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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해림 탐식다반사] 2014년 4월 16일 '그날'의 김밥

최순실 픽업 전 백화점에 들러 구매…그 김밥이어야만 했을까

2018.04.02(Mon) 16:41:50

[비즈한국] 검찰 발표에 따르면 2014년 4월 16일 2시 4분, 청와대에 근무하던 이영선 전 행정관은 업무용 차량을 이용해 한남동에서 명동 방향으로 남산1호터널을 통과했다. 그 차엔 최서원(이하 최순실)이 타고 있었다는 것이 검찰이 발표한 조사 결과다.

 

같은 날 오전 10시 19분, 당시 대통령이었던 박근혜가 관저 침실에서 나와 처음으로 상황을 인지했고, 그로부터 약 3시간쯤 지난 오후 1시경 이영선은 남산순환로를 이용해 현대백화점 압구정본점 지하에 도착, 김밥집에서 김밥을 산 것이 신용카드 결제 내역을 통해 밝혀졌다.

 

팔자 좋은 동선이다. 구조 불가능한 상태로 가라앉는 배를 두고, 복잡한 백화점 주차장에 차를 대고, 지하 1층에서 김밥을 살 생각을 한 청와대 직원이라니. 

 

검찰 발표를 인용한 보도에선 이영선이 그 김밥을 점심식사로 먹은 것으로 나왔지만, 과연 그가 먹었을지 의문이 남는다. 현재 다른 김밥집이 입점해 있지만 2014년 당시 입점해 있던 것은 ‘나드리 김밥’이었다.

 

서울시 강남구 미승빌딩 사진=이해림 제공

 

오래 전 송파구에서 이름을 날리던 김밥집을 현대백화점 측에서 ‘모셔간’ 것으로 알려지는데, 매출도 매우 좋았다는 이야기가 있다. 압구정동 현대아파트에서 자란 후배는 나드리 김밥의 꼬마김밥이 어린 시절 종종 먹던 식사였다고 하니 동네 노포쯤 되나 보다.

 

이영선이 이 김밥을 먹었을까? 채소가 많은 싱거운 맛으로 기억하는 나드리 김밥은 테이크아웃 전문점이었다. 항상 복잡했고, 그날 사람들은 세월호 이야기만 했다. 그 한 가운데서 ‘비선실세’를 픽업하러 외근 나온 청와대 직원이 맘 편히 김밥을 먹을 수 있었을까?

 

현대백화점 압구정본점 지하 1층에 현재 입점해 있는 모 김밥집 전경. 사진=이해림 제공

 

앉을 자리도 변변치 않아 김밥을 먹을 환경이 되지 못한다. 차에서 먹을 것이라면, 김밥을 살 곳은 주변에 많다. 최순실과 정유라, 이혼 전이던 정윤회가 함께 거주한 ‘미승빌딩’을 중심에 두고 오래된 유명 김밥집들이 즐비해 ‘김밥 트라이앵글’을 그릴 수 있을 정도다. 세 곳의 김밥집 모두 잠시 정차하기에 적당한 위치에 있어 백화점 지하보다 접근이 빠르다.

 

미승빌딩에서 가장 가까운 것이 압구정파출소 골목 안쪽, 현대아파트 상가의 ‘후랜드 김밥’이다. 짭짤한 간에 고슬고슬한 밥도 좋다. 꽉 들어찬 속이 클래식한 김밥 구성 그대로인 올드스쿨 김밥이다. 소고기 김밥엔 다진 소고기, 우엉, 당근, 오이, 달걀 지단, 단무지가 들어 있다. 크기를 줄인 꼬마김밥이나 한 입 크기의 유부초밥도 대표 메뉴다. 단무지처럼 생겼지만 짠맛이 툭 튀어나오는 노란 짠지도 이 집 시그니처다. 재벌가에서 대량주문이 종종 들어온다는 출처불명의 평판을 갖고 있다.

 

서울 강남구 압구정동 현대아파트 상가의 후랜드 김밥. 미승빌딩에서 도보 기준 302미터 떨어져 있다. 사진=이해림 제공

 

김밥 트라이앵글의 다른 두 축은 미승빌딩에서 서쪽으로 길을 건너, 소망교회 주변이다. 강남구 한 가운데의 거대한 종교 시설인 소망교회엔 최순실과 정유라가 나갔다고 하니 모녀도 단골일지 모른다. 이명박도 이 교회를 다녔다. 교회 주변엔 무릇 김밥집이 잘 된다.

 

‘소망김밥’ 역시 클래식하다. 소고기 김밥에는 다진 소고기, 우엉, 당근, 달걀 지단, 단무지에 시금치가 들어가 있다. 유부초밥에 사라다빵, 그리고 스팸 김밥까지 입맛 당기는 메뉴로만 채워져 있다.

 

서울시 강남구 신사동에 있는 소망김밥. 미승빌딩으로부터의 거리는 도보 기준 611미터. 사진=이해림 제공

 

소망교회에서 남쪽 골목으로 내려가면 인근 주민들로부터 ‘넘사벽’으로 사랑 받는다는 ‘신영김밥’도 있다. 오전에 대부분의 김밥이 팔려 오후에 가면 공치기 쉬운 집이다. 야채김밥엔 우엉과 당근, 오이, 단무지, 달걀 지단만 들어 있는데도 손이 자꾸 간다. 소망김밥과 신영김밥은 밥이 무른 편이라 부드럽게 씹힌다.

 

일대에서 으뜸으로 꼽히는 신영김밥. 소망교회 인근에 위치한다. 미승빌딩에서 걸으면 876미터 거리다. 사진=이해림 제공

 

성수대교 남단 ‘김밥 트라이앵글’은 세 집 모두 나무랄 데 없는 김밥을 만든다. 그 김밥집을 다 두고 굳이 나드리 김밥을 선택한 이유가 무엇인가. 꼭 그 김밥이어야 한다는 누군가의 식탐이 개입되었던 것이 아닐까.

이영선 본인의 집념이거나, 김밥 구매 직후 동선에 있었던 최순실의 집념이거나, 한두 줄, 서너 줄이 아닌 한 열 줄 정도 샀다면 2시 15분경 최순실이 관저에 도착한 이후부터 사태 수습을 위한 첫 회의를 시작한 박근혜와 문고리3인방 이재만 정호성 안봉근의 집념이 더해졌거나. 

검찰 발표에서 김밥 결제액이나 누가 먹었는지까지는 밝혀지지 않아 집념의 주인공은 알 수 없지만, 이미 보도된 이야기 하나는 떠올려볼 수 있다. 월간지 ‘여성동아’ 2017년 1월호에서 전 청와대 조리장 한상훈씨 인터뷰를 통해 공개된 바다.

그 시절 최순실과 문고리 3인방은 일요일마다 관저에서 회의를 했으며, 그때마다 출출하다며 김밥을 달라고 했다. 최순실은 집에 갈 때도 이 김밥을 싸 달라고 해 두세 줄씩 가져가곤 했다는 증언이다. 그리고 ‘그날’, 한 전 조리장은 박근혜의 점심 식사와 저녁 식사 1인분씩을 평소처럼 냈고, 그릇이 비워져 나왔다고도 밝혔다.

배가 복원력을 상실하고 가라앉는 것은 심각한 일이다. 그날 박근혜가 대통령으로서 제 역할을 제대로 했다 해도, 보고와 지시 체계가 정상적인 국가처럼 제대로 작동을 했다 해도, 해경의 초동 구조가 제대로 이뤄졌다 하더라도 구조에 실패했을 수 있다. 그 와중에라도 배가 고프면 김밥을 먹을 수도 있다. 바쁘고 정신없을 때 선택할 수 있는 음식 중 김밥만한 것이 없다. 먹기 간편하고, 맛도 좋은데다가 속도 든든하고 채소도 듬뿍이다.

누군가가 가라앉는 배를 신처럼 건져내지 못하고, 배고픔을 참지 못한 것을 두고 비난할 수는 없다. 무능을 덮으려 만들어낸 후안무치한 거짓말들에 억울하고 분할 뿐이다. 그 와중에 김밥이나 취향껏 골랐을 꼴을 상상하자면 기가 찰뿐이다.

이른 아침부터 TV 속보 화면을 보며 실시간으로 비극을 목격했던, 그날부터 며칠, 몇 주, 몇 달, 몇 해간 정상 업무가 힘들 정도로 전 국민적으로 큰 정신적 외상을 입었던, 아직도 그 광경을 떠올리거나 자료 화면을 보면 수도꼭지를 연 것처럼 눈물이 터지는 트라우마를 갖게 된 대부분의 우리들은, 그리고 현재까지도 가장 끈질긴 고통을 받아온 유가족들은 그 번거로운 집념이 읽히는 죄 없는 김밥을 어떻게 이해해야 하는 걸까.​

 

필자 이해림은? 패션 잡지 피처 에디터로 오래 일하다 탐식 적성을 살려 전업했다. 2015년부터 전업 푸드 라이터로 ‘한국일보’ 등 각종 매체에 글을 싣고 있다. 몇 권의 책을 준비 중이며, ‘수요미식회’ 자문위원으로도 활동 중이다. 페이스북 페이지에서도 먹는 이야기를 두런두런 하고 있으며, 크고 작은 음식 관련 행사, 콘텐츠 기획과 강연도 부지런히 하고 있다. 퇴근 후에는 먹으면서 먹는 얘기하는 먹보들과의 술자리를 즐긴다. 

이해림 푸드칼럼니스트 writer@bizhankook.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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