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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춘욱 경제팩트] 혁신은 왜 '여전히' 미국에서 나올까

첨단기술 공정은 몸으로 익히는 '암묵적 지식' 스카우트나 카피로는 따라할 수 없어

2018.02.12(Mon) 10:06:15

[비즈한국] 지난번 글에 삼성전자의 혁신을 썼더니, 많은 분들이 의견을 들려주었다. 그 가운데 가장 흥미로운 것은 각 부서의 ‘이기주의’를 과잉재고의 원인으로 지목한 대목이었다. 간단히 말해, 각 부서가 주어진 눈앞의 핵심 목표(Key Performance Index, KPI)를 달성하기 위해 주변 보지 않고 달려가느라 지나치게 많은 재고를 만들었고 이게 전체 공정의 비효율을 초래했을 수도 있다는 이야기였다. 결국 전체적인 시각에서 공정을 보고 조언을 해주는 사람이 필요하며, 더 나아가 조언해주는 사람을 배척하지 않고 수용하는 태도가 더 중요하다는 결론에 도달하는 것 같다. 

 

그런데 이 대목에서 한 가지 궁금증이 제기된다. 아예 공정에서 ‘재고’를 최소화하면 안 되나? 

 

장영재 박사의 책 ‘경영학 콘서트’에는 이 아이디어를 실현에 옮겼다가 큰 곤욕을 치른 사례가 소개되어 있다. 

 

세계 최대의 컴퓨터 업체였던 휴렛패커드(HP)의 미국 오리건주에 위치한 프린터 생산공장에서 회의가 열리고 있었다. (중략)

“이미 들어서 아시겠지만 현재 신규 프린터 생산 라인의 생산물량이 목표치의 50%에도 채 미치지 못하고 있습니다. 라인을 가동한 지 이미 몇 주가 지나 이제 본격적으로 목표 생산량에 도달해야 하는 시점인데 목표 생산량 달성은커녕 문제의 근원조차 파악하지 못한 상황입니다.” -책 236쪽

 

세계 프린터 시장을 장악한 HP는 최첨단 공장을 준공한 후 큰 곤욕을 치렀다. 사진=information-age.com


HP는 세계 프린터 시장을 장악한 IT 산업의 강자다. 그런데 왜 최첨단 설비를 갖춘 공장 준공 이후 큰 곤욕을 치렀을까? 

 

장영재 박사는 HP가 새로운 생산라인에 린 생산(Lean Production) 방식을 서둘러 도입한 게 문제를 일으켰다고 지적한다. 여기서 린 생산방식은 도요타 자동차에 의해 일대 유행이 된 생산 방식으로, 말 그대로 군살 없이 근육질로만 이뤄진 날씬하고 기민한 방식이다. 최대한 재고를 줄이는 것은 물론, 주문에서 발주까지의 시간(Lead Time)을 단축하기 위해 인력이나 생산설비 등 생산능력을 필요한 만큼만 유지하면서 생산 효율을 극대화하는 생산방식이다. 

 

공장장이 급하게 진화에 나섰다. 

“다들 진정하세요. 어차피 라인이 이렇게 설계된 건 어쩔 수 없는 것이고 생산에 도입한 린 생산방식이 문제의 원인인지 아닌지도 아직 모르는 상황입니다. (생산) 부장님의 말씀을 정리하자면, 이번 라인은 완전 생산자동화를 도입한 라인이고, 기계들이 기존 기계들에 비해 5% 정도 기계 고장 빈도가 높습니다. 그리고 이 라인은 린 시스템을 도입해 공장의 생산 재고가 거의 없이 운영됩니다.” 

그런데 공장장은 갑자기 무슨 생각이 난 듯 잠시 말을 멈추었다 다시 조심스레 입을 열었다.

“혹시 각각의 문제를 보면 문제될 게 없어도 이 작은 문제들이 서로 엉켜 큰 문제를 일으킨 게 아닐까요?” -책 243쪽

 

재고를 줄이고 생산의 효율을 추구하는 새로운 생산방식은 대체 어디서 문제를 일으켰을까? 이에 대해 MIT 대학교의 스탠리 거슈윈 교수는 기계고장의 존재를 인정한 공정설계가 필요한데, HP는 이 점을 놓쳤다고 지적한다. 

 

현장의 공장 운영자들에게 ‘기계 고장’은 현실이자 공장 운영 문제의 핵심이다. 아무리 기계 관리를 잘해도 인간이 만든 물건인 이상 고장은 불가피했다. (중략) 즉 공장 운영자들에게 필요한 것은 기계 고장을 무시한 비현실적인 운영 정책이 아니라 기계 고장과 같은 현실적인 문제를 수용한 좀 더 활용 가능한 연구였다. (중략)

간단한 브리핑이 끝난 후 거슈윈이 질문했다. 

“이 생산라인에 처음 기대했던 생산량과 현재 실제 생산량이 각각 얼마죠?”

“이 라인은 월 30만 대의 프린터 생산을 목표로 건설된 라인입니다. 하지만 이 목표 생산량의 반도 채우지 못하고 있습니다.”

그러자 다시 물었다. 

“그럼 각 기계의 생산성은 어떻습니까? 각 기계들이 30만 대를 생산할 능력은 있나요?”

“물론입니다. 각 기계들의 생산능력이 최소 35만 대는 됩니다. 하지만 이번 기계들은 신규 프린터 생산을 위해 새로 설계된 기계들이라 기계 고장률이 약 5% 됩니다.” -책 248~249쪽

 

마지막 공장장의 말이 이미 답을 알려주고 있다. 공정에 핵심적인 기계가 대략 10대 있다고 가정할 때, 이 기계 고장(확률 5%)이 동시다발적으로 벌어지면 문제가 없다. 그냥 같이 쉬면서 고치면 된다. 문제는 기계고장이 어디에서 날지 아무도 모른다는 점이다. ​​

 

예를 들어 10개의 핵심 기계가 한 대씩 번갈아 고장 나면, 이 설비는 50% 가동률에 그칠 수도 있다. 그럼 어떻게 해야 할까? 

 

이에 대한 거슈인 교수의 진단은 간단했다. 각 공정마다 재고를 늘리라는 것이었다. 

 

예를 들어 수십 개의 공정으로 이루어진 생산 라인에서 각 기계들의 고장률을 고려했을 때 한달 간 100개를 생산할 수 있어도 재고가 없으면 공장가동률은 수십 퍼센트 떨어진다. 많은 사람들이 각각의 기계가동률이 공장가동률하고 일치할 거라 생각하는 데, 이는 명백한 오산입니다. (중략)

전체 공장가동률이 기계가동률과 같아지려면 생산재고가 충분히 공장 내에 있어야 합니다. 그리고 충분한 생산재고가 있으려면 생산재고를 저장할 공간도 필요하죠.” -책 249~250쪽

 

1996년 삼성전자 반도체 공장의 생산성 부진 이유는 ‘과도한 재고’ 때문이었는데, 반대로 HP 프린터 공장의 공장가동률 하락은 지나치게 적은 재고 때문이었던 셈이다. 결국 정답은 없다. 각 산업의 특성과 생산 기계에 맞게 적절하게 공정을 설계하고 재고를 보유하는 것이 진정한 의미의 ‘노하우’인 셈이다. 

 

누군가 “(경쟁기업이) 삼성전자의 핵심인력을 많은 연봉 줘서 스카우트하고, 또 기술을 베끼면 얼마든지 따라잡을 수 있는 것 아니에요?”라는 질문을 한 적 있는데, HP나 삼성전자의 사례를 잘 살펴볼 필요가 있다. 

 

첨단기술 공정은 몸으로 익히는 ‘암묵적 지식’으로 인력을 스카우트하거나 기술을 베끼는 것으로는 따라잡을 수 없다.


지식은 두 가지가 있다. 하나는 암묵적 지식(tacit knowledge)이며, 다른 하나는 명시적 지식(explicit knowledge)다. 명시적 지식은 매뉴얼이나 기계 설명서, 혹은 특허 문서로 설명할 수 있는 지식이다. 반면 암묵적 지식은 문자나 언어로 쉽게 전달할 수 없는 지식이다. 몸으로 체득하면서 스스로 배워야 하는 종류의 일로 HP나 삼성전자의 공정기술이 여기에 해당된다고 볼 수 있다. 결국 암묵적 지식을 체득하기 위해서는 긴 시간에 걸친 신뢰관계의 구축과 인적 접촉, 그리고 시행착오가 필요하다. 

 

그래서 각 기업들은 공정기술을 몸으로 체득한 명장(名匠)이 나이 들어 은퇴하더라도 어떻게든 후학에게 암묵적 지식, 즉 노하우를 전수할 수 있게 다양한 제도를 도입한다. 물론 이 명장을 다른 회사에서 스카우트할 수 있다. 그러나 그의 지식은 특정 장소와 인적관계에 특화된 것이기에 다른 곳에서도 그의 노하우가 작동하리라는 보장은 없다는 것도 알아두면 좋을 것이다.

 

특허나 스카우트 등으로 손쉽게 선두주자의 기술을 습득할 수 있다면, 세계 경제는 이미 인도와 중국, 인도네시아, 터키, 필리핀 등 인건비가 저렴한 인구대국이 주도하고 있을 것이다. 그러나 세계는 여전히 미국과 유럽, 그리고 일본 같은 선진국이 주도하며, 세계 시장을 제패하는 혁신적 신제품은 항상 미국에서 먼저 개발되는 것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한국기업들, 그리고 정부와 학계가 더 노력해 MP3 플레이어처럼 세계시장에서 큰 반향을 얻는 신제품이 속속 출시되고 또 표준을 주도하는 그날이 오기를, 더 나아가 공정기술의 노하우가 잘 계승되어 더욱 경쟁력이 강화되기를 바라는 마음이다.

홍춘욱 이코노미스트 writer@bizhankook.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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