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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취준생일기] 우린 더 이상 남자 이야기를 하지 않았다

취업 현실에 다다르자, 연애 이야기는 사치로 느껴질 뿐

2017.02.21(Tue) 16:26:07

오랜만에 친구들을 만났다. 교환학생 시절 함께 지냈던 친구들이었다. 여느 때와 같이 음식을 시키고, 생맥주를 주문했지만 시작된 이야기는 새로운 것이었다. 우리가 주로 만나서 하는 이야기는 많은 20대 여자들이 그러하듯이 이성에 대한 것이었다. 

 

미래가 조금 더 창창했으면 좋겠다. 사진=이상은 제공


어떤 남자를 만나고 어떤 연애를 했느니, 어떤 이별을 했느니, 이런 이야기들이 주를 이루었고, 친구의 상처는 상대남에 대한 욕으로 보듬는 식이었다. 우리들의 연애는 꽤나 사건사고가 다양했던 터라 할 말이 무궁무진했다. 오죽하면 집에 가서도 또 통화를 주구장창 해댔을까. 할 말이 무지하게 많았다는 거다. 

 

그런데 그날은 달랐다. 우리의 이야기는 연애가 아니라 ‘취업’으로 시작되었고, 끔찍하게도 ‘취업’으로 끝났다. 남자 얘기를 이토록 안 하다니! 믿을 수 없었지만 차이는 확실했다. 한 살 더 먹었다고 이렇게 변하다니. 아직 2월이라고. 니네 쇼하는 거지, 그렇지?

 

우리들의 쇼는 진심에서 우러나온 생존의 압박 같은 것이었다. 여섯 명 중 두 명은 인턴을 하고 있었고 두 명은 언론사 시험, 한 명은 로스쿨을 준비하고 있었다. 남자 얘기가 우리의 현실에는 맞지 않는 것이다. 

 

이게 처음이자 마지막은 아닐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내 나이 스물다섯, 10년 안에 결혼을 하고 어쩌면 아이를 낳을지 모른다. 그러면 이야기 주제는 점점 생활밀착형이 되겠지? 이직, 결혼, 육아, 사교육비까지! 우리는 그러한 주제들로 이야기할 것이다, 

 

그 이야기들은 우리 자신에만 그치지 않을 것이다. 남편 그리고 아이, 가정에 대해서도 생각할 나이가 올 테니까. 이렇게 만나는 것도 점점 줄어들 것이다.

 

Figure 1. 내 미래도 창창했으면 좋겠다

 

만나서 하는 이야기가 달라진 것도 슬프지만, 현실적인 목표조차 서로 다르다는 것도 슬펐다. 여섯 명 중 두 명은 S 대 친구들로, 바보같이 들리겠지만 그들의 미래는 창창해 보였다. 누구에게나 취업은 힘들고 어려운 거라지만, 글쎄…. 한참 낮은 대학에 다니는 나와 두 친구들이 같은 출발선상에 있다고 생각하는 게 더 바보 같아 보였다. 

 

세상이 변하고 죽을 만큼 노력하면 된다지만 각자의 능력치가 너무 차이 난다. 한동안 그렇게 생각 안하고 그냥 달렸는데, 현실을 생각하니 갑자기 침울해졌다. 처음 내가 다니는 대학에 들어왔을 때 많이 아쉬웠지만 지옥 같은 입시를 반복하고 싶지 않아서 그냥 만족했었다. 가끔 후회되는 순간도 있었는데, 그 오랜만에 찾아온 순간이, 친구들과 만난 술자리라니.

 

수능을 망치던 날부터, 나는 불면증에 시달렸다. 자책과 고통의 시간이었다. 그래도 재수를 할 수는 없었다. 정신병에 걸려버릴 것 같았으니까. 겁났고, 도전할 용기가 없었다. 내가 할 수 있는 건 재수도 아닌, 반수. 어정쩡한 선택이었지만 별 수 없었다. 축축한 비구름 밑에 있는 것 같은 나날들이었다. 대신 열심히 살자고 다짐했다. 대학에 와서 이것저것 많이 했다. 꿀리고 싶지 않았고, 바쁘게 내 커리어를 만들어 나가는 내 자신이 유일한 자존심이었다. 

 

열심히 뛰어다닌 만큼 얻은 것도 많았고 쌓인 것도 많았다. 그래서 잊고 살았다. 내가 가진 ‘학벌’을. 내가 하고 싶은 직업은 ‘스카이(SKY)’ 밖에 안 뽑는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누군가는 말하겠지. 노력하면 안 되는 게 어딨냐고. 다 옛날 말이라고. 나도 그 말을 믿고 싶다. 그래서 지금도 노력을 하고 있는 거고. 그런데 자꾸만 주눅이 든다. 나도 현실을 외면할 수 없으니. 그러면 안 되는데, 당당해져야 하는데. 나도 모르게, 뒤를 돌아본다. 

 

내 꿈은 라디오 피디다. 사진=이상은 제공


Figure 2. 내 꿈은 라디오 피디다

 

언제나 그렇듯 내가 할 수 있는 것은 앞을 보고 가는 것뿐이다. 지난 일 돌이켜 봐야 소용없다. 어떤 망할 악플러가 지적한 것처럼 ‘아무 노력도, 할 줄 아는 것도, 의욕도 없으면서 어설픈 사회비판만 하는 사람’이 아니니까. 꿈을 위해 살아온 날들도 나름 치열했으니까.

 

나는 그때의 나를 보호하기 위해 한 선택에 대한 책임을 지고 있고, 그것이 결코 굴레는 아니다. 나를 아는 사람들에게 인정받을 만큼 능력은 있는 사람이다. 그래서 어디 한 번 해보려고 한다. 나도 궁금하다. 내가 꿈꾸는 세상을 만들기 위해서 그리고 나의 꿈을 이루기 위해서 내밀어야 하는 능력의 문제가, 높이인지 깊이인지 말이다.

 

※필자는 열심히 뛰어다니지만 어딘가 삐걱거리는 삶을 살고 있는 대학생으로, 거둬갈 기업 관계자 여러분의 연락을 기다립니다.

이상은 취업준비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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