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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년변호인] "평화비용이라고 생각해 주시면…" 판사 말에 '심쿵'하긴 처음이야

민사소송은 차가운 서류끼리의 싸움…판사의 온기가 스미자 대립은 무너졌다

2017.09.11(Mon) 17:57:06

[비즈한국] “모두 일어서세요.” 

 

재판 시작 전 판사가 법정 안으로 들어서면 법원 경위가 근엄하게 말한다. 방청석과 변호사석에 앉은 사람들 모두가 일어서고 판사가 가볍게 목례를 하며 판사석에 앉으면 법원 경위가 다시 말한다. “모두 앉으세요.” 

 

판사의 권위는 이런 의전에서 드러난다. 솔직히, 눈으로 보이지 않는 진짜 권위는 잘 볼 수 없다. 판사의 인간됨 말이다. 민사재판에서는 주로 서류만 왔다 갔다 할 뿐 법정에서 변호사와 판사가 말을 길게 섞을 일도 없고, 어차피 갈 데까지 간 사람들이 재판하러 나오는 것이니 판사가 당사자들에게 이러쿵저러쿵 의견을 말하지도 않는다. 건조한 판결문 이후 승자의 기쁨과 패자의 좌절이 판사에 대한 인간적 평가를 안개처럼 가린다.

 

판사의 권위는 눈으로는 잘 보이지 않는다. 사진은 기사 내용과 무관함. 사진=비즈한국 DB


그날은 40대 젊은 판사가 자리했다. 나의 사건 순서지만 1시간이 지나도록 앞 사건들이 끝나지 않았다. ‘판사님 재판 참 열심히 하시네.’ 이렇게 생각하며 지루하게 기다릴 뿐이었다. 밀려오는 짜증을 억누르려 재판기록을 읽고 또 읽으니 외워질 지경이었다. 드디어 우리 순서가 왔다. 

 

판사가 지난 기일에 말하기를 “다음 재판 때는 변호사님들만 오지 말고 당사자들도 꼭 같이 나오세요. 아셨지요?”라고 했기 때문에 우리는 변호사와 원고, 변호사와 피고 이렇게 4명이 자리하기 위해 앞으로 나갔다. 그러고 보니 바로 앞 사건도 당사자들과 변호사들이 우르르 나오고 있었다. 또 한 번 생각했다. ‘판사님 재판 참 열심히 하신다.’ 

 

우리는 원고였다. 판사가 변호사 말고 원고가 직접 소송 이유를 말해보라고 마이크 기회를 줬다. 오래 걸렸다. 피고에게도 마찬가지로 발언 기회를 줬다. 역시나 오래 걸렸다. 누구나 타인의 행동은 결과만을 평가하지만 자신의 행위는 동기부터 이해시키려 한다. 그리고 판사님이 오래 닫았던 입을 열었다. 

 

“양보는 결국 좋은 일입니다. 원고 입장에서는 다소 억울한 면이 있으시겠지만 물러서는 만큼을 평화비용이라고 한번 생각해 주시면 어떨까요?”

 

그러고는 따스한 미소로 우리를 바라봤다. ‘평화비용’이라는 단어가 원고를 움직이게 했다. 조금 기다린 후 판사가 다시 말을 이었다. 

 

“원고를 직접 뵈니 제가 많이 설득이 됩니다. 그러나 원고가 오늘처럼 고등법원과 대법원 판사님들을 마주해서 또 이렇게 대화를 나눌 기회가 있을까요? 그 판사님들은 원고의 마음이 아닌 기록만을 보고 판결문을 쓰실 거예요. 생각해보세요. 저는 원고에게 좋은 판결문을 드릴 수는 있지만 평화는 여전히 오지 않은 것이겠지요?” 

 

여기서 끝났다. 한치도 물러섬 없던 채권채무 소송에서 갑자기 조정이 성립됐다. 조정기일도 아닌 변론기일에 조정이 성립되는 일은 흔치 않다.

 

그 판사의 능력이 무엇일까 생각해봤다. 과학적으로 박식하거나 카리스마 있는 주도권을 가진 것이 아니다. 첫째, 목소리가 부드럽고 인자하다. 둘째, 당사자들 이야기를 끝까지 다 듣는다. 셋째, “제가 볼 때는 이런 것 같은데 ○○​ 씨는 어떤가요?”라고 질문한 후 사람들이 생각할 시간을 준다. 

 

주된 특징은 그 정도다. 단순하지만 쉽지 않은 매력이다. 진심이 있어야 하고 그 진심을 사람에게 전달하고자 하는 강한 의지도 필요하며, 무엇보다도 사람을 사랑하는 눈빛과 몸가짐이 오랜 시간 체화되어야 가능해 보인다. 속된 말로 판사에게 ‘심쿵’하기는 처음이다. 이름을 기억해 두었다.​ 

류하경 변호사 writer@bizhankook.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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