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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음악일기] 슈퍼스타 되기 싫었던 EDM 슈퍼스타, 아비치

'레벨즈' '웨이크 미 업' 등 히트…라이브 공연과 투어 강행군에 건강 악화

2018.04.23(Mon) 14:58:05

[비즈한국] 한국 시각으로 4월 21일 토요일 새벽. EDM(Electronic Dance Music) 아티스트이자 프로듀서이던 아비치가 사망했다는 소식이 들렸습니다. EDM 팬은 큰 충격에 빠졌습니다. 티에스토부터 스티브 아오키 등 동료 DJ들의 추모가 이어졌지요. 그의 나이 불과 28세였습니다.

 

아비치는 EDM 씬의 슈퍼스타였습니다. EDM의 새로운 가능성을 만들어낸 뛰어난 프로듀서였기도 했지요. 오늘은 그의 짧은 삶에 대해 이야기해 보려 합니다.

 

아비치 앨범 ‘스토리스(Stories)’ 앨범 커버. 사진=아비치 페이스북


아비치의 본명은 팀 벌링(Tim Bergling)입니다. 그는 1989년 9월 8일에 태어났습니다. 어머니는 유명 배우 안키 리덴(Anki Lidén)이지요.

 

어릴 때 그는 기타 피아노 등 악기를 배웠습니다. 뛰어나지는 않았습니다. 그가 본격적으로 음악을 시작한 계기는 ‘FL 스튜디오’라는 프로그램만으로 음악을 간편하게 만드는 방법을 배운 후라고 합니다. 그는 순식간에 음악에 빠졌습니다.

 

아비치라는 이름은 불교 용어 ‘아비지옥’에서 따온 말이라고 합니다. 당시 음악인에게 필수 SNS였던 ‘마이 스페이스’의 아이디였지요. 인터넷 세대다운 유래입니다.

 

그의 마이스페이스를 보고 네덜란드의 프로듀서 ‘레이드백 루크(Laidback Luke)’가 그를 본격적으로 음악 포럼으로 소환했습니다. 아비치는 레이드백 루크의 포럼에 음악을 올리고, 다른 음악가들과 의견을 공유하며 성장하기 시작합니다. 이 포럼에서 그는 누구보다 많은 작업을 하는 프로듀서로 알려졌습니다.

 

아비치는 ‘팝의 수도’이자 ‘멜로디 강국’인 스웨덴의 음악 전통을 계승했습니다. 스웨덴의 음악 프로듀서 스웨디시 하우스 마피아(Swedish House Mafia)와 프랑스의 다프트 펑크(Daft Punk) 등, 기존 전자음악 뮤지션의 영향력이 느껴집니다. 무엇보다 강력한 멜로디의 마법이 중심에 있지요. 여기에 그는 자신만의 긴장감 조성 능력을 더했습니다. 단숨에 그의 스타일은 청자를 사로잡았습니다. 그만의 음악 스타일은 그의 첫 전 세계급 히트곡인 ‘레벨즈(Levels)’에서 들어볼 수 있습니다.

 

아비치의 ‘레벨즈(Levels)’.

 

레벨즈는 스웨덴, 노르웨이, 헝가리에서 차트 1위를 차지했습니다. 수많은 나라에서 톱10 차트에 오르기도 했죠. 연주곡에 가까운 곡이 빌보드 핫 100 차트 60위까지 랭크되는 성과를 거두었습니다. 명료한 멜로디, 지금은 일반화되었지만 당시에는 충격적이던 긴장감 조성 방식, 연주만으로 만들어내는 기승전결, 절묘하게 재해석된 에타 제임스의 목소리. 이 모든 요소가 레벨즈를 특별하게 만들었습니다.

 

이후 아비치는 대형 아티스트와 작업하며 화려한 커리어의 절정을 맞이합니다. 데이비드 게타와 함께한 ‘선샤인(Sunshine)’, 마돈나와 함께한 ‘걸 곤 와일드(Girl Gone Wild)’, 콜드플레이와 함께한 ‘어 스카이 풀 오브 스타즈(A Sky Full Of Stars)’ 등. 아비치 특유의 멜로디가 넘실대는 EDM을 원한 슈퍼스타들이 앞다투어 그와 함께 음악을 작업했습니다.

 

아비치의 ‘웨이크 미 업(Wake Me Up)’.

 

솔로 아티스트로서 발표한 그의 최대 히트곡은 ‘웨이크 미 업(Wake Me Up)’입니다. 기존 EDM에 블루그래스 음악의 어쿠스틱 느낌을 추가한 음악이었죠. 2013년 6월 발표된 이 곡은 순식간에 엄청난 성공을 거두며 빌보드 핫 100에 4위까지 오르며 아비치를 세계적 스타로 만들어줬습니다.

 

DJ 중에서도 젊은 편이던 1989년생인 그는 2012~2013년에 걸쳐 세계적인 스타가 되었습니다. 이 큰 성공이 오히려 비극의 씨앗이 되었습니다. 원래 아비치는 프로듀싱에 관심이 있어 음악을 시작했습니다. 라이브 디제이 퍼포먼스를 즐기는 사람이 아닌 거지요. 영국 ‘가디언’​ 케이티 베인(Katie Bain)​ 기자에 따르면, 그는 어디까지나 음악 기술자였지 셀럽이 되려는 마음은 없었다고 합니다. 자신의 일에서 가장 싫은 면이 사람들의 관심이라고 말할 정도였습니다.

 

아비치는 전 세계를 돌며 공연을 했습니다. 하루에 두 번씩 공연하고, 비행기에서 잠을 청하기도 하는 강행군이었지요. 매일 같은 라이브 공연과 투어에 그의 몸과 마음은 점차 피폐해졌습니다. 

 

2012년 UMF 마이애미에서 아비치를 소개하는 마돈나. 아비치가 댄스계 슈퍼스타로 자리매김하던 순간이다.

 

2014년 ‘​UMF(울트라뮤직페스티벌) 마이애미’​에 참여하려던 아비치는 돌연 공연을 취소합니다. 쓸개 제거 수술을 받아야 했기 때문이었지요. 이미 그의 몸은 알코올 과용으로 망가져 있었습니다. 2016년 아비치는 고민 끝에 라이브 공연 은퇴를 선언합니다. 

 

이후 그는 컨트리 음악에 영향을 받은 어쿠스틱한 음악을 발표하는가 하면, 본인의 음악 리믹스를 발표하고, 이미 약속된 공연을 올리고, 인스타그램에 작업물을 발표하는 등 자신만의 음악 여정을 이어나갔습니다. EP(Extended Play) 발표도 준비했습니다. 넷플릭스에서는 아비치의 이야기를 다룬 다큐멘터리 ‘트루 스토리스(True Stories)’를 공개했지요. 아비치의 숨겨진 아픔과 강점을 골고루 담은 다큐멘터리라는 평을 받았습니다.

 

콜드플레이의 ‘어 스카이 풀 오브 스타즈(A Sky Full Of Stars)’. 아비치가 프로듀싱했다.

 

아비치는 한국과도 접점이 많던 뮤지션입니다. 2016년 UMF 코리아에 헤드라이너로 초대되어 내한공연을 했습니다. 2012년에는 조권의 솔로 1집 타이틀곡인 ‘애니멀(Animal)’의 비트 편곡에 참여하기도 했죠. 이때 맺은 2AM, 빅히트 엔터테인먼트와의 인연이 이어져 아비치 최대 히트곡 ‘레벨즈’의 한국어판을 2AM의 임슬옹이 직접 가사를 붙여 부르기도 했습니다.

 

디제잉의 최전선인 투어에서는 물러났지만 아비치는 계속 대중의 관심 안에 있었습니다. 나이도 어렸지요. 그렇기에 이른 죽음은 더욱 세계의 음악 팬들에게 충격으로 다가왔습니다.

 

혹자는 아비치를 비롯한 최근 EDM 아티스트들이 일렉트로닉을 ‘싸구려 음악’으로 만들었다고 비판합니다. 태생적으로 현대음악에서 독립해 진중하고 정치적이었던 일렉트로닉 뮤직을 아무 생각 없이 춤추며 즐기는 오락에 최적화시켰다는 거지요.

 

하지만 그게 무슨 문제인가 싶습니다. 확실히 아비치의 음악은 밝고 단순하고 육체적입니다. 정치적 메시지는 없습니다. 복잡하고 화려한 진행도 없지요. 대신 온몸을 꿰뚫는 멜로디와 비트, 클라이맥스까지 서서히 대중을 이끄는 긴장감 조성이 있습니다. 그 단순한 쾌감이야말로 음악이 추구하는 본질이 아닐까 합니다. 

 

대중의 마음을 쥐락펴락하는 EDM의 제왕. 그러면서도 슈퍼스타로서의 삶은 견디지 못했던 소심한 슈퍼스타, 아비치였습니다.​ 

김은우 NHN에듀 콘텐츠 담당 writer@bizhankook.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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