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악마는 프라다를 입는다? 흰 운동화를 신는다!

그라치아·아레나 전 편집장 안성현 새 책 '이건 어디까지나 제 생각입니다만' 속의 패션 에디터

2018.01.05(Fri) 15:20:24

[비즈한국] 영화 ‘악마는 프라다를 입는다’에서 ‘악마 편집장’ 미란다는 명품을 휘감고 패션쇼의 프런트 로에 앉아 셀렙들과 이야기를 나눈다. 성격은 지독해도 능력은 어찌나 대단한지, ‘촌닭’인 앤디조차 멋지고 세련되게 변신시킬 정도다. 그런데 현실은 어떨까? 패션잡지 편집장은 정말 그렇게 화려하고 멋질까? 

 

결론부터 말하자면, 그렇지는 않은 것 같다. 

 

영화 ‘악마는 프라다를 입는다’에서 메릴 스트립이 연기한 패션잡지 편집장 미란다.


여성 패션지 ‘그라치아’, 남성 패션지 ‘아레나’를 창간하고 10여 년간 편집장을 지낸 안성현. 그녀의 책 ‘이건 어디까지나 제 생각입니다만’에 따르면 패션지 에디터의 현실은 화려함과는 거리가 멀다. 명품 드레스에 킬힐은 언감생심. 검은 일자 슬랙스에 흰 운동화를 신는 ‘패션 노동자’일 뿐이다. 

 

패션 위크 때 프런트 로에 앉아 있으면 이 대비가 선명하다. 화이트 운동화를 장착한 다소 거센 무리들, 그 맞은편엔 알록달록 아찔한 스틸레토 힐을 신은 고운 무리들. (어쩐지 짠하지만) 흰 운동화를 장착한 라인이 우리 에디터 팀이다. 맞은편 스틸레토 힐 팀은 빛의 세례를 받는 스타 군단들. (중략) 일자형 슬랙스에 흰 운동화. 누군가에게 멋대가리 없는 유니폼처럼 보여도 이 바닥에서 뼈가 굵은 내겐 정겨운 갑옷이자 신성한 작업복이다. -457~459쪽 ‘패션 업계 여자들은 흰 운동화를 신는다’

 

‘이건 어디까지나 제 생각입니다만’은 안성현 전 편집장이 11년 동안 써온 에디터스 레터를 담았다. 에디터스 레터는 마감의 끄트머리에서 마지막 기운을 끌어모아 독자에게 쓰는 편지. 그렇기에 “분칠로 단장하지도, 성근 눈썹을 메우지도 않은 맨얼굴 같은 글”이 펼쳐진다.

 

물 위에서는 우아하지만 물 아래에서 쉼 없이 발을 휘젓는 백조. 패션지가 딱 그렇다. 명품과 스타로 가득한 책을 매달, 심지어 격주(그라치아는 초기 몇 년간 격주로 출간했다)로 발행하기 위해 에디터들은 야근을 밥 먹 듯 한다. 더욱이 모든 꼭지와 사람을 지휘하는 편집장은 때론 ‘극악무도’해져야 한다.

 

극악무도한 나는 ‘무슨 일이 있어도 꼭 모셔, 안 되면 무릎이라도 꿇어!’라고 목울대를 나팔수처럼 울려댔다. 그뿐인가. 새벽에도 문자를 날렸다, 스토커처럼. ‘잘돼가나 제군들 흐흐흐 섭외가 안 됐는데 잠이 오나 흐흐흐 마감 안 되면 죽을 각오하게 흐흐흐.’ 그럼에도 불구하고 새 아침이 되면 그들은 말간 얼굴로(질려서 창백해진 걸 수도 있겠다) 출근해 좋은 소식 하나씩 착한 제비처럼 물어다놓고 또 길을 떠났다. (중략) 비정한 나는 또다시 소리친다. 안 되는 건 없다고, 다만 안 할 뿐이라고. 참, 매정한 사람이다, 나는. -145쪽 ‘남자 복이 많습니다’

 

아레나, 그라치아 등 패션지 편집장을 역임한 안성현의 책 '이건 어디까지나 제 생각입니다만'에 담긴 패션지의 현실은 화려하지만은 않다. 사진=아레나 제공


얼굴에 드러나는 피로를 립스틱으로 애써 ‘위장’하며 매달 마감을 치르는 삶. 어쩌면 그것은 대한민국 워킹우먼의 현실이기도 할 것이다.

 

슈트가 비즈니스 전장의 전투복이라면 립스틱은 야전 위장술 같은 것. ‘나의 피곤을 적에게 알리지 말라.’ (중략) 워킹 우먼의 삶에서 ‘피로 눌러 감추기’는 일종의 필살기다. 그래서 조직의 윗사람일수록 ‘참 체력 좋다’는 말을 듣는 거다. (중략) 우리의 립스틱은 로맨스와 섹시 무드를 위한 도구가 아님을, 우리의 립스틱은 물파스와 멘소래담 로션 같은 응급처치 도구임을 다시 한 번 되새기면서. -462쪽 ‘립스틱 없인 못 살아’

 

​초짜 기자였던 저자가 편집장이 되는 동안, 두툼한 원고지 다발은 노트북과 스마트폰으로 바뀌었다. 공짜 콘텐츠가 비처럼 쏟아지는 시대. 도달률이니, 인스타니, 종이매체에 몸담은 사람이라면 필시 저자와 같은 고민을 안고 있을 것이다. 

 

SNS, 디지털, 인스타, 도달률, 멀티유즈, 팬 수, 모바일앱, 어쩌구저쩌구, 아이고야. 나 역시도 불과 3~4년 전엔 이런 영역을 메인 업무로 삼게 될 거라고 상상도 못했으니까. 안성현에게 ‘올 일 년 동안 뭘 했니?’라고 물으신다면 단박에 대답할 수 있다. 지면 콘텐츠의 디지털화를 고민하고 디지털과 지면 콘텐츠의 양립 방식을 연구했다고. -432~433쪽 ‘대대손손 콘텐츠는 돈이다’

 

패션계와 잡지에서 시작된 이야기는 워킹우먼의 현실과 콘텐츠 산업의 미래에까지 다다른다. ​​​에디터를 꿈꾸는 사람이라면 이 책에서 화려함 뒤의 ‘땀’을 읽을 수 있을 것이다. 콘텐츠 업계에서 일하는 사람이라면 고민을 나눌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당신이 워킹우먼이라면 따뜻한 위로를 받을 수 있을 것이다.​

김남희 기자 namhee@bizhankook.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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