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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클라스업] '폭탄주'와 함께한 날들을 반성한다

'다같이 마시고 죽자'에서 '각자 원하는 만큼 즐겁게'로

2017.06.05(Mon) 13:51:36

[비즈한국] 지난밤 과음을 했다. 허름한 곱창집에서 소주로 시작해, 수제 맥줏집으로 갔다가, 다시 횟집에서 소주로 끝났다. 정말 오랫만에 술자리를 가진 것이다. 사실 20년지기 정도는 되어야 술자리를 하는 편이다. 예전엔 마지못해 나가야 했던 술자리도 꽤 있었으나, 어느 순간 내키지 않는 자리를 거절할 용기가 생긴 이후부터는 누가 불러도 일과 엮인 사이면 거절하는 편이다. 

 

25년 정도 알고지낸 지인들과의 어제 술자리는 정치 얘기로 시작해, 골프 얘기와 일 얘기로 잠시 넘어갔다가, 다시 정치 얘기로 끝났다. 모두 같이 잔을 들고 잔을 부딪치고 잔을 비우기를 반복했다. 가만 생각해보니 늘 비슷하다. 매번 술자리는 데자뷔 같다. 그럼에도 유쾌한 건 사람들 때문이다. 술 때문이 아니라. 소주를 꽤 마시긴 하지만, 사실 난 소주가 맛없다. 멋없는 술이라서 그렇다.

 

폭탄주는 술에 대한 ‘모독’이다. 사진=비즈한국DB


고급 위스키 소비에서 한국은 세계적으로 알아주는 나라다. 우리보다 인구가 압도적으로 많은 미국이나 중국보다도 고급 위스키 소비를 더 많이 하던 때도 있었다. 집에서 혼자 고급 위스키를 우아하게 즐기는 게 아니다. 룸살롱으로 대표되는 비싼 술집에서 마시는 폭탄주 때문이었다. 부어라 마셔라, 먹고 죽자며 마셨던 그 폭탄주. 마시는 것보다 흘리고 쏟는 게 더 많았다. 고급 위스키를 술집 바닥이 절반은 마셨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가령 17년간 숙성한 비싸고 귀한 17년산을 맥주에 섞어 위스키 맛이 뭔지도 모르게 마셨다. 더구나 술을 음미하지도 못한 채 들이붓고 빨리 취해 버리게 하는 도구로나 썼다. 그럴 거면 왜 고급 위스키를 마실까. 그냥 소주를 맥주잔에 들이키지. 위스키 폭탄주를 마시는 건 대개 접대 자리다. 이해관계가 있는 사람들끼리 얽혀 인맥 쌓고 친목 다진다는 핑계로 술집에서 로비도 하고 거래가 오갔다. 그래서 값싼 건 또 싫어한다. 

 

사실 이건 술에 대한 모독이다. 오래 숙성한 비싼 술을 그 자체로 음미하지 못하고, 다른 용도로 쓰는 거니까 말이다.

 

식품의약품안전처의 주류소비 섭취 실태 조사자료를 보면, 2013년에 비해 2016년은 폭탄주 경험이 크게 줄고, 식사와 함께 술을 마신다는 응답자가 2배 이상 늘었다. 사실 반주문화는 통일신라 때부터 있었던 우리의 전통적 술문화다. 양반가는 물론이고 평민들도 끼니 때 술을 곁들여 먹는 문화여서 집집마다 대를 이어 내려오는 술 빚는 법이 있었다. 프랑스 사람들이 와인을 식사 때 곁들이고 평소 음료처럼 마시듯, 우리의 전통 술문화도 음식문화였다. 우리 조상들은 술을 빚을 때 좋은 향과 단맛을 중시했고, 곡류에서 나오는 단맛뿐만 아니라 배, 앵두 등 다양한 과실을 사용해서 풍미를 키웠다. 취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풍류를 즐기고 철학적 사색을 위해 술을 마셨던 셈이다. 

 

이게 반주문화이자 우리의 술문화였다. 결코 취해서 먹고 죽자는 식의 술문화가 아니었다. 이런 반주문화의 명맥이 일제시대에 끊겼다. 그리고 폭음하는 문화도 일제시대, 전쟁, 군사독재 등의 시대를 거치면서 확산되었다. 폭음하고 상대를 취하게 만드는 술문화도 엄밀히 말하면 적폐다. 전혀 한국적이지 않고 전통도 아니다. 

 

취하기 위해 마시던 것에서 즐겁자고 마시는 것으로 술문화가 바뀌고 있다.


속성으로 만든 싼 소주나 숙성시켜 오래 걸려 만든 비싼 위스키나 취하는 건 마찬가지다. 취하는 게 목적인 사람들에겐 굳이 비싼 술이 필요없다. 값싼 패스트푸드 햄버거와 비싼 미슐랭 스리스타 셰프의 프랑스 정찬 코스요리나 배부르다는 결과만 따져보면 같다. 하지만 어찌 두 음식을 같다고 할 수 있겠나? 

 

취하는 게 목적이 아니라 음미하면서 즐거워지는 게 술의 목적이라면 술을 대하는 태도는 확 달라진다. 이미 2030 사이에선 트렌드가 바뀌었다. 각자 마실 만큼 각자의 호흡대로 술을 마신다. 다같이 잔을 들지 않아도 된다. 취하기 위해 마시는 술에서 즐겁자고 마시는 술로 바뀌는 게 요즘 추세다. 술자리에 같이 있다는 것만으로도 ‘함께’의 의미는 충족된다. 

 

비싸고 귀한 술을, 조금씩 마시며 유쾌하게 젖어드는 술자리가 좋다. 술 먹고 개로 변신하는게 최악의 추태이듯, 더 이상 취해서 이성을 잃어버리는 걸 술자리의 미덕으로 봐선 안 된다. 그 사람의 진가는 술 취했을때 알아본다는 말도 있는데, 취하기 전에 잔을 내려놓는 결단도 필요하다. 그래서 반성한다. 멈췄어야 했던 지난밤 그 잔들을 멈추지 못함을 오늘도 반성한다. 소주의 관성에 빠져, 제대로 된 진짜 술을 외면한 날들을 반성한다.

김용섭​ 날카로운상상력연구소장 writer@bizhankook.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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