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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라랜드’가 결코 슬프지 않은 이유

연민을 경계하며 관객에게 꿈을 꾸게 하다

2016.12.26(Mon) 15:54:06

‘라라랜드’는 일과 사랑, 둘 중 하나를 온전히 성취하기 위해서는 나머지를 포기해야 한다는 감독의 세계관을 기반에 두고 있다. 나이대 높은 평론가 중 그의 세계관을 기이하게 여긴 이가 있었다. ‘라라랜드’의 감독 다미엔 차젤레는 1985년생이다. 나와 나이 차이가 별로 나지 않는다. 그래서 그런가? 나는 ‘기이함’을 느끼는 평론가가 더 낯설었다.

 

‘라라랜드’ 스틸 컷.


그 세계관, 나도 가지고 있다. ‘승자’가 모든 것을 가져가는 세계. 아주 소수만이 부와 영광, 명예를 독점하고, 그것을 ‘성공’이라 부르는 세계. 성공은 다시 매력으로 환원되기에, 관계를 맺고 유지하는 일은 그 뒤로 미뤄진다. 일단 성공하라! 그러면 사람들이 부나방처럼 몰려들지니! 그렇기에 내가 사는 곳은 ‘성공할 때까지는 고독 속에서 분투해야 한다’는 명령으로 넘쳐난다. 

 

특히 전통적 방식의 사랑- 독점적 연애관계-은 더욱 더 끊어내야 할 것으로 여겨진다. 일과 사랑 모두를 성취했다고 평가받는 역사적 인물을 들여다보면 상대방의 양보와 뒷받침이 있었음을 알게 된다. 두 연인 모두 치열하게 커리어를 추구하는 상황이 아니었다. 

 

라라랜드도 마찬가지다. 미아가 집에 도착했을 때 남편이 아이를 돌보고 있던 장면은 그가 스스로의 커리어보다는 미아의 커리어를 중시하고 가족을 위해 많은 것을 양보하는 배우자일 것이라는 추측을 하게 한다. 즉 미아와 남편은 상호보완적인 관계였고, 그렇기에 가정을 이룰 수 있었던 걸로 보인다.

 

협업이 필요한 작업의 동료라면 사정이 다를 수도 있겠다. 예컨대 한 명이 영화감독이고 나머지가 제작자나 각본가라든지, 기타리스트와 드러머라든지. 물론 같은 필드에 있어도 여러 이유로 무참히 이별하는 경우는 존재하지만, 적어도 이들은 일과 사랑을 말 그대로 ‘함께할’​ 수 있다.

 

‘라라랜드’에서도 둘이 같은 필드에 속해 있고 같이 투어를 다녔다면 둘의 관계가 좀 더 지속됐을 수 있지 않았을까. ‘라라랜드’가 그렇듯 다른 필드에 속해 있고, 무엇보다 커리어를 쌓아가는 과정의 초기에 진입했으며, 일이 바쁘거나 거주지의 이동이 잦아 상대방과 떨어져 있는 경우가 길 때 파국으로 끝나는 것을 자주 봤다.

 

관계를 단절하고 커리어를 쌓는 사람은 무수하지만, ‘승자’가 될 수 있는 사람은 극소수다. 정신없이 시간을 보내다 문득 자신의 삶을 돌아봤을 때 이러려고 그토록 치열하게 살았나, 자괴감 들고 괴로운 이들이 많은 것도 그 때문일 것이다. 어떤 영역에서도 뚜렷한 족적을 남기지 못했다는 회환이 엄습한다.

 

‘라라랜드’를 보며 슬프지 않았던 이유다. 두 주인공은 결국 목적한 바를 이루어냈고, 비범한 성공을 거두었다. 그렇기에 ‘라라랜드’의 마지막 눈빛 교환에서 내가 읽은 것은 존중이었다. 두 눈빛의 부딪힘은 마치 ‘슬램덩크’에서 손뼉을 마주치는 서태웅과 강백호 같았달까…. “역시 네가 잘될 줄 알았음!”, “너도 제법인걸? 이래야 내 첫사랑이지!” 요런 눈빛 교환. 결국 그들의 선택이 ‘틀리지’ 않았음이 입증됐고, 긍지를 가질 자격을 획득했다. 다만 가지 않은 ‘다른’ 길에 대한 환상이 멜랑꼴리한 정서를 남길 뿐. 

 

‘라라랜드’ ​스틸 컷.


다른 친구도 내 감상에 공감했다. 친구는 “둘 다 잘 먹고 잘사는데 뭐시가 슬프냐! 라이언 고슬링이 엠마 스톤 촬영장에서 구걸 정도는 하고 있어야 슬프지!”라고 말했다. 그와 나도 서태웅과 강백호처럼 손바닥을 맞부딪쳤다. 현실에서 ‘라라랜드’의 두 연인 정도의 성취를 이룬 사람은 드물다. 때문에 나와 친구에게 ‘라라랜드’의 두 연인은 감정이입하며 슬퍼할 대상이 아니었다. 우리가 어떤 작품을 보고 감정이입하고 슬퍼하는 때는 누군가가 부당하고 억울한 상황에 처해 있거나, 존엄을 위협하는 빈곤에 놓여 있는 상황임을 확인했다. 

 

감독의 현실 인식도 마찬가지로 보인다. 그는 관객들이 한바탕 아름다운 꿈을 꾸게 만들었지만, 두 연인을 치덕치덕한 연민을 바른 시선으로 응시하는 것은 경계했다. 나는 그래서 ‘라라랜드’가 좋았다.

 

다만 이런 생각은 진득하게 눌어붙는다. 우리가 일과 관계(그것이 꼭 ‘사랑’이 아니더라도), 둘 중 하나의 영역에서라도 자존감을 가질 수 있는 상태를 이루면 좋겠다고. 현대 사회는, 특히 한국 사회에서는 어떤 영역에서도 자존감을 찾기 어려운 사람들로 넘쳐난다. 

 

나는 그저 무탈하고, 빈곤에서 해방되고 불안감이 줄어든 일상 속에서 친구들과 낄낄대며 살 수만 있어도 좋겠다는 소박한 욕망을 가지고 있다. 로맨스니 낭만이니, 운명이니 데스티니니, 이제 그런 거 별로 욕망하지도 않는 것이다. 다만 친구 관계나 취미 영역에서라도 자존감을 찾을 수 있기를 바라는데, 모두가 성공을 쫓으며 스스로를 고립하는 세계에서는 어려운 일이다. 세계의 변화가 선행된다면, 우리의 비관적인 세계관도 조금은 더 달달해질 수 있을까?​ 

최서윤 월간 ‘​잉여’​ 편집장(a.k.a 잉집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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