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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썬데이] 곧 광복절, 일제에 완력으로 저항한 '김두한&황비홍'

타고난 무예와 힘으로 대항한 사나이들…허구 가미 영화로 즐겨야

2017.08.09(Wed) 18:03:24

[비즈한국] 8·15 광복절을 맞은 즈음. 자신만의 방식으로 일제에 항거한 사람들을 기억할 필요가 있어 보인다. 타고난 완력을 통해 일제와 맞섰던 인물들로 한국과 중국의 협객 김두한과 황비홍(황페이훙)을 꼽아볼 수 있다. 두 사람을 소재로 한 창작물들도 끊이지 않고 나오고 있다. 다만 영화는 영화로써 즐겨야 한다. ‘장군의 아들’과 ‘황비홍’은 실제 역사를 근간으로 하지만 대대적으로 허구와 가공을 가미했기 때문이다. 

 

영화 ‘장군의 아들’ 스틸 컷. 흰 양복에 모자 쓴 사람이 김두한 역의 박상민이다.


김두한은 시라소니 이성순과 함께 대표적 ‘낭만 주먹’으로 일제강점기 한국의 주먹 황제로 군림했다. 낭만 주먹은 둔기나 흉기를 쓰지 않고 오로지 주먹 등 맨몸으로 상대와 대결했고 패배할 경우 깨끗이 인정했던 건달들을 말한다. 

 

이성순은 ‘공중걸이 박치기’와 ‘무릎 치기(니킥)’ 등 다양한 싸움 기술을 갖고 지금의 북한 지역과 중국 일대를 떠돌며 강자들을 찾아 대결하는 고독한 승부사였다. 김두한은 당시로서 거인이던 183cm의 키에 현란한 발차기로 상대를 제압한 후 한 주먹 ‘잇뽕(한방)’ 으로 끝장내는 식이었다. 김두한은 불과 19세 나이에 국내 주먹 세계를 평정했고 일제에 굴종하지 않은 우리 자존심의 상징처럼 각인돼 있다. 

 

김두한이 청산리 대첩의 주역 백야 김좌진 장군의 친자가 맞느냐는 논쟁은 현재도 진행 중이다. 하지만 그가 친자가 맞건 아니건 어느 것 하나 구체적으로 증명된 것도 없다. 

 

1918년 서울에서 태워난 김두한은 거지, 주먹 황제, 국회의원 등 일생 내내 파란만장의 연속이었다. 일제강점기를 거쳐 해방을 맞아선 자유당 정권과 맞섰고 군사 정권 시대를 헤쳐 나간 그의 인생은 우리 할아버지 세대의 혼란스러웠던 역사적 단면을 그대로 보여준다.

 

 

김두한은 남녀 모두에게 로망의 대상이었기에 창작물의 소재로 안성맞춤이었다. 남성들에게 탁월한 완력으로 동경의 대상이었고 강한 남성을 흠모하는 여성들에게 기대고 싶은 사나이의 표상이었기 때문이다. 

 

이런 연유로 김두한을 다룬 창작물들은 대체로 흥행에 성공했다. 장동휘 주연의 ‘팔도 사나이’(1969), 전두환 정권으로 인해 한때 에로배우로 전락했던 이대근 주연의 ‘실록 김두한’​(1974), 드라마 ‘무풍지대’(1989)와 ‘야인대’(2002~2003) 등 많은 히트작들이 나왔다. 

 

김두한을 다룬 영화 중 가장 완성도 높고 흥행에 성공한 작품으로 1990년 작 임권택 감독, 박상민 주연의 ‘장군의 아들’이 꼽힌다. ‘장군의 아들’은 지금 봐도 전혀 어색하지 않을 만큼 장면마다 시각적 요소들로 꽉 짜인 미장센이 탁월한 작품이다. 여기에 협객 김두한의 항일 의지가 곳곳에서 뿜어져 나오고 있다. 

 

‘장군의 아들’은 지금은 사라진 서울 단성사에서 개봉했는데 서울에서만 68만 관객을 동원해 당시 한국 최대 흥행기록을 세웠다. 이전까지 한국영화 최대 흥행작은 53만 명 관객을 동원했던 1977년 작 김호선 감독, 장미희 주연의 ‘겨울 여자’였다. ‘겨울 여자’ 역시 단성사에서 개봉해 이 극장은 폐관 전까지 흥행의 메카 역할을 톡톡히 했다.

 

1000만 관객 영화가 속출하는 현재 멀티플렉스 체제가 도입되지 않던 당시에는 서울 단일 개봉관 관객 동원만을 갖고 흥행 기록으로 로 삼았던 때였다. 따라서 ‘장군의 아들’은 당시로선 엄청난 흥행을 기록한 영화였던 셈이다. 이후 해마다 ‘장군의 아들 2’(1991), ‘장군의 아들 3’(1992)가 제작돼 개봉됐다. 2편도 전차 등 1930년대 경성(서울) 모습을 완벽하게 재연해 서울에서만 35만 명의 관객을 동원​,1991년 한국영화 최고 흥행 성적을 올렸다. 

 

그러나 다음해에 개봉한 3편은 대중들에게 식상함으로 작용해 흥행에 실패해 더 이상 속편이 나오지 않았다. ‘장군의 아들’​ 1편의 영화의 시나리오 원안은 도올 김용옥이 집필했다. 아이러니하게도 김두한이 김좌진 장군의 친자가 아닐 수 있다는 논란은 도올로부터 출발됐다. 공개적으로 처음 거론한 사람이 도올이었기 때문이다. 도올은 1편의 시나리오를 쓴 1990년 ‘신동아’에서 “김두한은 김좌진 아들이 아니다”라고 주장해 엄청난 반향을 일으켰다.

 

‘장군의 아들’은 1984년부터 1988년까지 ‘​조선일보’​ 연재소설 고 홍성유가 지은 ‘인생극장’을 원작으로 만들어진 영화다. ‘인생극장’은 인기에 힘입어 단행본으로 출간되면서 우리가 아는 ‘장군의 아들’로 변경됐다.

 

영화는 하나의 창작물로 즐겨야 한다. ‘장군의 아들’은 실제 역사를 근간으로 하지만 허구가 가미된 남성적 판타지다. 이 영화의 영향으로 영화를 본 사람들은 영화에서 창조된 김두한의 모습을 실존 인물 김두한과 같았다고 생각하기도 한다. 

 

영화 ‘황비홍’ 스틸 컷. 황비홍과 엄진동이 사다리에서 대결하고 있다.


황비홍은 청나라 말과 신해혁명 이후 민국 초기 중국 남파무술 홍가권의 일대종사(이다이중쓰, 위대한 무술 스승), 의사이자 항일 독립 운동가였다. 

 

황비홍 연구가들은 자료 부재로 그의 무용담을 반신반의하는 경향이 강하다. 하지만 황비홍의 행적이 사실로 확인된 것도 적지 않다. 몇 가지 소개하면 그는 빈민층에 대해 무료 혹은 저렴한 진료비만 받고 치료해줬다. 황비홍은 흑기군 수령 유영복(류웅푸)과 함께 타이완에 침투한 일본군에 대항할 때 항일 전쟁에 동참했고 광동 민단에서 무술을 지도하며 부국강병을 꿈꾸는 등 다양한 독립 운동을 했다. 

 

황비홍의 인도적 의료행위에 대한 대중의 호감이 무용담까지 추가된 것인지 모른다. 그러나 황비홍은 현대 중국인들로부터 민족 영웅으로 추앙받는 인물임은 틀림없다.

 

중국인들의 황비홍에 대한 존경과 사랑은 창작물로 발전됐다. 황비홍을 다룬 영화와 드라마만 지금까지 100편을 넘고 있다. 그 가운데 현대를 사는 사람에게 황비홍 하면 생각나는 영화는 서극(쉬커) 감독, 이연걸(리렌제) 주연의 ‘황비홍’시리즈다. 서극은 자신이 존경했던 황비홍의 일대기에 허구를 가미한 중국식 히어로물을 만들었다. 

 

서극이 황비홍 역을 맡기기에 이연걸은 필요충분한 존재였다. 1963년 중국 센양에서 태어난 이연걸은 8세에 베이징 체육운동학교에 입학해 무술을 배우기 시작해 전무후무한 중국 전국 무술대회 5연속 우승을 달성했다. 그는 1980년대 초중반 ‘소림사’ 시리즈로 데뷔해 폭발적 인기를 끌었지만 후 수년간 침체기를 겪고 있었다. 결국 서극과 의기투합해 ‘황비홍’의 타이틀 롤을 맡은 이연걸은 단번에 재기에 성공할 수 있었다. 

 

개인적으로 ‘황비홍’ 1편 영화의 압권을 두 장면으로 꼽는데 우선 황비홍과 그를 따르는 사나이들이 바닷가 백사장에서 손발을 딱딱 맞춰 무술을 연마하는 장면이다. 이때 흘러나오는 노래가 임자상(린쯔샹)이 부른 ‘남아당자강(난얼당즈치앙)’이다. 제목부터 심상치 않아 ‘남자는 마땅히 스스로 강해야 한다’는 뜻이다 ‘쿵쿵쿵쿵’ 북소리로 시작되는 이 곡은 임자상의 열창과 가사 내용도 장엄하고 웅장해 듣고 있는 사람의 피를 끓게 만든다. 

 

이후 ‘남아장자강’은 ‘황비홍’ 시리즈의 테마곡으로 전편을 관통하고 있다. 원래 이 곡은 중국 강소 지방 곡이었는데 서극이 영화를 만드는 과정에서 가사를 붙이게 했다고 한다. 앞서 이 곡은 성룡(청룽)이 실제 역사와 전혀 다른 망나니 황비홍으로 등장하는 ‘취권’(1978) 테마곡으로 등장했지만 가사는 없었다.

 

또 하나의 압권은 황비홍이 자신에게 끝없이 도전하는 엄진동과 사다리 위에서 대련하는 장면이다. 두 사람은 이 장면에서 마치 중력을 초월하듯 자유자재로 사다리를 가지고 노는데 무술이 예술로까지 승화한 진면목을 보여준다.

 

이연걸은 1편의 대성공으로  ‘황비홍 2 남아당자강’(1992), ‘황비홍 3 사왕쟁패’(1993), ‘황비홍 6 서역웅사’(1997)에 출연했다. 외전인 ‘황비홍 철계투오공’(1993)에서도 타이틀 롤을 맡았다. 

 

이연걸이 잠시 시리즈에서 하차하면서 역시 중국 전국 무술대회 1위 수상 경력을 가진 조문탁(자오원줘)가 ‘황비홍 4 왕자지풍’(1993)과 ‘황비홍 5 용성섬패’(1994)에서 황비홍으로 출연했다. 이연걸의 무술 동작이 우아한 반면 조문탁의 그것은 매우 다이내믹하다고 평가할 수 있다.  

 

 

이연걸은 황비홍 성공 이후 ‘동방불패’(1992), ‘태극권’(1993), 1994년 ‘의천도룡기’와 ‘정무문’, ‘영웅’(1995) 등 1990년대를 풍미한 중화권 최고의 무협 액션 배우로 자리매김했다. 지금까지 세계 영화사에서 영상미의 극으로 꼽히는 ‘영웅 : 천하의 시작’(2002)은 ‘황비홍’과 함께 또 다른 그의 대표작으로 꼽힌다. 

 

이연걸은 할리우드로 건너가 ‘리썰 웨폰 4’(1998), ‘크레이들 투 그레이브’(2003), ‘미이라 3’(2008), ‘익스펜더블’​ 시리즈에 출연해 이소룡(리샤오룽) 이후 동양 무술을 서양에 전파하는 메신저 역할을 톡톡히 해냈다. 

 

김두한과 황비홍은 한 시대를 풍미한 사나이 중의 사나이였지만 말년은 두 사람 모두 불운했다. 

 

김두한은 주먹세계를 접고 정치를 택했으나 정치인생은 굴곡의 연속이었다. 1966년 삼성그룹의 계열사였던 한국비료의 ‘사카린 밀수’ 사건에 분개한 그는 국회에 출석한 정일권 국무총리 등 박정희 정권 내각을 향해 준비해 온 똥을 퍼부었다. 이로 인해 김두한은 국회 모독죄로 감옥에 들어갔고 1년 뒤 병보석으로 풀려났다. 1967년 제7대 국회의원 선거에 출마했지만 낙선했고 손대는 사업마다 실패하다가 1972년 뇌출혈로 길거리에 쓰러져 사망하고 말았다. 

 

1923년 광저우 상단이 일으킨 사변으로 광저우 국민정부가 상단을 진압할 때 일대가 불타버렸다. 황비홍이 의술을 베풀던 보지림의관도 전소했고 이로 인해 그는 파산하고 말았다. 앞서 황비홍 차남은 독살을 당했고 3남도 사고로 죽은 상황이었다. 큰 병을 얻은 황비홍은 1924년 생을 마감했다. 파산으로 인해 유족들은 관조차 장만할 수 없는 형편이었으나 그를 존경하던 사람들이 돈을 모아 장례를 치를 수 있었다. 

장익창 기자 sanbada@bizhankook.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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