​뮌헨호프’​​도 1989년 영업을 시작해, 30년 가까이 명맥을 유지하고 이다.

    

역사가 오래됐지만 요즘처럼 호황을 맞은 때는 없었다. 지난해 서울 중구청이 이 일대 옥외영업을 허용하면서 오래된 뒷골목이 살아나기 시작했다. 이면도로에 수백 개의 간이 테이블이 설치될 수 있었던 배경이다. 중구청에 따르면 이 일대 옥외영업을 허가한 구간은 을지로11길, 을지로13길, 충무로9길, 충무로11길로 이곳에만 모두 17곳의 호프집이 있다. 한 호프집 관계자는 “허가 이전보다 매출이 세 배 이상 뛰었다”며 “하루 평균 3000여 명의 시민이 오고 손님층도 다양해졌다. 회전율도 빨라 많게는 1500잔까지 나간다”​고 말했다.  

 

노가리 골목은 한국판 옥토버페스트로 불릴 만큼 성황이지만, 길 건너편 공구상가 상인들은 대책 없는 이주 정책으로 지자체와 갈등을 겪고 있다.


노가리 골목의 호황으로 주변 상권도 살아났다. 최근엔 젊은 창업가와 아티스트들이 매장을 열어 젊은이들이 즐겨 찾는 명소로 변모했다. 새로 생긴 이색 음식점·커피전문점·와인바만 수십 개에 달한다. 건물마다 조금씩 다르지만 20평 기준 월 임대료는 100만~150만 원. 서울 상권 임대료 평균인 ㎡당 3만 2700원, 66㎡(약 20평) 기준 215만 8000원과 비교하면 절반 수준이다. 

 

한 대기업 프랜차이즈 점포담당 관계자는 “을지로의 경우 경리단길이나 연남동 등 다른 골목상권과 달리 매장이 한데 모여 있지 않고 분산돼 있다”며 “프랜차이즈로선 입점이 쉽지 않은 구조다. 젠트리피케이션이 일어날지는 두고 봐야 알 것 같다”고 말했다. 인근 부동산공인중개사무소 관계자는 “올해 을지로3·4가 일대에 문을 연 카페나 음식점들이 여럿 있다”며 “이곳의 건물주와 세입자 모두 오랫동안 저렴한 임대료로 자리를 지켜온 만큼 임대료가 오른다고 일제히 빠져나갈 일은 없다”고 말했다.  

 

# 대책 없는 재개발에 철거 위기 몰린 을지로3가역 ‘공구거리’

 

노가리 골목이 한창 주가를 올리는 데 반해, 또 다른 을지로3가의 명물 공구거리에는 최근 팽팽한 긴장감이 감돈다. 재개발 문제가 불거지면서 입점 상인들의 반발이 거세지고 있기 때문이다.   

 

같은 날 낮 시간에 찾은 이 일대 상점들은 일제히 ‘서울시는 책임져라! 우리 삶의 터전을’ ‘60년 된 문화재와 같은 상권을 공청회 한 번 없는 개발이 말이 되나’ 등등 재개발 반대 플래카드를 내걸었다. 노가리 골목 맞은편 공구거리의 모습이다.

 

을지로3가역 5번출구 일대 공구거리. 상점들은 일제히 재개발 반대 현수막를 내걸었다. 사진=김상훈 기자


이곳은 1953년 한국전쟁 직후 생겨나 오늘날까지 60년 넘는 역사를 간직하고 있다. 작은 기계 부품부터 자재, 반제품, 장비 및 소모품 등을 판매하는 산업용재 매장이 한 곳에 모여 있다. 2003년 청계천 복원 공사로 일부 상인들이 이주했지만 여전히 산업용재 관련 점포는 500여 곳에 달한다. 하지만 2006년 서울시가 이 일대를 세운재정비촉진지구로 설정한 재개발 사업이 최근 추진되며 상인들은 삶의 터전을 잃을 위기에 처한 것이다.

 

2006년 서울시는 이 일대 지역을 세운재정비촉진지구로 설정했고, 2009년에는 구체적인 촉진 계획을 세웠다. 도심상권 활성화를 위해 오는 2023년까지 서울시 종로구 종로3가동 175-4 일대 낙후된 지역을 8구역으로 나눠 기반시설을 확충한다는 게 골자다. 청계천 상권수호 비상대책위원회에 따르면 재개발 추진으로 철거 위기에 놓인 점포는 300여 곳으로 세운재정비촉진지구 3구역·5구역에 위치한 점포들이다. 

 

상인들은 특히 대체지 마련 없이 사업을 강행하는 행태를 문제 삼고 있다. 유락희 청계천상권수호 비상대책위원회 위원장은 “상인들의 요구는 입주금을 내고 들어갈 테니 다 함께 이주할 수 있는 공간만 내달라는 것”이라며 “이곳은 수십 년간 이어온 집단상업지구다. 전문업종과 전문품목이기 때문에 집단 이주가 필요한데 보상금으로 뿔뿔이 흩어지면 폐업할 수밖에 없다”고 말했다. 

 

유 위원장은 이어 “2006년 확정된 사업이라 하더라도 11년 넘게 아무 계획이나 대책을 세우지 않고, 건물주와 협의해 어떤 안내도 없이 세입자들에게 나가라고 통보했다”며 “빠르면 이달 말 건물주가 제기한 명도소송의 결과가 나온다. 그러면 영업장을 비워야 한다”고 덧붙였다.

 

한 공구업체 관계자는 “지금은 재개발이 구역을 나눠 우리부터 철거를 시작하겠지만, 다른 곳도 우리처럼 똑같은 상황이 벌어질 것이다. 이곳 특성상 나가라고 해서 나갈 수 있는 환경이 아니다. 협업하며 명맥을 이어왔는데 대체지 마련도 없이 갑자기 나가라고 하는 건 나가 죽으라는 말”이라며 “박정희 군사정권 시절에는 지지층이 없다 보니 상인들의 요구를 잘 들어줬다. 그런데 민주주의를 직접 쟁취한 이 시대 지도자들은 오히려 우리 같은 사람들의 이야기를 들어주지 않는다”고 토로했다. 

 

서울시와 중구청에 따르면, 해당 부지에 건물을 세운 후 공구 백화점 형태로 상점을 만들어 기존 공구거리 세입자들을 입주시킬 계획인 것으로 알려졌다. 하지만 현재 시행사와 의견이 달라 협의가 지지부진한 상황이다. 

  

인산인해를 이루는 노가리 골목의 호황은 이곳 상인들에겐 씁쓸함으로 남아 있다. 유 위원장은 “수십 년간 이곳에서 장사하며 일과가 끝나면 동료들과 찾던 곳이 노가리 골목이다”며 “우리가 일궈놓은 노가리 골목은 정부에서 지원도 해주고 젊은 사람들도 많이 찾는데, 정작 우리는 쫓겨날 위기에 처해 있다”며 말을 잇지 못했다.​ 

김상훈 기자 ksanghoon@bizhankook.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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