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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음악일기] 마이클 잭슨과 소녀시대의 프로듀서, 테디 라일리

케이팝과 마이클 잭슨의 연결고리…뉴잭스윙의 거장에서 케이팝 프로듀서까지

2018.07.02(Mon) 10:38:50

[비즈한국] 지난 시간에는 마이클 잭슨이야말로 케이팝(K-POP)의 선배라는 이야기를 해보았습니다(관련기사 [미국음악일기] 방탄소년단의 흥행에서 마이클 잭슨을 보다)​. 케이팝과 마이클 잭슨의 연결고리를 보여주는 상징적인 인물이 있습니다. 마이클 잭슨의 프로듀서 테디 라일리입니다.

 

테디 라일리가 소속된 알앤비 팀 ‘블랙스트리트(Balckstreet)’.


마이클 잭슨의 음악 시기는 크게 3개로 나눌 수 있습니다. 모타운에서 시키는 대로 노래했던 1기, 퀸시 존스와 함께했던 전성기 2기, 그리고 본인 주도로 테디 라일리 등 후배 작곡가를 기용한 후반 3기. 그만큼 테디 라일리는 마이클 잭슨과 각별한 사이였습니다.

 

솔로 3집 ‘배드(Bad)’의 거대한 성공 이후 마이클 잭슨은 퀸시 존스의 곁을 떠나 직접 프로듀싱을 지휘하기 시작합니다. 프로듀서 마이클 잭슨이 택한 작곡가가 바로 테디 라일리였습니다. 테디 라일리는 17세에 빌보드 차트에 자기 곡을 올려놓은 천재 프로듀서였습니다. 또 알앤비 그룹 ‘가이(Guy)’의 멤버로 프로듀서 겸 보컬을 도맡기도 했지요.

 

초기 테디 라일리의 음악을 잘 보여주는 키스 스웨트(Keith Sweat)의 ‘아이 원트 허(I Want Her)’.

 

그의 음악은 ‘뉴잭스윙’이라는 말로 요약됩니다. 빠른 업템포 리듬, 알앤비의 진행, 가스펠의 영향이 짙게 들어간 보컬, 그리고 재즈를 연상시키는 복잡한 화성 등 ‘흑인음악’의 여러 요소가 집약된 음악이죠. 한국에서는 케이팝의 선조 격인 초기 ‘서태지와 아이들’과 ‘듀스’가 즐겨 했던 장르기도 합니다.

 

마이클 잭슨이 뉴잭스윙의 전성기를 열었습니다. ‘배드’ 이후 발표한 4집 ‘데인저러스(Dangerous)’는 마이클 잭슨 최후의 메가 히트작입니다. 여기서 테디 라일리는 무려 7곡을 담당했습니다. ‘리멤버 더 타임(Remember The Time)’ 등의 곡은 엄청난 상업적 성공을 거두며 테디 라일리를 알렸습니다. 1991년의 일입니다.

 

마이클 잭슨의 ‘리멤버 더 타임(Remeber The Time)’. 마이클 잭슨과 테디 라일리의 협업을 상징하며, ‘뉴잭스윙’이란 장르를 상징하는 메가 히트곡이다.

 

같은 해 후반기, 알앤비 그룹 가이 해체 뒤 테디 라일리는 새로운 알앤비 그룹 ‘블랙스트리트(Blackstreet)’를 시작합니다. 이 그룹은 좀 더 테디 라일리의 영향력이 강화되었습니다. 힙합의 느낌이 좀 더 본격적으로 들어가기도 했죠. 1996년 발표한 블랙스트리트의 ‘노 디기티(No Diggity)’는 그 정점입니다. 여기서 그는 닥터 드레(Dr. Dre), 퀸 펜(Queen Pen) 등 힙합 아티스트의 피처링을 통해 적극적으로 힙합 사운드를 끌어들여 거대한 성공을 거두었습니다. 여기까지가 테디 라일리의 상업적 전성기라 볼 수 있겠습니다.

 

이후 테디 라일리는 내리막길을 걷습니다. 보이스 투 맨 등 슬로 알앤비 아티스트들은 발라드 넘버로 빌보드를 정복했습니다. 업템포 위주의 테디 라일리는 잘 맞지 않았죠. 이후 등장한 강력한 힙합 위주의 팝 음악, 알앤비 음악도 철저하게 알앤비 진행 위주인 테디 라일리와는 잘 맞지 않았습니다. 어셔와 저스틴 팀버레이크가 힙합 음악으로 차트를 점령하기 시작하던 21세기에, 힙합과 알앤비의 균형이 더 중요했던 테디 라일리의 음악은 갈 곳이 없어 보였습니다.

 

블랙스트리트의 ‘노 디기티(No Diggity)’.

 

그가 새로 자리 잡은 곳은 뜻밖에도 한국이었습니다. 케이팝 작곡가로서 활동을 시작한 겁니다. 가장 잘 알려진 음악은 역시 소녀시대의 ‘더 보이즈(The Boys)’겠지요. 그 후에도 그는 샤이니, 엑소, 에프엑스 등 주로 SM과 꾸준히 활동을 이어오고 있습니다. 심지어 박재범에게는 원래 마이클 잭슨에게 주려 했던 음악인 ‘데몬(Demon)’을 주기도 했습니다.

 

전성기가 이미 지나서였을까요? 아쉽게도 테디 라일리의 음악은 케이팝 시장에서 이름값을 하지는 못했습니다. 사실상 활동이 중지된 지금, 소녀시대를 ‘더 보이즈’로 기억하는 사람은 많지 않습니다. 다른 아티스트에게 준 음악도 마찬가지죠. 테디 라일리는 그가 만든 케이팝 음악 그 자체보다는 ‘해외 작곡가도 얼마든지 한국 케이팝 시장에서 음악을 만들 수 있다’는 신선한 충격을 준 사례로 더 기억될 듯합니다.

 

소녀시대 ‘더 보이즈’ 데이비드 레터맨 쇼 라이브.

 

테디 라일리의 음악 자체가 케이팝 시장에서 큰 성공을 하지 못했다 해도 그와 마이클 잭슨이 만들었던 음악적 경향은 그대로 케이팝의 DNA가 됐습니다. 지금도 블랙스트리트에서 활동하는 그는 알앤비 그룹의 느낌을 좋아합니다. 미국에서는 사실상 사라진 유행이죠. 

 

한국 아이돌 그룹은 그 느낌을 고스란히 가지고 있습니다. 업템포 댄스 음악임에도 힙합보다 알앤비의 느낌이 더 살아 있는 곡 구성 또한 팝 음악보다 케이팝에 어울립니다. 테디 라일리의 음악이 케이팝에 ‘조상’ 혹은 ‘원류’라고 말해도 좋은 이유입니다. 뉴잭스윙의 거장이자 케이팝의 선조, 테디 라일리였습니다.​ 

김은우 NHN에듀 콘텐츠 담당 writer@bizhankook.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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