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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음악일기] 프로듀서 닥터 드레, 그의 결정적 순간들

웨스트코스트힙합 정립, 힙합 최초 빌보드 1위, 에미넴과 켄드릭 라마 발굴

2017.11.22(Wed) 17:44:11

[비즈한국] 팝 음악 역사상 가장 중요한 프로듀서는 누구일까요? 많은 대답이 있겠죠. 결론적으로 말하면 저는 ‘닥터 드레’라고 생각합니다.

 

팝 음악 역사상 가장 중요한 프로듀서 닥터 드레. 사진=닥터 드레 홈페이지


프로듀서는 작곡가와 조금 다른 개념입니다. 음악의 전권을 쥐고 제작하는 사람이라 할 수 있겠죠. 한국으로 예를 들면 헨리가 ‘작곡하는 가수’라면 이수만 프로듀서는 ‘프로듀서’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이런 의미에서 비틀즈의 존 레넌, 폴 매카트니는 전설적인 작곡가지만 프로듀서라 부르기는 망설여집니다. 악보도 보기 어려웠던 이들은 상당히 많은 부분을 스태프에게 맡겨야 했으니까요. 데이빗 포스터, 베이비 페이스 등 ‘전업 프로듀서’인 스태프가 가장 이 부분에서 잘 어울리는 후보군이겠지요. 곡 전체의 사운드와 비전을 기획하고, 다양한 직군의 재능을 모아 이를 실행하는 리더 말입니다.

 

그중에서 저는 닥터 드레가 가장 중요한 존재라고 생각합니다. 팝 역사를 한두 번 바꾼 게 아니라 몇 번씩 뒤집어 버렸기 때문입니다. 오늘은 ‘​역사를 바꾼 프로듀서’​ 닥터 드레에 대해 이야기해보겠습니다.

 

N.W.A의 스트레이트 아우타 컴튼(Straight Outta Compton).

 

닥터 드레는 동네의 잘나가는 디제이였습니다. 사업가 이지이(Eazy-E)는 닥터 드레와 닥터 드레의 사촌 아이스 큐브를 필두로 다양한 재능을 모아 힙합 그룹을 만들었습니다. 그룹의 이름은 엔더블유에이(N.W.A.), ‘성깔 있는 검둥이들’(Niggaz With Attitude)이라는 뜻이었습니다.

 

이 그룹은 어마어마한 갱스터 랩을 쏟아냈습니다. 노예 해방이 된 지 100년, 흑인 학교 차별이 철폐된 지도 20년이 지났지만 시스템의 차별은 끝나지 않았죠. 엔더블유에이는 공격적으로 사회를 비판하면서 흑인사회의 한을 풀어냈습니다. 가장 올바른 반응은 아닐지언정 가장 리얼한 반응이긴 했습니다.

 

엔더블유에이의 첫 번째 음반은 미지근한 반응을 얻습니다. 멤버 교체도 겪었지요. 엔더블유에이는 우여곡절 끝에 1집 스트레이트 아우타 컴튼(Straight Outta Compton)을 만듭니다. 경찰과 미국 정부부터 미국 사회 자체에 욕설을 날린 문제작이었습니다.

 

이 음반은 미성년자 구매를 제한하는 ‘페어런탈 어드바이저리(Parental Advisory)’ 표시가 최초로 들어간 앨범입니다. 뮤직비디오 등의 홍보도 전무하다시피 했습니다. 그럼에도 입소문만으로 200만 장이 팔렸습니다.

 

2집 니가즈포라이프(Niggaz4life)는 더 큰 성공을 거둡니다. 1991년 6월 22일. 이 앨범은 앨범 차트 1위에 선정되었습니다. 힙합 앨범으로 역사상 최초였습니다.

 

닥터 드레는 엔더블유에이의 프로듀서였습니다. 음악을 담당했죠. 1집에서는 갱스터 랩의 원형을 보여줬습니다. 2집에서는 최면적인 신스와 휭크 샘플링을 선보입니다. 동부의 어둡고 둔탁한 비트와는 전혀 다른 이 음악을 사람들은 ‘웨스트 코스트 힙합’이라 부르기 시작합니다.

 

1집에 비해 현재에 와서는 미지근한 평가를 받는 엔더블유에이 2집이 빌보드 1위를 차지한 이유는 간단합니다. 그 전까지 빌보드 차트가 부패했기 때문이죠. 당시 빌보드 차트는 엉터리로 집계되었습니다. 라디오 방송국은 방송 횟수를 마음대로 조작해 공유했습니다. 음반 매장 점주들도 매출을 정직하게 알려주지 않았죠. 음반사들의 로비도 필요했고, 본인들의 입맛에 맞는 스타를 지속적으로 밀어줘야 하는 이유도 있었기 때문입니다.

 

빌보드는 1991년에야 실제 판매자료를 집계하기 시작했습니다. 여론조사 기관 닐슨을 고용해 방송 횟수도 정확하게 확인했죠. 덕분에 신뢰할 수 있는 집계가 나왔습니다.

 

집계방식을 바꾸자 차트도 출렁였습니다. 집계 방식이 바뀐 지 1주일 만에 엔더블유에이의 앨범이 1위를 차지합니다. 그 전까지 방송국, 음반 매장을 주도하던 백인에게 차별받아 인기를 인정받지 못했던 힙합이 정상의 자리에 오른 겁니다. 그 첫 번째 앨범이 ‘경찰 엿 먹어라(F*ck Tha Police)’​라고 외쳤던 엔더블유에이라는 사실이 더욱 의미심장하죠,

 

2집은 1집보다 더 드레의 영향력이 커진 앨범이었습니다. 1집에서 본인은 물론 다른 멤버의 가사도 도와준 걸로 알려진 아이스 큐브가 이지이와 계약 조건이 맞지 않아 다툼 끝에 그룹을 나갔기 때문이죠. 2집은 아이스 큐브의 날 선 가사보다는 닥터 드레의 최면적인 프로듀싱이 더 훌륭했다고 알려졌습니다. 하지만 이지이는 점점 더 계약조건을 악화시켰고, 닥터 드레 또한 이를 참지 못하고 회사를 나옵니다.

 

닥터 드레 1집의 너싱 버트 어 ​G​ 생(Nuthin’ but a ‘G ​Thang), 닥터 드레는 스눕독과 함께 웨스트 코스트 힙합, 지펑크를 힙합의 중심으로 만들었다.

 

이제 솔로로 인정받아야 할 시간입니다. 닥터 드레는 엔더블유에이 2집에서 시도했던 지펑크 스타일을 발전시킵니다. 당시는 미국 동부에서 노토리어스 비아이지, 우탱클랜, 나스 등 힙합의 전설이 후일 힙합을 상징하게 되는 명반을 쏟아내던 시절이었습니다. 닥터 드레는 서부 힙합의 자존심을 갖고 서부만의 자극적인 힙합을 만들기 시작합니다.

 

또 LA를 중심으로 서부의 래퍼들을 모아서 피처링 진도 꾸렸죠. 닥터 드레는 프로듀서이지, 래퍼는 아니었습니다. 훌륭한 퍼포머, 래퍼를 발굴해 이들과 함께 작업하는 방식을 취했습니다.

 

이렇게 완성된 닥터 드레의 솔로 앨범 ‘더 크로닉(The Chronic)’은 1990년대 웨스트 코스트 힙합을 상징하는 음악이 되었습니다. 흑인 휭크 밴드를 절묘하게 샘플링한 리듬. 고음역에서 사람을 자극하는 강렬한 신스. 갱스터 느낌이 물씬 풍기는 거친 가사. 이 모든 게 합쳐진 닥터 드레 1집은 사람들이 흔히 생각하는 힙합이 대명사가 될 정도로 큰 성공을 거두었습니다.

 

솔로 앨범 외에도 닥터 드레는 활발한 활동을 합니다. 스눕독, 투팍 등 전설적인 래퍼들과 음악 작업을 한 거지요. 절정의 갱스터 힙합을 보여주는 스눕독의 1집도 닥터 드레의 프로듀싱을 거쳤습니다. 이 앨범은 신인으로는 처음으로 발표하자마자 빌보드 200 차트에서 1위를 거머쥐며 서부 힙합의 영광을 보여줬습니다. 테디 라일리의 그룹 블랙스트리트(Blackstreet)의 노 디기티(No Diggity)에 피처링해서 빌보드 1위에 자리에 오르기도 했죠. 이때까지가 그의 제1의 전성기라 볼 수 있겠습니다.

 

닥터 드레 2집의 포갓 어바웃 드레(Forgot About Dre). 이 곡에서 닥터 드레는 신출내기 백인 래퍼를 비서실장처럼 끌고 다녔다. 백인 루키는 미치광이같이 종잡을 수 없으면서도 화려한 랩으로 힙합계를 충격으로 몰아넣었다. 그가 바로 에미넴이다.

 

이후 닥터 드레는 투팍이 있던 데스로우 레코드와 불화 끝에 나오는 등 부침을 겪어야 했습니다. 동부와 서부의 대립이 격화되는 도중에도 드레는 나스, 제이지, 엘엘 쿨제이 등의 동부 아티스트와도 음악을 만드는 등 동부 서부를 가리지 않고 활발한 작업을 합니다. 활발한 활동 중에서도 그는 서부에서 자신이 키웠던 스타와는 다른 새로운 얼굴의 필요성을 느끼고 있었습니다.

 

이때 닥터 드레는 슈퍼 신인을 발견합니다. 랩 배틀을 전전하던 백인 디트로이트 래퍼, 에미넴이었습니다. 아무도 알아보지 못했던 그에게서 가능성을 발견한 닥터 드레는 그를 오버그라운드에 올리며 메이저 데뷔 앨범을 제작합니다. 그는 모두가 알다시피 힙합 역사상 최고의 스타가 되지요.

 

힙합 음악 사운드의 표준이 된 닥터 드레의 전설적인 앨범 ‘2001’.


1999년, 닥터 드레는 7년 만에 솔로 2집을 내놓습니다. 2001입니다. 2집에서 닥터 드레는 기존의 지펑크와는 전혀 다른 음악을 만듭니다. 과거의 자극적인 신스를 위주로 한 최면 같은 음악을 만들었다면, 이번에는 묵직한 스네어 비트와 베이스라인을 위주로, 완벽하게 밸런스가 갖춰진 절제된 힙합 사운드를 만든 겁니다. 

 

이 앨범 이전까지 닥터 드레는 주춤하고 있다는 평가가 많았습니다. 에미넴이 정상에 오르기 전이었고, 에미넴 외에 많은 음악이 상업적으로 성공적이지 않았지요. 변화가 필요했던 셈입니다.

 

2001은 지금 들어도 촌스럽지 않은 깔끔한 사운드를 보여줍니다. 이 밸런스 있는 닥터 드레만의 사운드는 이후 몇 년간 힙합, 나아가 팝 시장을 지배했습니다. 닥터 드레는 스눕독과 에미넴을 돌격 대장으로 삼아 본인의 비트로 시장을 점령해 버렸습니다. 제2의 전성기가 도래한 거지요.

 

2001은 1999년에 만들어진 음악임에도 ​지금까지 ​힙합 사운드의 교본으로 불립니다. 사운드에서 힙합에 가장 큰 영향을 미친 음반 가운데 하나라 할 수 있겠지요. 한 예로 싸이는 사운드 체크를 할 때마다 우선 2001을 틀어보면서 사운드의 밸런스를 느낀다고 합니다. ‘정답’을 미리 볼 때 활용할 정도로 완벽한 밸런스를 자랑하는 음악이었다는 이야기겠지요.

 

켄드릭 라마(Kendrick Lamar)의 컴튼(Compton). 닥터 드레는 켄드릭 라마를 지원사격하며 힙합 역사상 최고의 메이저 데뷔 앨범을 화려하게 마무리했다.

 

닥터 드레는 훌륭한 래퍼는 아니였습니다. 엔더블유에이 시절과 솔로 1집의 랩은 분명 조악한 면이 있었습니다. 2집에서는 좀 나았지만 제이지, 에미넴 등의 동료 래퍼들이 대필을 해줬죠. 이후에도 닥터 드레는 랩에서는 자신감을 보여주지 못했습니다.

 

대신 그에게는 누구보다 뛰어난 재능을 알아보는 감각이 있었습니다. 에미넴을 슈퍼스타로 만든 이후에도 닥터 드레는 50센트 등 슈퍼스타를 키워냈지요. 퍼포머로서 솔로 앨범을 만들기보다는 조력자이자 프로듀서의 자리에서 경력을 유지한 겁니다.

 

음악 유행에서 많이 벗어낫다고 알려진 2010년대에도 그는 슈퍼스타를 발굴합니다. 현재 힙합의 정상에 서 있는 남자, 켄드릭 라마입니다. 재밌게도 켄드릭 라마 또한 닥터 드레와 같은 컴튼 출신이고, 닥터 드레와 투팍을 보며 래퍼의 꿈을 키웠습니다. 켄드릭 라마가 메이저에 데뷔하기 전, 닥터 드레는 유튜브에서 그를 발견합니다. 직접 만난 그는 (결국 취소한) 본인의 3집 작업을 함께 하고, 켄드릭 라마의 곡에 피처링도 참여합니다.

 

세상을 바꾸는 변화를 한 번만 해도 엄청난 성공일 겁니다. 닥터 드레는 세상을 뒤집는 성공만 세 번 이룩했습니다. 묵직한 2000년대 힙합 사운드를 완성했습니다. 그 이전에는 웨스트 코스트 힙합을 정립했지요.

 

무엇보다, 그는 최초로 힙합으로 미국 빌보드 차트 1위에 올랐습니다. 시대를 수차례 바꾼 파괴력 있는 음악을 만드는 프로듀서, 닥터 드레였습니다. 

김은우 아이엠스쿨 콘텐츠 디렉터 writer@bizhankook.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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