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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해림 탐식다반사] '산울림 1992' 오랜 술집은 늙지 않았다

10년여 전 불안한 20대의 추억 간직한 곳…성숙하게 변해 함께 자란 듯 '울컥'

2018.03.13(Tue) 12:16:12

[비즈한국] 10년 전이라고 대충 말하고 싶은 시절에 홍대 앞 서교동에 거주하며 밤마다 술집을 전전했다. 2002 한일 월드컵의 열기가 홍대 앞을 뒤덮을 때도(앗, 바로 들통났다) 어딘가 술집에서 그 열기에 취해 고주망태가 되어 있곤 했던 것이다.

 

홍대 정문 앞 동네는 지금이나 그때나 각각의 방식으로 너무 번잡스럽지만, 주로 입시 미술학원들이 들어차 있었던 와우교, 산울림 소극장 일대는 그때만 해도 인디 밴드 멤버들이나 ‘학교 앞’을 떠나지 않은 가난한 화가, 영화 아카데미의 예비 영화인들, 그리고 그들의 미래인 박봉의 영화인 등 ‘홍대스러운’ 사람들이 조용히 취해가던 동네였다. 

 

그때 나는 선배의 지시를 제대로 이해하는 것조차 어렵게 느끼던 귀여운 아기 기자였고, ‘난 커서 뭐가 되려고 이럴까’라는 열패감을 해소할 방법이라곤 클럽에 가서 미친 사람처럼 춤만 추거나, 새벽이 밝을 때까지 아무 말이나 큰 소리로 떠들며 술, 술에 취하는 것 외엔 몰랐다. 내 주변에 있던 많은 이들 역시 비슷한 열패감과 불안감을 느꼈던 것 같다. 우리는 어쩔 줄 몰라서 술이나 마시는 20대를 보내고 있었다.

 

돈도 능력도 없던 20대였던 시절, 우리가 누릴 수 있었던 최고의 호사는 산울림에서 알딸딸한 밤을 보내는 것이었다. 별것 아닌 비밀 이야기를 하고 싶게 만드는 구석구석 비밀스러운 구조. 내부는 깨끗해졌다는 것 외엔 큰 변화가 없어서 더욱 더 각별하다. 사진=이해림 제공

 

10년이라는 시간이 흐르고(여자의 시간은 여자 마음대로이니 독자가 혼란스럽더라도 계속 우기기로 한다), 10kg만큼 몸도 더 생긴 지금 내가 이렇게 훌륭한 사람이 되어 있을 줄 알았다면, 그때 그렇게까지 불안해할 필요는 없었을 텐데. 살다 보면 과거의 나에게 참견하고 싶은 말이 이렇게 하나씩 늘어가나 보다. 

 

이런 사람들이 사는 동네엔 당연히 싸고 편안한 술집들이 똬리를 틀기 마련인데 그 중 한 곳이 산울림 소극장 건너편, 신촌으로 이어지는 철길 건널목 골목 초입의 ‘산울림1992(산울림)’였다. 전통주점. 이 단어를 활자로 써보는 것도 실로 10년 만인데, 당시 흔하던 콘셉트의 술집이었다.

 

맥주는 비싸서 자주 못 마시고 ‘죽통주’라고, 당시 유행하던 말도 안 되는 술을 맛 좋다고 콸콸 마시고, 메뉴판의 가격부터 보고 싼 안주를 골라 먹던 곳인데, 그때는 대충 전 팔고 탕 팔고 인테리어가 한국민속촌 풍이기만 하면 모두가 전통주점이었다. 목로주점, 학사주점이라고 불러도 전혀 손색없는 그런 곳.

 

구조가 좋았다. 사이사이 요모조모 사적으로 느껴지는 골방 같은 공간이 얽혀 있다. 낮은 복층의 아래층에선 일고여덟 명이 우르르 몰려갈 때 부어라 마셔라 했고, 복층의 위층에선 구질구질한 남자에 대한 시시한 ‘걸토크’를 밤새도록 열 내며 하기에 최적이었다.

 

음식도 좋았던 것 같다. 잘 기억나지는 않지만 감자전 하나만은 명확히 기억난다. 이게 참 좋았다. 일단 값이 저렴한 축이었고, 맛이 좋았다. 손바닥만 한 크기로 소담스럽게 네 장을 포개내던. 짭짤한 간에 몽글몽글하게 씹히는 질감도 일품이었다고 기억한다. 

 

선배의 개떡 지시를 찰떡 같이 잘 이해하게 되고, 사회인으로서의 행동반경을 갖게 되고, 나도 선배가 되고 또 선배의 선배가 되는 동안 차차 산울림은 고요하게 잊혀 갔다. 해가 여러 번 지나자 “우리 그때 산울림에서 아침 8시까지 마시다가 술 모자라서 소래포구까지 갔던 거 기억나?” 할 때만 떠올리는 추억의 장소가 되고 말았다. 우리는 대부분 어른이 되었고, 그 중 ㅇ과 ㅅ은 어른이 되기 전에 죽었다. 그녀들을 떠올리게 하는 장소 역시 산울림이다.

 

‘봄내음’ 팝업 행사서 선보인 한국의 술들. 그리고 김도윤 요리사. 사진=이해림 제공

 

우리 미생들이 어른이 되는 동안 남겨진 산울림은 어땠을까. 쓸쓸했다고 한다. 우연한 자리에서 사장님 홍학기 씨를 만나, 지난 11일 ‘봄내음’ 팝업 디너 행사에 초대 받았다. 10년여 만의 발걸음이었다. 왜 그동안 단 한 번도 갈 일이 없었을까, 그건 자기부정 같은 것이었을까 하는 생각을 하며 익숙한 그 길을 걸었다.

 

산울림의 요리사 김도윤 씨가 봄을 주제로 담아낸 코스 음식을 먹으며 우리가 없던 산울림의 시간을 들었다. 수없이 많은 단골들이 뜸해지고, 골목의 활력도 죽으면서 산울림은 전에 없이 힘든 시간을 보냈다고 한다. 1992년 문을 열어 현재 사장님이 인수한 이래로 16년 동안 콘셉트와 상권이 천천히 유효기한을 넘겼던 것이다. 이민까지 고민할 정도였다고 하니 얼마나 쓸쓸한 기간을 보냈는지가 눈에 선하다.

 

그러던 중 전통주가 눈에 띄었다고 한다. 전통주점에서 전통주를 제대로 파는 것으로 판을 뒤집었다. 좋은 우리술들을 선별해 갖추고, 주방을 ‘개비’​하고 메뉴도 모두 개편해 진정한 ‘전통주점 산울림’으로 다시 태어난 것이 2016년의 일.

 

우리술이 전에 없이 회자되고 인정받는 큰 움직임과 함께 오래된 술집은 새 생명으로 활력을 되찾고, 이런 팝업 디너 행사를 통해 음식과 우리술을 대중에 소개하는 역할까지 맡고 있다. 홍학기 씨는 여전히 행복해 보인다. 우리로 북적대던 그때처럼.

 

차려낸 음식 중 하나였던 돼지고기 요리. 껍질을 바삭바삭하게 구운 제주 흑돼지 오겹살에 동치미 무와 전복장, 두유피, 그리고 갈치속젓을 곁들여 냈다. 사진=이해림 제공

 

현재의 산울림에 앉아 술과 식사를 즐기며, 주변을 둘러봤다. 변한 것이 없어서 울컥했다. 인테리어를 바꿀 여유가 없었으리라 생각됐기 때문이다. 실내금연 정책이 실행되며 담배 냄새가 싹 빠진 공간엔 손때만 남고 노쇠한 기운은 반들반들하게 닦여 나갔다.

 

대신 활짝 열린 깨끗한 주방, 그리고 현재의 음식을 하는 요리사가, 그리고 새로운 단골들이 가득 차 있었다. 단지 모든 것이 그대로이기만 했다면 애잔했을 텐데, 내가 변한 것과 마찬가지로 산울림도 변해줘서 울컥했다. 노포(老鋪)는 단지 세월을 보낸다고 해서 되는 것은 아니다. 함께 자라고, 나이 들어갈 수 있어야 진정한 노포다.

 

그 와중에 ‘소오름’이었던 일이 있다. 그 감자전이 일일이 강판에 갈아 전분을 가라앉혀 구워내던 것이었단다. 강한 힘으로 강판에 콱콱 갈아야 뭉개지지 않고 알알이 빠져나온 질감이 사는데 그걸 하느라 손목이 고장 날 지경이었다나. 거의 아무도 아니었던 시절의 내가 맛있어서 잘 먹은 거였다니. 먹보는 무식했을 때도 별 수 없이 먹보였구나, 하며 이번 생은 다시 20대로 돌아갈 수도, 10kg을 감량할 수도 없으니 다음 생이나 기약해 본다.

 

그나저나 지금의 감자전은 감자를 얇게 갈아 만든, 유행에 민감한 스타일의 치즈감자전이라고 한다. 이참에 다시 단골이 되어 볼까? 사장님이 발굴했다는, 위스키를 연상케 할 정도로 완성도가 좋은 제주의 귤 증류주 ‘신례명주’도 아직은 여기서만 판매하는 듯하니.​

 

필자 이해림은? 패션 잡지 피처 에디터로 오래 일하다 탐식 적성을 살려 전업했다. 2015년부터 전업 푸드 라이터로 ‘한국일보’ 등 각종 매체에 글을 싣고 있다. 몇 권의 책을 준비 중이며, ‘수요미식회’ 자문위원으로도 활동 중이다. 페이스북 페이지에서도 먹는 이야기를 두런두런 하고 있으며, 크고 작은 음식 관련 행사, 콘텐츠 기획과 강연도 부지런히 하고 있다. 퇴근 후에는 먹으면서 먹는 얘기하는 먹보들과의 술자리를 즐긴다.   

이해림 푸드 라이터 writer@bizhankook.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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