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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를린·나] 독일에선 모래 범벅을 해도 '지지'라 하지 않는다

모래밭 자체가 완벽한 놀이터…한국에서 모래 싫어하던 아이들도 금방 친해져

2018.06.14(Thu) 10:14:09

[비즈한국] ‘시간이 쏜살같다(Time flies like an arrow).’ 아이 담임 선생님이 주말마다 보내는 뉴스레터에 자주 등장하는 말이다. ‘베를린 살이’를 시작한 지도 1년이 다돼간다. 그 사이 익숙해진 것들 몇 가지를 꼽아보면, ‘나 홀로 동양인’인 상황이 불편하거나 두렵지 않다는 것, 아날로그적 스타일을 고수하는 시스템이 처음만큼 답답하지 않다는 것, 자동차로 국경을 넘는 일이 베를린 시내를 주행하는 것처럼 편하다는 것 등이다. 

 

낯선 나라에서의 적응은 아이에게도 마찬가지였다. 진통이 없었던 건 아니지만, 아이답게 어른보다 빨리 익숙해졌다. 엄마로서 인상적인 변화는 ‘모래’와 친해진 것이다. 아이는 어렸을 때부터 모래를 싫어했다. 해변에서도 모래 밟기를 싫어해 돗자리를 펴고 그 위에서만 놀았다. 

 

놀이터에 마련된 수로에서 아이들이 흙으로 둑 쌓기 놀이를 하고 있다. 사진=박진영 제공


한국에서는 모래를 접할 일이 별로 없어 문제될 일은 없었는데, 독일은 모래와 친하지 않으면 놀이 자체가 어려웠다. 놀이터만 봐도 모랫바닥이 아닌 곳이 없다. 여름방학 중 베를린에 도착한 우리는 한 달을 놀며 지내야 했다. 한국에서 보낸 장난감이며 책 등은 도착하지 않아 놀이터에서 보내는 시간이 많았다. 아이는 모래를 받아들일 수밖에 없었다. 그럼에도 독일 아이들이 모래를 대하는 방식과는 비교조차 할 수 없었다. 

 

독일 아이들의 모래 사랑은 유별나다. 모래놀이는 시설을 갖춘 키즈카페나 바닷가에서나 하는 것으로 생각하는 우리나라와 차원이 다르다. 아파트 내에 놀이터는 없어도 모래밭은 갖춘 경우가 많다. 모래밭 자체가 완벽한 놀이터다. 지난해 집을 구하면서 관리인에게 놀이터가 있느냐고 물었을 때, 뒷마당의 모래밭을 가리키며 ‘저기 있다’고 당당히 답했던 이유를 이제는 이해한다. 

 

동네 곳곳 마련된 놀이터. 자연과의 교감을 중시하는 탓에 놀이기구는 대부분 나무 재질로 돼 있다. 사진=박진영 제공


놀이터에 놀이기구가 많더라도 독일 아이들에게 가장 인기가 많은 건 모래놀이다. 신발도 벗어 던지고 모래밭에 철퍼덕 주저앉아 내가 모래인지 모래가 나인지 모를 정도로 모래를 뒤집어쓰면서 논다. 지켜보는 부모는 전혀 말리지 않는다. 심지어 부모가 동참해 모래 범벅이 된다. 

 

처음 그 광경이 신기하고 놀라웠지만, 지금은 아이가 배우고 느낄 것들에 관심이 간다. 매일 그 시간이 축적되면, 집 안에서 하는 장난감 놀이에 익숙한 우리나라 아이들과 뭔가 다른 ‘결과’를 낳게 될 테니. 

 

모래를 비롯해 독일 아이들에게 가장 좋은 장난감은 자연이 주는 ‘날것’들이다. 동네 곳곳에 흔한 자연 친화적 놀이터, 공원, 잔디에서 뛰어 놀고 주변에 널린 나뭇가지며 나뭇잎 등을 모아 만들기 놀이를 하는가 하면 흙과 모래로 개미와 무당벌레를 위한 성을 쌓기도 한다. 

 

방과 후 수업 중에는 아이들이 직접 나무를 깎아 장난감을 만드는 프로그램도 있다. 우리나라에서 ‘시골 출신’ 어른들의 추억 속 이야기로 등장하는 놀이가 베를린 한복판에서 매일 벌어진다.

 

놀이터 모랫바닥에 온 가족이 앉아 노는 모습. 독일에선 흔히 볼 수 있는 풍경이다. 사진=박진영 제공


바깥 놀이가 일상화된 아이들은 비, 눈이 내려도 비옷을 뒤집어쓰고 나가 논다. 학교 역시 천둥번개를 동반한 폭우 상황을 제외하곤, 쉬는 시간에는 한 사람도 빼놓지 않고 아이들을 밖으로 내보낸다. 우리나라에선 비 내리는데 아이들을 밖으로 내보내면 ‘비정상’으로 여기겠지만, 이곳에선 ‘교육’으로 여긴다. 

 

비를 맞고 모래 범벅이 돼 집에 돌아온 아이들은 ‘거지꼴’인 경우가 태반이고, 집 안에는 모래알이 사라질 날이 없지만 이 건강한 놀이가 아이에게 줄 영향을 생각하면 그쯤은 얼마든지 감수해야 할 터다. 

 

한 가지 더, 달라진 놀이 환경은 경제적으로도 큰 혜택을 주니 반기지 않을 수가 없다. 자동차, 로봇 등 연령별로 사야 할 품목이 다르고, 그마저도 매번 새로운 버전이 나오니 장난감 가게를 드나들며 적잖은 비용 지출을 해야 했던 때와 비교하면, 어쩌다 한번 레고 블록과 보드 게임을 사주는 정도인 지금은 들어가는 비용이 거의 없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흔히 ‘잘 노는 것이 경쟁력’, ‘노는 만큼 성공한다’는 말들을 한다. 그런 말들이 결과론적인 이야기라고 생각한 적이 있다. 이제는 안다. 우리 아이가 ‘독일식’ 놀이를 통해 얼마나 많은 것을 배우고 체험하고 깨닫는지를. 

 

글쓴이 박진영은, 방송작가로 사회생활에 입문, 여성지 기자, 경제매거진 기자 등 잡지 기자로만 15년을 일한 뒤 PR회사 콘텐츠디렉터로 영역을 확장, 다양한 콘텐츠 기획과 실험에 재미를 붙였다. 지난해 여름부터 글로벌 힙스터들의 성지라는 독일 베를린에 머물며 또 다른 영역 확장을 고민 중이다. 

박진영 칼럼니스트 writer@bizhankook.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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