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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찬일 노포열전] 길거리 음식도 노포가 되는 시대, 떡볶이 노포 숭덕분식

1977년에 개업, 고추장 직접 담가…지금은 둘째딸이 이어

2017.02.13(Mon) 14:09:33

‘비급(B級) 영화’라는 말이 있다. 정공법의 이야기가 아니며, 자본도 메이저가 아닌 데다가 뭔가 허술하고 기상천외한 결말을 보여주는 영화를 뜻한다. 컬트무비처럼 소수의 열광적 지지를 얻는 경우도 해당된다. 비급 구루메(gourmet)라는 말도 있다. 일본에서 시작된 말이다. 거창한 고급 요리는 아니지만, 대중적인 인기를 끄는 뭔가 독특한 구석이 있는 메뉴를 말한다. 한국에선 뭐가 비급 구루메일까. 순대, 라면, 튀긴 만두 것이 해당될 것 같다. 여기에 떡볶이를 빼면 허무(?)하다. 절대 고급은 아니지만, 전후 한국 음식의 어떤 위대한 이정표를 세운 뉴 페이스다. 뉴 페이스? 떡볶이는 오래전부터 있던 것이 아니었어? 맞다. 있었다. 그러나 그건 ‘고급형’이다. ‘일반형’ ‘싸구려형’은 1970년대에 퍼지기 시작했다.

‘SINCE 1977’. 분식 노포 숭덕분식은 1977년에 개업해 지금은 둘째딸이 잇고 있다.


성북구 정릉동 S초등학교. 1945년도 해방이 되던 해에 세워진 유서 깊은 학교다. 서울로 서울로 지방사람들이 몰려드는 1960년대와 70년대의 러시에 엄청나게 학생수가 늘었다. 이 학교뿐 아니다. 서울의 웬만한 변두리 학교는 대부분 전교생 1만 명 시대를 겪었다. 바글바글, 콩나물시루 교실이라는 기사가 신문지면을 장식했다. 한 반에 80명도 보통이었다. 2부제(오전반 오후반)도 모자라 3부제도 있었다. 그때 학생들은 뭘 먹었을까. 바로 떡볶이다. 

“말도 말아요. 정말 학생들이 많았지. 떡볶이를 한 판 만들면 금세 사라져서 채 익지도 않은 걸 집어먹곤 했어요.”

이 학교 앞에서 77년 개업, 현재까지 영업하고 있는 ‘분식 노포’ 숭덕분식의 주인장 임경호 아주머니의 증언이다. 용인 출신으로 남편과 이곳에 정착, 5녀를 길러내면서 분식집을 지켰다. 이제 둘째딸에게 가게 운영이 넘어갔다. 분식집도 2대 경영시대가 개막된 것이다. 

원래 떡볶이는 고급요리였다. 1960년대 신문만 봐도 알 수 있다. 정월 보름쯤에 기사가 나온다. 남은 떡을 처리하는 법으로 떡볶이를 제안하고 있다. 참기름과 소고기, 간장을 넣은 고급 버전이다. 궁중떡볶이가 바로 그것이다. 궁중에서 떡이 남았을 것이고, 그것을 간식으로 먹기 위해 좋은 재료 넣고 볶았다. 그것이 양반가에도 흘러나간 것이다. 그래서 근래까지도 고급 요리로 남아 있다. 왜 아닐까. 소고기, 참기름이 흔한 재료가 아니니까.   

밀가루 고추장이 흔하던 시절, 숭덕분식은 고추장을 직접 담가 썼다. 지금도 마찬가지다.


“우린 첨부터 고추장 떡볶이였지. 작은 집에 살면서도 고추장은 엄청 담갔어요. 장사에 써야 하니까. 그때 흔히 공장 싸구려 고추장도 많이 썼지만 난 그런 걸 몰랐어요.”

그때 밀가루가 흔했다. 밀가루로 만든 속성 고추장이 시중에 많이 나왔다. 업소에서 많이 썼다. 된장, 고추장을 집에서 만들지 않은 문화가 생겨나던 시점이었다. 살기 바쁘고 식당이 많이 생겨나니까 수요가 늘었다. 국가도 재래식 장 담그지 말고 개량 장 담그라고 다그쳤다. 그 개량이란 것이 대개 일본식이었고, 결국 공장제품을 선전해주는 효과가 있었다. 옛날 것은 모두 못나고 불편하며 배척해야 할 걸로 밀어붙이던 시절이었으니까. 가정의례준칙을 만들어 국민의 제사와 혼사에도 감 놔라 배 놔라 참견하던 것이 국가였다. 

원래 가게는 보증금 50만 원에 월세 5만 원짜리 무허가였다. 리어카로 행상을 하다가 단속을 당해 경찰서 유치장에서 뜬눈으로 밤을 새고 즉결심판을 받고 풀려난 후였다. 그때는 야간 통행금지가 있었고, 이런저런 풍속범과 노점상을 단속하여 즉결심판에 많이 넘겼다. 벌금을 내고 풀려나거나 구류도 많이 당했다. 일종의 짧은 구치소 생활이다. 벌금을 못 내면 구류를 살던 시절이었다. 가게를 얻어야 그런 험한 꼴을 덜 당했다. 그래도 무허가였으니 늘 불안했다. 나중에 정식으로 등록하고, 상호가 숭덕스낵이 되었다. 숭덕분식으로 개명했고 지금에 이른다.

“떡볶이는 첨에는 순 쌀로만 하다가 ​지금은 밀가루떡을 쓰고 있어요. ​아내가 그 좁은 가게에서 고추장도 다 담가서 썼어요. 건강한 음식인지는 모르지만, 정직하게는 했어요.”

아이들은 여전히 떡볶이를 먹으며 자란다. 이 집 떡볶이는 여전히 불판에서 지글지글 끓는다. 맛있다. 너무 달지 않고, 뒷맛도 깔끔하다.


80년 초에 즉석떡볶이의 인기가 서울 시내에 슬슬 퍼지기 시작했다. 신당동에서 시작, 광화문으로 넘어가고 있었다. 분식집에 디제이가 음악을 틀어주는 경쟁이 벌어진 것도 광화문시대였다. 그 즈음에 숭덕분식도 즉석떡볶이를 시작했다. 검고 반짝거리는 우묵한 프라이팬에 당면과 떡, 양배추와 오뎅에 매운 양념을 넣어 끓이는 것이었다. 이 요리가 가능했던 것은 바로 화력의 변화였다. 
“처음에 연탄아궁이가 여덟 개였어요. 이것저것 끓이는 데 화력이 많이 쓰였어요. 그러다가 가스가 나오면서 즉석이 가능해졌지.”

일인분 400원. 일반 떡볶이가 50원에서 시작해서 100원 정도 하던 때였다. 가족 외식의 시대가 열리기 전이었다. ‘마이 카’라는 자가용도 없었다. 아버지는 늦게 귀가했고 늘 고단했다. 아이들은 용돈으로 알아서 주린 입을 채웠다. 그게 바로 학교 앞 분식시대였다. 

이 집 떡볶이는 여전히 불판에서 지글지글 끓는다. 맛있다. 너무 달지 않고, 좋은 재료를 넣어서 뒷맛도 깔끔하다. 이제 누가 참기름과 소고기 넣은 떡볶이를 먹겠는가. 요리와 시대는 변한다. 그런 것이다. 세상은.

박찬일 셰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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