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즈한국] 지난 12일 익명 커뮤니티 ‘블라인드’의 쿠팡 게시판에는 충격적인 사진이 한 장 올라왔다. 본인을 ‘쿠팡맨’이라고 밝힌 글쓴이는 아래의 사진과 함께 “내 몸이 몸이 아니다. 아무리 더워도 반바지도 입지 못한다. 자기에게는 훈장이지만 남들에게는 혐오스럽기 때문”이라며 “언제까지 이렇게 해야 하는 걸까. 정규직이 되면 아파트 권역을 달라, 반바지를 입고 싶다고 당당하게 말하겠다”는 내용의 글을 썼다.
그가 올린 사진 속에 다리는 보라색으로 변해 있는데, 과도한 노동으로 인해 온통 핏줄이 터져 시퍼런 피멍이 든 것으로 짐작된다. 고통도 상당할 것으로 보인다. 진위는 확인이 어렵지만, 만약 이 사진이 사실이라면 이렇게 다리가 아픈데도 참고 일하는 이유가 있다는 것이 전·현직 쿠팡맨의 한결같은 지적이다. 바로 ‘정규직 전환’을 위해서다.
쿠팡맨은 근무기간 2년을 거쳐 계약직에서 정규직으로 전환된다. 2년 동안 6개월 간격으로 재계약이 이뤄진다. 물론 그 사이에 아플 수도 있고 다칠 수도 있다. 하지만 쿠팡맨 사이에서는 산업재해 처리를 하면 안 된다는 것이 불문율이다. 정규직 전환은 물론 재계약에도 치명적이기 때문이다.
쿠팡맨들이 그렇게 생각하는 이유가 있다. 2016년 9월 부산지역에서 쿠팡맨으로 일하던 이 아무개 씨는 비 오는 날 회사 지침에 따라 신발을 벗고 배송차량에 오르다 미끄러져 사고가 났다. 4주간 병원에 입원하고도 6개월간 치료를 더 받아야 하는 큰 부상이었다. 치료 과정에서 산재 판정을 받았다. 치료가 끝나고 복직을 하려 하자 쿠팡 측은 이 씨와 근로계약을 연장하지 않기로 했다.
이 사건에 대해 2017년 9월 중앙노동위원회는 쿠팡이 부당해고를 했다고 판결했다. 쿠팡이 이에 불복하고 중노위원장을 상대로 행정소송을 제기했지만 또 다시 패소했다. 두 번이나 패소 판결을 받은 쿠팡은 지난 6월 고등법원에 또 다시 항소했다. 그 사이 김앤장, 율촌, 태평양 등 국내 굴지의 로펌을 동원하며 막대한 법무 비용을 사용했다.
쿠팡은 왜 이 씨의 인건비를 훌쩍 뛰어넘는 돈을 써가면서까지 이 씨의 복직을 결사적으로 반대할까. 핵심은 바로 쿠팡맨의 ‘갱신기대권’ 때문이다. 갱신기대권이란 기간제 근로자라고 하더라도 근로계약이 갱신될 수 있을 있으리라고 기대하는 정당한 권리다. 명문화된 규정이 없더라도 양자 간 신뢰관계가 구축되어 있다면 갱신기대권을 인정받을 수 있다.
쿠팡은 이 씨의 복직과 관련한 지난 두 차례의 재판에서 쿠팡맨은 갱신기대권이 없다고 일관되게 주장했다. 따라서 재계약하지 않는 것은 사측의 고유 권한이며 정당하다는 논리다.
쿠팡은 재판을 통해 일정한 요건을 충족하면 근로계약이 갱신된다는 취지의 규정이 없고, 오히려 기간만료가 되면 근로관계가 종료된다고 명시돼 있다고 주장했다. 또 갱신기대권이 인정된다 하더라도 이 씨가 업무를 수행할 정도의 건강상태가 되지 않기 때문에 재계약을 하지 않는 것은 정당하다고 덧붙였다.
재판 과정에서 쿠팡맨의 체력검정 기준이 공개돼 눈길을 끌기도 했다. 쿠팡이 제출한 답변서에 따르면 2017년 기준 쿠팡맨은 1000m를 6분 10초 내에 달려야 하고, 1분간 팔굽혀펴기 20회를 해야 한다. 2016년까지는 500m 달리기와 악력 측정, 윗몸 일으키기 등의 종목도 있었지만 간소화됐다.
이에 대해 재판부는 이 씨의 갱신기대권을 인정한다는 내용의 판결을 내렸다. 쿠팡의 근로계약서에 ‘본사 계약직 6개월 근무 후 업무평가를 통해서 계약 연장 및 정규직으로 전환될 수 있다‘는 문구가 있고 채용 공고에도 같은 내용이 기재되어 있다는 점을 근거로 들었다. 또 사건 통지 전인 2016년 4월에서 2017년 3월까지 1년 동안 쿠팡맨 재계약 비중이 90%에 이르기 때문에, 오히려 재계약이 되지 않는 것이 예외적인 상황이라고 덧붙였다.
이 씨에 대한 갱신기대권이 최종 인정되면, 이는 판례가 되어 모든 쿠팡맨에 적용이 가능해진다는 것이 법조계의 대체적인 의견이다. 즉 특별한 결격 사유가 없는 한 2년 만근하면 정규직이 될 수 있는 것. 반면 물류량에 따라 쿠팡맨의 고용을 조절할 필요가 있는 쿠팡 입장에서는 유연성이 크게 저하된다. 결국 쿠팡은 현재 서울고등법원에 항소한 상황이다.
박선규 노무사는 “요즘 갱신기대권 사례가 조금씩 늘고 있기는 하지만 실제로는 인정받기 대단히 어려운 조항”이라며 “만약 고등법원을 거쳐 대법원에서도 쿠팡맨의 갱신기대권이 인정된다면, 향후 쿠팡맨은 정규직이나 다름없는 고용 보장을 받을 수 있다”고 말했다.
하지만 이는 애당초 쿠팡이 자초했다는 지적이 적잖다. 그간 쿠팡이 쿠팡맨 정규직 고용을 통해 양질의 일자리를 늘리겠다는 포부를 수차례 밝혀왔기 때문이다. 김범석 쿠팡 대표는 지난 2015년 9월 기자간담회에서 쿠팡맨을 1만 5000명까지 뽑겠다고도 했다.
하지만 유통업계에서는 국민연금 데이터 등을 근거로 현재 쿠팡맨이 계약직과 정규직을 모두 포함해 2700명 전후인 것으로 추산한다. 이 중 정규직 비율은 3분의 1 수준으로 전해진다. 업계 관계자는 “로켓배송 초기 쿠팡이 쿠팡맨 정규직 카드로 우호적인 여론을 등에 업고 기존 물류업체의 반발을 무마하려다가 오히려 부메랑을 맞은 꼴”이라고 지적했다.
이에 대해 쿠팡 측은 “현재 재판 중인 사안에 대해서 언급하는 것은 적절치 않다”면서도 “주문량이 계속 늘어나고 있는 것은 사실이지만 쿠팡맨의 고용 계획이나 내부 채용 규정 등은 정책상 밝힐 수 없다”고 말했다.
봉성창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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