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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취준생일기1] 나는 준비되지 않은 취준생이 되었다

다시, 영어공부를 하러 다시, 강남역으로 왔다

2017.01.04(Wed) 19:03:23

강남역은 도무지 정이 안 간다. 강남역을 갈 때 즐거웠던 적은 한 번도 없다. 친구들과의 약속도 잘 잡지 않는 그곳에, 스무 살 때, 재수하러, 스물두 살 때는 토플 공부하러, 스물네 살 때는 토익 스피킹 공부하러 강남역 10번 출구를 지박령마냥 헤매었다. 공부, 공부, 공부! 엄마는 학원 안 다니면 공부 못 하냐고 늘 못마땅해하셨지만, 의지박약에 게으른 나에게는 잘 짜여진 커리큘럼만이 구원이었다. 

 

 

 

역삼역 한 건물에서 강남의 전경을 찍었다. 사진=이상은 필자

 

 

 

 

내가 강남역에 머무를 수밖에 없는 이유는, 영어 때문이다. 어찌 된 영문인지, 초등학교 때부터10여 년을 공부했음에도 나는 여전히 영어를 배우러 학원을 간다. 그리고 그 중심에는 해커스 어학원이 있다. 파고다, 영단기 등 해커스의 아성을 위협하는 대형 학원들이 수강생들을 모으고 있지만, 아직까지는 해커스에 대한 학생들의 신뢰도가 가장 높은 것 같다. 타 학원에서도 수업을 들어봤지만, 해커스는 수강생들을 끌어 모으는 힘이 있다. 

 

굳이 표현하자면, 해커스는 ‘어학원계의 공룡’이다. 해커스에서 한 번이라도 수업을 들었다면 수업 첫날 교재를 구입하기 위해, 그리고 교실에 입실하기 위한 엄청난 줄을 경험했을 것이다. 그 줄은 이상하게도 묘한 아우라를 만들어내서, 모두가 홀린 듯이 질서에 합류한다. 해커스 제국의 멸망은 아주 먼 이야기일 듯 싶다.

 

1. 강남의 새해가 밝았다

 

새해 다음날인 월요일, 또다시 나는 강남역에 간다. 바로 오픽을 공부하기 위해서다. 새해가 왔고, 나는 취준생이 되었으니 본격적으로 스펙을 쌓아야 하기 때문이다. 바글바글한 지하철을 타고 강남역에 도착하니, 익숙하지만 유쾌하지 않은 공기가 파란 입김과 섞인다. 여기만 오면 모두들 치열하고 목표지향적인 사람들이 된단 말이지. 바쁘게 뛰어가는 사람들 무리에 껴서 나름 비장한 눈빛으로 걸음을 재촉했다. 

 

그렇게 꽤나 이른 시각에 도착했다고 생각했는데 계단까지 줄이 벌써 길었다. 교재 구입 줄은 이미 건물 밖 도로까지 이어진 상황. 사실 일반 서점에서도 같은 가격에 구매할 수 있는 책인데, 해커스에서 나온 문제집은 해커스에서 사야 풀 맛이 난단 말인가. 나는 인터넷으로 구입할 요량이었기에, 쿨하게 그네들을 비웃으며 입실하는 줄에 섰다. 

 

착착 들어가는 사람들을 따라 교실에 들어갔는데, 어라, 분위기를 보니 내가 들어야 하는 수업이 아니다. 104호로 들어가야 하는데 103호로 들어갔다. 수업이 시작되고 나서야 나는 정신을 차리고 주섬주섬 짐을 챙겨 나왔다. 첫날부터 느낌이 싸하다. 

 

 

 

해커스 어학원 제1별관에서 진행된 오픽 오전 10시 수업. 일찍 온다고 왔지만, 결국 맨 뒷자리에 앉았다. 하지만 수업 시작할 때쯤이 되면 강의실에 한 자리도 여유가 없어진다. 사진=이상은 필자

 

 

 

2. 일찍 오지 않으면 뒷자리를 면할 수 없을 것이니

 

한심한 자신을 책망하며 겨우 교실 맨 끝자리에 앉았다. 아, 내가 토익 스피킹만 잘 봤어도, 나의 영어를 평가하지 못한다며 오픽으로 도망치는 일은 없었을 텐데. 토익 스피킹과 오픽은 거의 모든 회사가 동등하게 인정해주는 영어 말하기 시험이지만, 그 형식이 조금 다르다. 토익 스피킹은 주어진 시간 내에 빠른 답변을 해야 하는 압박이 있는 데 반해 오픽은 상대적으로 시간보다 전달력에 초점을 맞춘 시험이다. 

 

나는 몇 달 전 토익 스피킹을 야심 차게 준비했다가 그 삐- 소리의 압박을 이기지 못하고 원하는 점수를 따지 못했다. 촉박한 대답시간이 얼마나 사람을 조급하게 만드는지, 컴퓨터 앞에만 서면 바보가 된 것처럼 말이 나오지 않았다. 다들 쉽다고 하는 그 점수를 못 받아서, 결국 꼴 보기 싫은 토익 스피킹을 버리고 오픽으로 왔다. 똑같은 영어 시험이지만 그래도 이번에는 내가 원하는 점수를 받을 수 있기를, 새해 소망으로 적어본다.

 

‘안 되면 되게 하라.’ 

 

예전부터 이 말 되게 마음에 안 들었는데, 특히 영어 말하기에 약한 내게 이 ‘격언’은 너무나 스트레스를 준다. 안 되면 좀 놔두고 싶은데. 그렇다고 내가 영어 울렁증으로 외국인만 만나면 머리에서 땀이 물처럼 솟아나오냐고? 아니다. 교환학생 시절(심지어 교환학생도 다녀왔는데!), 외국인 친구들과 대화하면서 커다란 어려움을 느끼지 못했다. 

 

정교한 단어를 사용하지는 못했지만, 나름 진지한 이야기도 곧잘 나누곤 했다. 오히려 외국 친구들은 한국 사람들이 다 너처럼 영어 잘하냐고 놀라곤 했는데. 

 

대체 왜, 외국도 아닌 이 한국에서 영어에 대한 자신감을 이토록 잃고 있는지 모르겠다. 그동안 내가 한 영어는 근본 없는 임기응변 정도였나. 나는 내가 이렇게 시험 시간에 압박을 느끼는 사람인지 몰랐는데, 그것 때문에 영어 말하기에 대한 공포까지 생길 줄은 더욱 더 꿈에도 몰랐다. 어디 가서 교환학생 다녀왔다고 말을 못하겠다고. 

 

 

 

해커스에서 수업을 듣기 위해서는 입실 대기줄에서 줄을 서야 한다. 수업 10분 전에 와도 이미 줄이 길다. 강사가 줄서기는 ‘해커스의 문화’라고 말할 정도로 보편적인 현상이다. 사진=이상은 필자

 

 

 

3. ​모두들 자기 자리에 순응하며 줄을 선다

 

숙련된 강사의 수업이 끝나고, 학원에서 부교재도 사라고 해서 다시 줄을 섰다. 어찌 된 일인지 수업 전보다 두 배는 줄이 길어 보였다. 오 분쯤 지났을까, 벽에 기대며 그런 생각이 들었다. 아, 때려치울까. 스피킹 점수 그렇게 중요해? 하지만 곧 나의 신분이 취준생임을 깨닫는다. 취준생은, 선택 따위 없다. 

 

모두가 가지고 있는 자격이면 나도 가져야 출발선상에라도 같이 설 수 있는 것이다. 더 이상 불평불만은 안되고 이번에는 진짜, 제대로 공부해서 한 번에 따야 한다. 응시료가 7만 8100원이나 한다고 생각하니 또 아찔해졌다. 두 번 보면 15만 원이 넘네….

 

이제야 내가 ‘보이지 않는 줄’에 섰다는 생각이 들었다. 내 앞에 몇 명이 있는지도, 언제 내 차례가 될지도 모르겠는 안개 속의 줄. 지금 내가 서 있는 어학원의 줄은 눈에 훤히 보이는데도, 아득하다. 이 젊은 학생들의 양팔에는 얼마나 많은 교재가 불안과 함께 들려 있는가. 그리고 그들의 어깨에는 얼마나 무거운 부모님의 기대와 희생이 얹혀 있는가. 

 

물론, 언젠간 나도 일자리를 구할 것이다. 나 하나 일할 곳 없을까봐. 다만, 그 과정에서 나의 꿈은 현실과 얼마나 타협할 것인가. 소중한 가치의 우선순위는 어떻게 바뀔 것인가. 

 

나는 결코 낭만적이지 않은 전쟁터에 뛰어들었다. 누군가의 합격은 누군가의 탈락을 의미할 것이니, 이 싸움에서 상처의 총량은 정해져 있다. 내가 누군가를 이기고 일자리를 쟁취해내느냐, 탈락 메일 하나에 세상에서 가장 한심한 사람이 되느냐. 그리고 그 싸움의 시작에 선 나는, 아직 가진 것이 하나도 없다.

 

그렇게 스물다섯의 해가 밝고, 나는 준비되지 않은 취준생이 되었다.

 

*필자는 열심히 뛰어다니지만 어딘가 삐걱거리는 삶을 살고 있는 대학생으로, 거둬갈 기업 관계자 여러분의 연락을 기다립니다.

이상은 취준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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