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즈한국] 1989년 11월 9일 베를린장벽이 무너진 뒤 1년도 채 지나지 않은 1990년 10월 3일, 서독과 동독은 하나의 국가로 통일됐다. 세계의 마지막 분단국가인 한국은 독일 통일의 과정을 어떻게든 참고할 수밖에 없다. 지난 4월 27일 역사적인 남북정상회담으로 통일의 분위기가 달아오르는 지금 ‘비즈한국’은 창간 4주년을 맞아 독일 통일의 과정과 교훈을 3회에 걸쳐 살펴본다.
[독일 통일 결정적 장면1] 베를린장벽 붕괴
[독일 통일 결정적 장면2] 급류에 휩쓸린 11개월
[독일 통일 결정적 장면3] 남북한과 달랐던 동·서독
베를린장벽 붕괴 전까지 동독이 무너지고 독일이 통일될 것이라고 생각하는 사람은 많지 않았다. 1980년대 중반 이후 폴란드, 체코, 헝가리 등 동유럽 공산국가들이 국민들의 개혁요구에 시달리던 반면 동독은 사회주의권에선 소련에 이어 2위의 경제 강국으로 발전한 선진 복지국가로 통했다. 소련이 버티고 있는 한 동독이 무너질 가능성도 없어 보였다.
동독 내부적으로도 1989년 5월 실시된 지방자치단체 선거에서 공산당 및 위성정당이 98% 이상의 높은 지지를 얻었다. 소규모 시위가 있기는 했으나 요구사항은 여행자유 확대, 평화, 인권, 환경보호 등 체제 변혁과는 거리가 먼 것이었다.
# 1985년 고르바초프의 ‘페데스트로이카·글라스노스트’
동구권에서 변화의 물결이 인 것은 1985년 3월. 미하일 고르바초프가 소련 공산당 서기장에 취임한 뒤 페레스트로이카(개혁) 정책과 글라스노스트(개방)를 표방하며 유화 정책을 펼치기 시작했다. 이 시기 동서 화해의 기조를 ‘데탕트(프랑스어로 완화·휴식을 뜻함)’로 부르기도 했다.
데탕트 분위기는 1989년에 절정에 달했다. 그해 6월 폴란드가 정치 자유화를 선언하고 총선을 실시한 결과 자유민주주의 정권이 들어섰다. 이런 기류는 헝가리, 루마니아, 불가리아 등으로 퍼졌다. 1989년 6월 28일 헝가리 새 정부는 개혁의지의 표시로 오스트리아와의 국경 철조망을 제거했다. 이 소식을 들은 동독 주민 1000여 명이 헝가리로 여행을 떠난 뒤 그대로 오스트리아로 건너가 서독으로 향했다.
이 모습이 언론을 통해서 보도되자 헝가리, 체코슬로바키아(현재 체코·슬로바키아로 분리)를 통해 동독을 탈출하는 주민들의 행렬이 이어졌다. 보다 못한 동독 정부는 10월 3일 체코슬로바키아 국경을 폐쇄했다. 그러자 동독 주민들은 대규모 시위를 벌이기 시작했다. 10월 9일 라이프치히에서는 12만 명이 모여 국경 개방을 요구하는 시위를 벌였다.
동독 공산당 서기장인 에리히 호네커는 시위 진압을 위해 동독에 주둔 중이던 소련군의 출동을 요청했지만 거절당했다. 더불어 소련은 동독 정부가 군병력을 동원해 유혈진압을 하려던 것도 막았다. 동독 공산당 내에서도 호네커에 대한 비난 여론이 들끓자 그는 10월 17일 자진 사퇴했다.
10월 18일 공산당 서기장에 오른 에곤 크렌츠는 공산당 독재하에서 개혁을 추진하겠다고 발표했지만 더 큰 반발을 불러일으켰다. 11월 4일 동베를린에서는 주민 100만 명이 모여 민주화와 통일을 요구하는 시위를 벌였다.
# 대변인 샤보프스키의 ‘말실수’가 부른 나비효과
이를 무마하기 위해 11월 9일 동독 공산당 중앙위원회는 ‘여행 허가에 대한 출국 규제 완화(여행법 개정안)’ 관련 법령을 발표했다. 당초 여행법 개정안은 다음 날부터 시행될 예정이었고, 동독 정부의 의도는 여행허가 범위를 확대해 주민 불만을 누그러뜨리고 불법 탈출 사태를 진정시키려는 것이었지, 완전한 여행자유화를 할 생각은 아니었다.
크렌츠 서기장은 11월 1일 소련 방문 당시 고르바초프에게 동독인들이 현금을 가지고 가지 않는 한 해외여행을 제한하지 않겠다고 약속했고, 11월 8일 완성된 여행법 개정안 초안도 ‘개인적인 해외여행 신청은 지금부터 특별한 전제조건 없이 할 수 있다’고 되어 있었다.
이는 여권과 비자발급 절차를 대폭 간소화한 것일 뿐 출국비자 없이 해외여행을 허락한다는 뜻은 아니었다. 동독에서는 여권을 받아도 출국비자를 받아야 해외여행이 가능했기 때문에 비자발급 과정에서 여행자유화의 속도를 조절할 생각이었다. 더욱이 새 여행법 어디에도 이 내용이 베를린장벽에 허용된다는 내용은 없었다. 베를린장벽은 2차 대전 승전국 4개국(영국·미국·프랑스·소련)의 관리하에 있었기 때문에 동독 정부가 결정할 사항은 아니었다.
1989년 11월 9일 저녁 6시 55분, 매일 열리는 기자회견이 1시간 동안 진행된 말미에 동독 공보담당 정치국원 샤보프스키가 여행법 개정안에 대한 설명을 시작했다. 그는 “잠정적 여행규칙에 따라 누구나 개인적 여행을 신청할 수 있고, 그에 따른 허가는 즉시 내려질 것이며, 각 지방 경찰에게는 영구이주 비자를 신청서 없이도 즉석에서 발급하라는 명령이 내려졌다”고 발표했다.
‘그 규정이 언제부터 발효되냐’는 이탈리아 기자의 질문에 “즉시, 지체 없이”라고 답했다. 한 기자가 ‘그것이 서베를린에도 해당되는가’라고 보충질문을 하자 샤보프스키는 “그렇다, 동독과 서독, 동독과 서베를린의 모든 국경 검문소가 다 해당된다”고 답변했다.
이것이 그 유명한 샤보프스키의 ‘말실수’다. 전날까지 휴가를 떠났다가 당일 복귀한 그는 기자회견 직전 당 서기장인 에곤 크렌츠로부터 법안을 전달받아, 반은 읽고 반은 대충 해석한 상태였다. 추가 질문이 이어졌지만 더 이상 답변이 없었고 많은 의문점이 남은 채 회견이 끝났다.
워낙 의외의 일이라, 회견 후 기자들은 궁금한 점이 많았지만 공식 발표문이 없어 나름대로 소설을 쓰다시피 기사를 작성해 보도했다. 저녁 7시 5분 ‘AP통신’이 가장 먼저 ‘동독이 국경을 개방했다’고 보도했고, 서독 공영방송인 ARD의 8시 뉴스에서도 같은 내용이 보도됐다.
많은 동서독 주민들이 샤보프스키의 회견과 TV 뉴스를 목격했고, 동서독 주민들 사이에선 “모든 여행제한이 풀리고 출국비자도 필요 없게 됐다”는 소문이 퍼졌다. 동독 주민들이 사실 여부를 확인하기 위해 국경 초소에 몰려들었지만, 초소 직원들도 내용을 몰라 답변할 수 없었다.
# 국경수비대도 어리둥절한 상태에서 국경 개방
밤이 깊어지면서 장벽에는 수천, 수만 명 단위로 늘어난 사람들이 몰려들어 국경 개방을 요구했다. 주민들과 대치한 국경수비대 경비 초소 요원들은 겁에 질려 상부의 지침도 받지 못한 채 밤 10시 30분 국경 바리케이드를 열어주었다. 베를린에서는 동서독 주민들이 함께 장벽에 올라 장벽을 부수기 시작했다.
국경수비대의 보고를 받은 내무장관도 상황을 모르기는 마찬가지였지만, 국경수비대의 결정을 추인했다. 자정쯤에는 거의 모든 국경통로가 열렸고, 베를린은 춤추고 환호하는 파티장이 되어 버렸다. 이어 3일 동안 동독 군인들이 장벽에 구멍을 뚫어 새로운 국경 출입구를 만들었고 2주 동안 300만 명이 서베를린과 서독을 방문했다.
베를린장벽 개방을 계기로 1989년 한 해 동안 34만 명이 동독을 탈출하면서 동독의 경제·사회 마비 사태가 악화됐다. 11월 13일 취임한 모드로우 총리는 위기 모면을 위해 서독과의 조약공동체 구성을 제안하는 한편, 12월 콜 서독 총리와의 회담에서 120억 마르크의 경제지원을 요청했다. 그러나 콜 총리가 근본적 개혁을 요구하면서 지원을 거부해, 그 이후부터는 서독의 요구에 끌려갈 수밖에 없었다.
그러는 중에도 동독 주민의 서독 이주는 계속되고 동독 경제가 더욱 악화되자 모드로우 정부는 1990년 2월 콜 총리와의 정상회담에서 화폐동맹 창설 원칙에 동의할 수밖에 없었고, 그 후 동독 공산당 정권은 급속히 몰락의 길로 들어서게 됐다.
우종국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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