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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획연재: 정두언 참회록25 ] 저축은행 구속사건의 전말

불구속 사건, 체포동의안 부결, 증거 부족…. 그랬는데도 법정구속이라니!

2016.12.20(Tue) 10:41:34

# 살다보니 이런 일이…​

 

존경하는 의장님, 그리고 선배 동료 의원 여러분!

잠시 화면을 봐주시기 바랍니다.

 

“그래서 저는 저에 대한 이 부당한 짜 맞추기 표적 수사, 물 타기 수사에 대해 당당히 맞서 반드시 진실을 밝힐 것입니다. 물론 외롭고 험한 길이겠지만 반드시 승리하여 대한민국 국회의 자존심을 살리고 자유민주주의의 대의를 지키겠습니다.”

 

2년여 전 여러분들은 여야를 떠나 압도적인 표차로 제 체포동의안을 부결시켜 주셨습니다. 그러나 그 후 저는 결국 법정구속이 되어 열 달을 감옥에 갇혀 있었지만, 이제 저를 믿어주신 여러분을 실망시켜 드리지 않고 이 자리에 다시 서게 된 것이 너무도 기쁘고 감사합니다.

 

여러분, 대한민국에서 사람들이 책을 가장 많이 보고 있는 건물이 어딘지 아십니까? 국립중앙도서관? 아닙니다. 제가 있던 의왕 국립 기도원입니다. 그곳에서는 하루 종일 책을 보고, 생각을 하는 게 일입니다. 저도 거기에서 꽤 많은 책을 봤습니다. 누가 그중에 베스트를 꼽아보라고 하더군요. 그럴 때마다 저는 두 말 않고 이 책 ‘권력의 조건’을 듭니다. 다큐멘터리식으로 쓴 링컨의 평전이지요. 우리는 링컨이 매우 훌륭한 위인이라고 알고 있지만 사실 왜 그런지는 정작 잘 모르고 있다고 봅니다. 저는 이 책을 보고서야 비로소 링컨이 왜 훌륭한지를 알게 되었습니다. 

 

링컨은 연방 하원의원 초선 경력의 초라한 정치인이었습니다. 학력도 가문도 재력도 다 별 볼 일 없지요. 그런 그가 쟁쟁한 공화당 스타들을 물리치고 대통령 후보가 되고 대통령까지 당선이 됩니다. 그때 그와 경쟁을 벌였던 라이벌들은 ‘저런 자가 대통령이라니’ 하며 다 이민을 가고 싶었을 겁니다. 그러나 링컨은 그런 그들을 집요하게 설득하여 모두 내각으로 끌어들입니다. 하지만 차기를 꿈꾸는 그들은 모두 링컨에 호락호락하지 않습니다. 국무회의는 늘 난장판에 가깝게 난상토론이 벌어지고, 장관들은 자신의 입장과 소신을 굽히지 않습니다. 그런데 대통령 링컨이 밤에 주로 하는 일이 무언지 아십니까. 예고도 없이 장관들 집을 찾아가 저녁을 먹는 겁니다. 거기서 그는 장관들을 끈질기게 설득하여 동의를 얻어내거나 아니면 장관의 의견을 받아들입니다. 이게 지금으로부터 150년 전에 링컨이 한 일입니다. 나중에 그의 라이벌들 모두가 링컨을 진정으로 사랑하고 존경하게 됩니다. 링컨의 훌륭함은 두 마디로 요약됩니다. 바로 ‘관용과 인내’입니다. 

 

저는 링컨의 전기를 읽으며 저 자신을 돌아보았습니다. 저의 정치 인생, 아니 저의 인생 전체를 그와 비교해 보면 바로 ‘불관용과 불인내’더군요. 참 한심하지요. 그동안 제깐에는 용기를 가지고 할 말 하고, 할 일을 한다고 했는데 언론을 비롯해 주변은 늘 그런 저를 권력투쟁으로 몰고 갔습니다. 정말 억울하고 답답했었습니다. 하지만 곰곰 반성해보니 저의 언행에는 늘 경멸과 증오가 깔려 있었음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더군요. 그러니 그렇게 받아들여질 수밖에 없었겠지요. 

 

그것뿐 아닙니다. 그곳은 시간만큼은 부자인 곳이라서 많은 생각을 하게 됩니다. 그런데 어쩌면 그렇게 지난 날 잘못한 일들이 많이 떠오르는지요. 나중에는 내가 여기에서 이러고 있어도 싸다는 생각이 들더군요. 저는 제게 성찰의 기회를 준 고난의 시간들이 제게 축복이었다고 믿습니다.

 

살다가 한꺼번에 모든 것을 다 빼앗기고 보니 그동안 가지고 있던 것들이 그렇게 소중할 수가 없더군요. 국회의원이란 자리도 마찬가지지요. 앞으로 이 귀한 자리를 정말 귀하게 사랑으로 쓸 수 있도록 선배 동료 의원 여러분들의 계속적인 지도편달 부탁드립니다. 경청해주셔서 감사합니다. -2014년 12월 9일(화), 무죄 확정 후 본회의 신상발언

 

2012년 4월 제19대 국회의원 선거가 끝났다. 선거는 늘 전쟁이다. 나는 심신이 지쳤다. 휴식이 필요했다. 재충전을 위해 아내와 북유럽으로 미술관·박물관 기행을 떠났다. 오래전부터 별렀던 일이었지만 비행기를 타는 마음이 편치는 않았다. 병원에서 요양하는 어머니의 상태가 좋지 않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어제 오늘 일도 아니기에 일단 떠나기로 했다. 아니나 다를까. 덴마크에서 노르웨이로 넘어가는데 형에게서 빨리 들어오라는 전화가 왔다. 남은 일정을 생략하고 부랴부랴 귀국길에 올랐다. 덴마크 코펜하겐에서 독일 프랑크푸르트로 갔는데, 프랑크푸르트 공항에 도착했을 때 어머니가 돌아가셨다는 형의 문자를 받았다. 6월 22일이었다. 다리가 꺾였다. 허망함이 밀려왔다. 

 

어머니의 상을 치르고 삼우제가 끝난 날 저녁, 술에 취해 자고 있는데 ‘조선일보’ 기자로부터 전화가 걸려왔다. 잠결에 전화를 받으며 시계를 보니 밤 11시가 조금 넘은 시각이었다. “내일 아침 신문에 검찰에서 형을 저축은행 사건으로 수사할 것이라고 나오는데 어떻게 된 것이냐?”는 것이었다. 순간적으로 이상하다는 생각은 들었지만 심각하게 생각하지는 않았다. ‘임석 솔로몬저축은행 회장을 이상득에게 소개시켜준 기억밖에 없는데 왜 나를 수사하지? 참고인으로 조사하려고 하나?’ 그렇게 생각했다. 아침 신문 기사를 봤더니 1면 톱으로 나를 수사할 계획이라는 기사가 보도됐다.

 

정신이 번쩍 들었다. 무언가 조짐이 좋지 않았다. 그런데 도대체 기억이 나지 않았다. 어떻게 된 것인지 점검을 해야 했다. 내용을 알 만한 사람은 내 비서관으로 있던 김봉현이었다. 보좌관에게 김 비서관을 수소문하라고 했더니 경주 처가에 가있었다. 김 비서관과 통화한 보좌관은 “김 비서관이 그때 돈을 돌려준 기억이 있으니 의원님은 걱정 안하셔도 된다고 했다”라고 보고했다. “그럼 그렇지!” 하면서 안심했다. 나는 7월 2일 의원총회에 참석해 신상발언을 했다. “대선 과정에서 오해 살 부분이 있었는데, 파악해 당사자를 찾아냈고 확인까지 했다. 삼척동자도 이해할 수 있게 해명할 준비가 되어 있다. 나는 떳떳하다.”

 

이 대목에서 잠깐 과거로 돌아가 보자. 당시 이상득이 구속된 것은 불가피한 측면이 있다. 저축은행 사건이 터질 줄 누가 알았겠는가? 수사를 하다 보면 예기치 못한 것들이 튀어나온다. 검찰도 어떤 사안에 대해 조사할 때 그 건과 관련 되어 있는 정·관계 고위 인사를 얘기해 주면 구형을 할 때 참작하겠다고 말하는 경우가 많다고 들었다. 이상득이 저축은행과 관련이 있었기에 이름이 나올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하지만 한편으로는 내가 ‘이상득 구속’을 이끈 측면도 있다. 왜냐? 저축은행들이 잇따라 쓰러질 때도 솔로몬저축은행은 1차, 2차 퇴출 대상에서 빠지고 퇴출되지 않았다. 저축은행이 부도가 나면 갖다 안길 곳이 필요했기 때문이다. 피해자들에게 보상을 해줘야 하니 쓰러진 저축은행들을 인수할 곳이 있어야 했다. 솔로몬저축은행 임석 회장은 빠져나간 게 아니라 쓰러진 저축은행들을 떠안기기 위해 남겨놓은 것이었다. 하지만 결국 부동산 가격이 하락하면서 담보 가치가 떨어지고 BIS 비율을 못 맞추면서 솔로몬저축은행도 퇴출될 수밖에 없었다. 

 

퇴출 저축은행 대표들로부터 6억 원 수수 혐의를 받은 이명박 대통령의 친형 이상득 전 의원이 2012년 7월 10일 서울중앙지법으로 영장실질심사를 받기 위해 들어서고 있다. 사진=비즈한국DB

 

영업정지 대상 저축은행 3차 조사 결과가 발표되기 직전 나는 권혁세 금감원장을 비롯해 조원동 등 친구들과 저녁을 먹었다. 금감원 조사 결과를 일요일 날 발표한다기에 권 원장에게 “솔로몬이 들어가냐”고 물어봤더니 대답을 안 했다. 나는 “솔로몬은 이상득이 봐줘서 계속 살아났다던데 만약 그런 것이면 너 나중에 혼난다”고 말했다. “이상득 때문에 봐준다고 하는데 조심해. 그러다가 네가 온전치 못할 수 있다”고 주의를 준 것이다.  

 

잇달아 쓰러진 저축은행들

- 2011년 1월 14일 삼화저축은행 영업정지

- 20111년 2월 17일 부산·대전저축은행 영업정지

- 2011년 2월 19일 부산2·중앙부산·전주·보해저축은행 영업정지

- 2011년 2월 23일 도민저축은행 영업정지

- 2011년 8월 5일 경은저축은행 영업정지

- 2011년 9월 18일 토마토·프라임·에이스·제일·제일2·파랑새·대영저축은행 영업정지

- 2012년 5월 6일 솔로몬·한국·미래·한주저축은행 영업정지

 

오래전에 하루는 임석이 나를 찾아왔다. 그런데 한다는 이야기가 자기가 이상득한테 옛날에 돈을 줬다는 것이다. 내 귀에는 협박으로 들렸다. 이상득에게 직접 할 수 없으니 나를 통해서 협박을 하고 있다고 느꼈다. 그래서 이상득에게 전달을 할까 말까 고민하다가 전달하는 것이 맞다는 생각이 들어 이상득의 보좌관인 문성곤을 불렀다. 임석이 한 이야기를 전했다. 그런데 얼마 뒤 전화를 걸어 온 문 보좌관은 “(이상득이) 전혀 상관없으니 걱정하지 말라”고 했다는 것이다. 나는 문성곤에게 화를 내며 “그래? 알았어. 그럼 앞으로 알아서 하시라고 해!”라고 말했다. 나는 내 할 도리를 다 했다고 생각했다. 사안을 알려줬는데 아무 관련이 없다고 하니 어쩌겠는가.

 

나는 기자들과의 사석에서 그 얘기를 공개했다. “임석이 찾아와서 (이런저런) 얘기를 해서 이상득에게 알렸더니 아무 문제가 없다더라.” 당연히 그 얘기는 여의도에 회자되고, 증권가로 가고 검찰 정보망에도 포착됐을 것이다. 청와대 친인척 문제 담당자에게도 전화를 했다. 임석이 이렇게 말하는데 담당이 모르고 있으면 나중에 큰일 나니 파악을 해놓으라는 취지에서였다. 나중에 보니 그는 금감원 출신 국정원 직원을 불러서, 확인하는 등 나름대로 사안을 파악했다. 내가 솔로몬저축은행과 관련해 무언가 찜찜한 구석이 있었다면 이렇게 했을까? 나부터 솔로몬저축은행을 구제하려 하고 덮으려고 쉬쉬했을 것이다. 오히려 솔로몬저축은행을 왜 안 날리냐고 했으니 판을 키워놓고 내가 당한 셈이다.

 

2012년 5월 10일 경영부실로 영업정지된 서울 대치동 솔로몬저축은행 본점. 사진=비즈한국DB

 

 

# 여야를 막론 압도적 표차로 부결된 체포동의안

 

7월 2일 의원총회에서 신상 발언을 한 다음날 검찰에서 변호사를 통해 연락이 왔다. 5일 출두할 것인가, 6일 출두할 것인가 묻는 전화였다. 나는 하루라도 빨리 가자고 했다. 빨리 가서 해명하고 싶었다. 7월 5일 출두하여 조사를 받았다. 그러나 영장은 발부됐고 7월 9일 결국 체포동의안이 국회로 왔다. 체포동의안이 처리되는 본회의는 11일 열렸다. 이한구 원내대표는 가결되는 게 정상이라고 말했다. 착잡했다. 표결하기 전 주말, 군 복무 중인 아들을 면회했다. 아들은 “아빠 명예는 손상이 됐네. 어떻게 하시려고요?” 물었다. 나는 “아빠 국회의원 그만두려고 하는데?” 그랬다. 아들은 ”그러시죠”​ 하고 쿨하게 답했다. 욱 하는 심정에서 국회의원 지위를 내려놓고 수사를 받겠다고 생각했다. 안 좋은 버릇이지만 나는 가끔 욱 한다. 

 

당시 나는 친구가 운영하던 여의도의 미래전략연구원에서 장정수, 정태근, 이태규 등과 매일 대책회의를 했다. 내가 국회의원 그만두겠다고 하니 다들 명예롭게 그만두자며 동의했다. 그런데 체포동의안 처리 전날인 10일 송태영과 친구 안기포가 찾아왔다. 기분도 그러니 산에 가자고 해 갔다가 내려와 막걸리를 마시며 국회의원을 그만두겠다는 얘기를 했더니, 두 사람이 왜 가만히 앉아서 당하냐며 목소리를 높였다. 어떻게든 작업을 해서 체포동의안이 가결되는 것을 저지해야 한다고 핏대를 세웠다. 그러면서 자기들도 대책회의에 오겠다고 했다. 두 사람이 여의도 대책회의에 와서 성토를 하자 분위기가 바뀌었다. 김용태 의원도 송태영, 안기포의 말이 맞다며 맞장구를 쳤다. 그때부터 움직이기 시작했다. 체포동의안 처리 하루 전이었다. 송태영이 내가 쓴 호소문을 들고 의원회관에 있는 국회의원들의 방을 돌았다. 김용태도 의원들 만나면서 움직였다. 그래도 나는 사실 부결될 것이라고는 생각하지 않았다. 시간이 그날 오후부터 그 다음날 오전까지밖에 없었다. 박근혜를 비롯한 친박 그룹은 가결되어야 한다는 입장이었다. 

 

총선 도중 여야를 막론하고 기득권 내려놓기 경쟁을 벌인 직후라 시기도 좋지 않았다. 새누리당은 한 달쯤 전인 2012년 6월 8~9일 이틀간 충남 천안시 지식경제공무원교육원에서 의원연찬회를 열고, 6대 쇄신안과 당의 발전 방안에 대해 논의한 뒤 결의문을 발표했었다. 이날 새누리당이 결의한 6대 쇄신안은 △국회의원 불체포특권 포기 △의원연금 제도 폐지 △국회의원 겸직 원칙적 금지 △무노동 무임금 원칙 적용 △국회 윤리특별위원회 기능 강화 △국회 폭력에 대한 처벌 강화 등이었다. 

 

김용태 의원은 ‘정두언에 대한 체포동의안 자체가 부당하다, 국회에서 구속영장이 오기도 전에 체포동의안을 판단하는 것 자체가 제도적으로 문제가 있다, 정두언도 출두를 하겠다는 데 체포동의안을 가결하는 것은 부당하다’는 논리를 펴며 의원들에게 부결시켜 달라고 호소했다. 현행법상으로는 국회의원이 불체포특권을 포기하려고 해도 포기할 방법이 없다. 당시 나도 불체포특권을 포기하며 검찰에 출두하겠다는 뜻을 밝혔다. 그러자 뜻하지 않은 원군들이 나타났다. 윤상현은 친박 인사로 대선 당시 박근혜 공보단장을 맡고 있었다. 윤상현이 먼저 송태영에게 전화를 해왔다. “두언이 형 살려야 해. 나도 열심히 할 테니까 무엇이든 할 일이 있으면 알려 달라”고 했다. 송태영은 윤상현에게 “의원총회에서 체포동의안을 부결시켜야 한다는 얘기를 해 달라”고 했다. 윤상현은 “하겠다”고 답했다. 

 

그러나 친박계 핵심 인사가 박근혜의 뜻에 어긋나게 행동하기는 쉽지 않았던 모양이다. 하겠다고 답은 했는데 윤상현은 의원총회가 열리는 당일 아침까지 통화가 되지 않았다. 다급해진 송태영은 윤상현의 사무실로 찾아갔다. 아니나 다를까, 여기저기서 압력을 많이 받은 듯했다. 송태영은 “정치 길게 봐라. 이게 단순한 것이 아니다. 당신 정치에 중요한 것이다”는 논리로 윤상현을 설득했다. 윤상현은 “알았다. 그 대신 누구한테도 얘기하지 말라”고 했다. 체포동의안이 부결된 뒤 윤상현은 이 일 때문에 박근혜 공보단장에서 물러났다. 의총을 앞두고 정태근, 송태영 등은 윤상현, 조해진, 김성태, 김태흠 남경필 등을 설득해 의총에서 발언하겠다는 동의를 얻는 데 성공했다. 애초에 당론투표를 할 가능성도 있었으나 당론 투표는 이루어지지 않았다. ‘친박’이 똘똘 뭉쳐 가결표를 던질 것이 예상됐으나 ‘친박’인 윤상현, 김태흠 등이 반대 토론에 나서면서 친박의 전열은 흐트러졌다. 

 

2012년 7월 13일 한나라당 의총에 참석한 박근혜 의원이 정두언 의원 체포동의안 부결에 관한 의견을 밝히고 있다. 당시 친박은 정 의원 체포동의안에 찬성하는 입장이었다. 사진=비즈한국DB


그래도 나는 부결될 것이라고는 생각하지 못했다. 표결 전 본회의장에서 신상발언을 한 뒤 나는 장정수 원장이 운영하던 연구원으로 갔다. 연구원에서 TV를 켜놓고 마음이 착잡하니 대낮부터 폭탄주를 먹고 있었다. 그런데 자막에 ‘부결!’이라고 나왔다. 찬성 74 대 반대 197이었다(기권, 무효 포함). 이렇게 나온 배경을 보면, 찬성 74는 거의 한나라당이었다. 야당이 거의 반대를 했다. 야당은 왜 반대했을까. 박지원 변수도 있었다. 박지원이 체포동의안 다음 수순으로 예상되었기 때문에 나를 가결시키면 박지원도 꼼짝없이 가결시켜야 했다. 그러니까 박지원 일파에서는 부결을 시켜야 했다. 그래서 박지원과 가까운 이윤석이 부결 운동을 하기도 했다. 그리고 야당에는 내 팬들이 많다. 김영주 의원은 정두언 살려야 한다고 백방으로 나서서 전화를 했다. 같이 환노위를 2년 했는데, 상임위를 2년 정도 같이 하면 사람을 속속들이 다 안다. 2년 동안 자주 보고, 여행도 가기 때문이다. 그때 같이 상임위를 했던 의원들이 내 팬이 됐다. 노영민도 그중 한명이다. 새정치민주연합 최고위원이 된 전병헌도 오랜 술친구다. 그런 사람들이 부결표를 던진 것이다.

 

뉴스에서 ‘부결!’ 자막을 본 순간 머리가 띵~했다. 그 당시 지역에서 누가 전화를 했는데 나보고 여야 공동 원내대표라고 말했던 기억이 난다. 여야를 떠나 압도적인 지지를 받았다는 뜻이었다. 박근혜는 여기서 내게 일격을 당한 것이나 마찬가지다. 이한구 원내대표는 부결된 책임을 지고 사퇴를 선언했다. 이한구는 전형적으로 재승박덕인 사람이다. 그는 “정두언은 구속수사를 받고 탈당하라”고까지 말했다. 

 

연구원에서 TV로 체포동의안이 부결된 것을 확인한 뒤 다들 술을 마시면서 환호성을 질렀다. 그때 정몽준으로부터 축하한다는 전화가 왔다. 그러면서 “정 의원 도와준 사람들 다 불러라, 내가 저녁을 사겠다”고 했다. 고마웠지만 나는 심신이 지쳐 있었다. 폭탄주도 많이 먹어 갈 수 있는 상태가 아니었다. 그래서 정태근, 김용태를 보내고 나는 집에 갔다. 집에 갔더니 아무도 없었다. 일단 샤워를 했는데 샤워를 하다가 오열을 터뜨렸다. 꺼이꺼이 소리 내어 한참을 울었다. 그날 오랜만에 잠을 푹 잤다. 

 

이 일로 박근혜가 대국민 사과도 했다. 박근혜는 소득세 증세안 통과 때 완패했고, 이때도 나에게 졌다. 나한테 두 번 진 셈이다. 그리고 ‘친박’임에도 부결에 앞장섰던 윤상현, 김태흠도 곤욕을 치르기는 했지만 나중에는 다 잘됐다. 2008년 ‘조선일보’ 인터뷰 사건이 났을 때도 나는 이제 끝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런데 살아났다. 그 이후에도 전당대회 등 여러 차례 그런 고비를 겪었다. 재판 진행 중에 누가 나한테 그랬다. “​정 의원은 오뚝이 같은 사람이니까 또 일어설 것입니다.”​ 

 

 

# 예상치 못한 충격, 법정 구속

 

알 수 없는 것이 인생이다. 사람들은 1심 재판 중 심리를 할 때마다 나에 대한 재판장의 애정이 느껴진다고 말했다. 내가 보기에도 그런 것 같았다. 그래서 11월 24일 선고일에 피의자 최후 진술을 3분만 했다. 한마디로 대충 했다. 판결 결과에 별 걱정을 안했기 때문이다. 우리가 대처를 다했고, 검찰 수사 자체가 짜 맞추기를 하다보니까 엉성했다. 청와대에서는 이 정도면 공소유지가 힘들다는 얘기까지 나왔다고 들었다. 재판부는 선고하기 1주 전 토요일에 우리 변호사에게 변론서가 담긴 파일을 달라고 했다. 재판부가 우리 쪽 변론문을 인용하겠다는 뜻으로 해석됐다. 좋은 징조라고 나는 생각했다. 선고 당일 나는 송태영과 북악산에 갔다가 내려와 햄버거를 먹고 법원으로 갔다. 양복에 푸른색 넥타이를 매고 가벼운 마음으로 재판정에 섰다. 그런데 그날 법정구속이 됐다. 

 

법정구속이라니! 전혀 예상치 못한 충격이었다. 대단히 이례적이고 무리한 조치였다. 불구속 사건, 체포동의안 부결, 증거 부족…. 그랬는데도 법정구속이라니! 판결을 내린 부장판사는 2주 후 지법 부장판사에서 고법 부장판사로 영전했다. 이것은 무엇을 말하는가. 판사들이 판결을 할 때 제일 우선순위는 자기 인사 문제이다. 특히 형사재판에서는 더 그렇다. 사람들이 여론재판을 한다고 하는데 그게 무슨 뜻인가? 여론이 나쁘다, 여론이 시끄럽다는 것은 자기 인사 문제에 영향을 미칠 수 있으니 여론에 거스르지 않게 판결을 한다. 결국에는 자신의 인사 문제를 걱정하는 것이다. 특히 정치적인 사건에서 판사들은 자기의 인사 문제를 우선시한다. 

 

2012년 7월 5일 정두언 의원이 솔로몬저축은행으로부터 금품 수수 의혹을 조사받기 위해 서초동 대검찰청에 출두하고 있다. 사진=비즈한국DB


법정 구속되어 구치소로 가는데 멍했다. 아무 생각을 할 수 없었고 10년 동안 끊었던 담배 한대 피웠으면 하는 생각밖에 안 났다. 2013년 1월 24일 목요일이었다. 날이 매우 추웠다. 구치소에 들어갔더니 4명인가 있었다. 옷이나 먹을 것 등을 챙겨줬다. 날은 춥고 찬바람은 불고 마음은 싱숭생숭하고 잠이 오지 않았다. 도무지 이것이 현실인가 꿈인가 했다. 일요일이 되어서야 정신이 들었다. 뭐할까 하다가 상을 가져오라고 해서 상을 놓고 “​​같이 예배 볼 사람 예배나 봅시다”​ 그랬다. 몇 사람이 옹기종기 모였다. 성경-말씀-기도-찬송으로 순서를 정해서 예배를 보았다. 그때 같이 예배했던 감방 동료 가운데 한 명은 그 후 얼마나 열심히 성경 공부를 했던지 지금 거의 목사가 되었다. 나는 감옥에 있을 때 결심했다. ‘여기 있는 동안에는 이곳이 기도원이라고 생각하자. 여기서 내 과제는 신앙에 도전을 해보는 것이다. 나도 신앙을 한 번 가져보자.’ 그날 예배를 시작해서 감옥에서 나올 때까지 아침, 점심, 저녁 세 차례 예배를 보면서 성경을 2회 반 정도 통독하고 나왔다. 

 

열흘 만에 독방으로 갔다. 혼자 가지 않고 같이 있던 사람 중 한 명과 같이 갔다. 독방 넓이가 양팔을 쭉 다 펼 수가 없다. 길이도 다리를 펴면 얼마 남지 않는다. 거기서 둘이 있는 것이다. 왜 둘이 있었냐. 내가 원래 식욕이 없는 데다가 혼자 밥 먹을 자신이 없었다. 밥을 안 먹으면 기운이 빠지고 우울증이 생길 것 같아서 같이 가자고 했다. 그가 있으니 같이 예배도 볼 수 있었다. 그는 4개월 정도 나와 같이 있다가 나갔다. 나는 혼자 두 달인가 독방에 있다가 2심 선고를 받았다. 2심 선고하는 날 구치소에서는 다들 내가 나가는 날이라고 생각했다. 아무리 못해도 집행유예라고 생각했다. 교도소장부터 모든 재소자들이 그렇게 생각했다. 그런데 다시 감옥으로 돌아왔다. 그렇게 되면 한동안은 심신이 거의 초주검이 된다. 나도 한동안 엄청난 스트레스에 시달렸다. 정신적으로 ‘멘붕’이 왔다. 

 

재판 과정에서 알게 된 사실이 있다. 변호사들이 재판할 때 제대로 말을 못한다. 그리고 세게 해야 하는 말은 최후진술 때 하라고 은근히 내게 미뤘다. 변호사가 왜 그렇게 하는 것일까. 나중에 이해가 갔다. 변호사는 재판장과의 관계에서 보면 영원한 을이다. 그리고 한 재판관에게 한 건만 변론하는 것이 아니라 동시에 다른 몇 건을 같이 한다. 그래서 영화에서 보듯이 세게 변론을 하지 못한다. 재판장에게 완전히 찍히기 때문이다. 그렇게 되면 다른 사건에도 악영향을 끼친다. 이것이 변호사들의 한계이다. 변호사들은 검찰과 대립해서 싸우지만 제대로 안 싸운다. 검찰 수사 사건도 맡아야 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재판에서는 피의자들이 절대로 불리하다. 

 

내가 최후 진술을 하기에 앞서 이상득의 변호사가 몇 시간 동안 변론하느라 기운을 다 빼놓았다. 나는 밤 9시가 되어서야 최후진술을 시작했다. 변호사들이 그동안 못한 말을 거기서 다했다. 최후진술이 끝나니 판사들을 포함해서 전체가 숙연해졌다. 설득력 있게 얘기를 한 것이다. 그때 이동명 변호사가 하는 말이 “네가 변호사 해야 되겠다”고 했다. 끝나고 오는데 교도관들이 “정말 의원님 말이 다 맞네요, 의원님은 이길 거예요” 하고 격려해 주었다. 심지어 이상득도 내게 “공부 많이 했데이” 이랬다. 그러나 결국 혼거방으로 옮겨 4개월 정도 있다가 만기를 채우고 구치소를 나왔다.

 

어느 날 저녁 점호가 끝나고 책을 보고 있는데 동료 한 명이 부탁이 있다고 했다. 뭐냐고 했더니 노래 한 곡 해달라고 했다. 무슨 노래? 이용의 ‘잊혀진 계절’이요. 그러고 보니 그날이 10월 31일이었다. 가사가 가물가물했다. ‘글쎄’ 하다가, 그의 간절한 눈망울 때문에 ‘에라 모르겠다’ 하고 일단 불렀다. 그런데 끝까지 불렀다. 감옥에 있으면 기억력이 좋아지는 게 분명하다. 스마트폰이 없는 덕이리라. 노래가 끝났는데 박수 소리가 안 들렸다. ‘이게 뭐야’ 하고 동료들을 쳐다보니, 둘 다 소리 없이 울고 있었다. 감옥에서 시월의 마지막 밤을 그렇게 보냈다. 

 

감옥에서는 보통 저녁 5시에 밥을 먹는다. 사실 저녁은 일찍 먹는 게 좋다. 병원에서도 저녁을 일찍 주지 않는가. 그리고 교도소는 저염식이다. 당연히 혈압이 정상으로 돌아온다. 우리가 염분 때문에 살이 많이 찌는데 교도소 음식을 먹으면 날씬해진다. 그래서 내 체중이 65kg까지 내려갔다. 매일 뛰는 등 운동도 꾸준히 했다. 돌이켜보면 정말 최고의 기도원이 감옥이었다. 그런 기도원이 없다. 재워주고, 입혀주고, 먹여주고, 건강관리 해주고…. 또 거기 있으면 시간 부자다. 나와서 하는 얘기지만 가끔 거기가 그립다. 왜? 그곳은 자신만의 자유를 누리는 곳이다. 자기 시간을 마음대로 할 수 있다. 역설적으로 감옥 밖에 나오면 자유가 없다. 바쁜 일정을 쫓아다니면서 하고 싶은 것도 못 하고, 보고 싶은 사람도 못 보고, 먹고 싶은 것도 마음대로 못 먹는다. 아이러니컬하지만 감옥은 자유가 있는 곳이다. 거기는 작은 감옥, 바깥세상은 큰 감옥이다. 이 감옥에 있다 보니까 저 감옥이 그리워지고, 저 감옥에서 누릴 수 있는 자유가 그리워진다. 

 

 

# 감옥을 기도원 삼아 키운 신앙의 힘

 

감옥에서는 오후 5시에 밥을 먹고 5시 반부터 TV가 나왔다. 7시에 뉴스를 보고, 드라마 1편, ‘불후의 명곡’을 보면 9시에 TV가 끊겼다. 일상이 그랬다. 그런 뒤 점호를 하고 공식적으로는 자는 시간이다. 하지만 보통 9시에 점호가 끝나면 이부자리 펴놓고 책을 보곤 한다. 나도 마찬가지였다. 이 시간은 평화의 시간이다. 평온 그 자체다. 출소하기 전날 밤 9시가 됐는데 감옥 동료 두 명이 나를 힐끗힐끗 쳐다봤다. 이불을 깔아야 하나, 말아야 하나 눈치를 보는 것이다. 내가 자정이 넘으면 출소하기 때문이다. 나는 이불을 깔라고 했다. 감옥에서의 마지막 평화를 누리고 싶었다. 이부자리를 깔고 각자 눕거나 앉아서 책을 보고 있는데, 9시 반쯤 한 사람이 내게 물었다. “의원님, 이 찬송가 310장 어떻게 부르죠?” 그는 내가 나가면 순서상 예배를 인도해야 했다. 이때 제일 머리 아픈 게 찬송이다. 매일 같은 노래를 부를 수 없으니 레퍼토리를 다양하게 해야 한다. 그것이 걱정이 됐던 것 같다. 내가 아는 찬송을 부르기 시작했다. 잠자던 또 다른 감옥 동료도 합세해 셋이서 찬송을 했다. 다른 방에서는 끽 소리도 안했다. ‘잡시다 이제!’ 이런 소리 하는 이가 없었다.

 

마지막 날이라 교도관이 배려한다고 밤 10시쯤 왔다. 일찍 나와서 차도 마시고 그러다가 나가라는 얘기였다. 나는 “12시 되려면 아직 멀었으니 조금 있다가 오세요”라고 했다. 그리고 다시 찬송을 부르는데 10시 30분이 되니 교도관이 다시 왔다. 그래서 또 더 있다 오라 했더니 11시에 왔다. 나는 조금만 더 있다 오세요 하며 계속 찬송을 했다. 교도관이 11시 15분에 오더니 “이제 준비해야 한다. 나오시라”고 했다. 나는 이제 이들과 헤어질 시간이 왔다고 생각했다. 셋이 모여서 마지막 기도를 했다. 동료들은 울음을 터뜨렸다. 나도 마찬가지였다. 비록 험한 곳이었지만, 정든 것은 어쩔 수 없었다.

 

출소한 후 세상으로 돌아온 나를, 차마 글로 쓰지 못할 여러 가지 배신들이 기다리고 있었다. 거기에 딱 마주치니까 그동안 다져온 마음의 평화가 와르르 무너졌다. 차라리 구치소에 있을 때가 나았는데, 나온 뒤에는 나락으로 더 떨어지는 기분이었다. 조금씩 좋아지기는 했지만 2014년 6월까지 거의 멘붕 상태로 있었다. 그때 송태영이 매일 산으로 나를 끌고 다녔다. 밤에는 잠이 안 오고 불안하니 설교 동영상을 보면서 잤다. 얼마나 많이 봤는지 지금은 목사님보다 내가 설교를 더 잘할 것 같다. 전에는 신앙이라는 게 하늘에서 뚝 떨어지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요즘은 신앙도 역시 노력 속에서 열매를 맺어가는 것이지 뚝 떨어지는 신앙은 이상한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다가 딸의 결혼 문제가 생겼다. 나는 마음이 급해졌다. 대법원 판결이 나오기 전에 결혼시켜야겠다고 생각해 3, 4월로 예정하고 막 서둘렀다. 나중에는 딸이 울면서 ‘나를 쫓아내려고 하느냐’며 ‘힘들다’고 문자까지 보냈다. 그나마 닦달을 해서 7월 5일로 결혼식을 잡았다. 대법원 선고가 그 전에 잡히면 안 되는데 하면서 내심 조마조마했다. 그런데 아니나 다를까, 대법원 선고일이 6월 26일로 잡혔다. 마음이 편치 않았다. 만약 판결이 안 좋은 결과가 나오면 어떻게 하나 하는 걱정에 잠도 안 왔다. 그때부터 저녁 시간까지 약속을 잡고 놀러 다녔다. 6월 25일 대법원 선고 전날 저녁에는 친구들, 후배들과 압구정동에서 만났다. 10시 좀 넘어서 일어나는데 친구가 덕담한다고 “내일 하느님이 정 의원에게 기적을 베풀라고 기도하자”고 했다. 

 

그런데 그것은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나는 “마지막 말이 걸린다. 하느님이 기적을 베풀어서 좋은 결과가 나오기를 기도하자고 했는데 만약 나쁜 결과가 나오면 하나님이 나쁜 분밖에 더 되냐, 그것은 아니다. 기도를 하려면 ‘내일 어떤 결과가 나와도 제게 순종하는 마음을 허락해주고, 하나님의 계획이 있음을 믿고 받아들이도록 해 달라’라고 기도를 부탁한다”고 했다. 사실 그때쯤이면 우리가 모를 뿐이지 결과는 이미 다 나와 있는 것 아닌가. 그렇게 기도를 할 정도로 내 신앙이 상당히 정리가 돼있었다. 그동안 6개월 넘게 뮤지컬, 연기, 노래 공부를 했다. 영어학원에 다니고 등산도 다녔다. 어떤 때는 도산공원에서 리코더를 불었다. 그리고 백화점에 가는 낙도 배웠다. 시간 때우는 데는 백화점 가서 옷 구경하는 것 이상이 없다.

 

 

# 세상에서 가장 미천한 자들에게 편지를 쓰다

 

또 한 가지 시작한 것이 사형수들에게 편지를 쓰는 것이었다. 지금은 좀 뜸해졌다. 내가 사형수들에게 편지를 쓰겠다고 마음먹은 이유는 성경책을 읽을 때 제일 마음에 꽂힌 것이 복음서 중 최후심판 부분이었기 때문이다. 예수가 여러 가지 비유를 들어서 이야기 한다. 양은 천국을 의미하고, 염소는 지옥을 의미한다. 어떤 사람에게 양이라고 얘기하면서 ‘너는 내가 주릴 때 먹을 것을 줬고, 목마를 때 마실 것을 줬고, 추울 때 입을 것을 줬고, 내가 아플 때와 감옥에 갔을 때 돌봐주었다’ 하셨다. ‘주님, 저는 그런 적이 없거든요?’ 그랬더니 ‘아니다. 가장 낮은 자에게 하는 게 나한테 하는 것이다’ 하셨다는 구절이다. 

 

구치소에서 나와 그 구절을 생각하면서 세상에서 가장 낮은 자가 누구일까 생각했다. 사형수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이 사람들을 위로해줘야겠다고 마음먹었다. 사형수들과 편지를 주고받다보니 위로 받는 건 그들이 아니라 오히려 나였다. 어느 사형수의 편지다. 그는 내 편지에 답장을 안 하다가 아주 오랜만에 이런 답장을 보내왔다. 

 

은총과 평화를 기도합니다.

책 ‘용서’에는 이타심에 대하여 자세하게 기록하고 있었습니다. 달라이 라마가 “몸이 몹시 아팠을 때 자신의 고통에는 아랑곳하지 않고, 다른 배고프고 목마른 사람들에게 무엇을 해줄 수 있을까?를 기억하자 고통의 강도가 훨씬 줄어들었다는” 내용이었습니다. 

 

바깥에서 살 때의 저는 생각나는 대로 행동하는 단순무식 그 자체였습니다. 그리고 남에게 무슨 어려운 일이나 슬픈 일이 생겼을 때 무너지는 그 마음이 어떤 것일지에 대하여 잠깐이라도 이해해보려고 노력하거나 배려할 줄을 몰랐습니다. 그랬던 제가 감옥에 들어와 오랫동안 신앙 안에 살면서 달라졌습니다. 세월호 침몰 사건이 일어났을 때 자신을 잃은 부모와 가족들의 참담한 심정이 저에게 고스란히 전해져 한동안 잘 먹지도, 잠들지도 못하였습니다. 눈에서는 눈물도 자주 흘렀습니다. 제일이 아니었는데도 정말 미안했습니다. 감옥을 살지 않았더라면 절대로 회복할 수 없었을 저의 소중한 감정들입니다.(그렇다고 제가 사형수가 된 것이 잘됐다는 것은 아닙니다.)

 

9월 25일 아침에 의원님께 편지를 부치고 나서 치과 진료를 나갔는데, 은인표 형님께서 먼저 대기실에 앉아 있었습니다. 2년 반 만의 만남이라 이런 저런 이야기를 나누다가 의원님과 각별하게 지낸다는 말도 하였습니다. 그리하여 급 호감이 생겼습니다. ㅎ~

 

이곳에 살면서 수많은 사람을 만났고, 형제처럼 마음을 나누며 지내다가, 돌아오겠다는 약속을 남기고 떠났지만, 저는 남았습니다. 이 얼마나 사람을 힘 빠지게 하는 일인지. 간혹 약속처럼 면회를 오거나 편지를 보내는 사람도 있었지만, 일정한 시간이 지나면 일방적으로 연락을 끊었습니다. 상처도 많았습니다. 그 후로 저는 신부님이나 수녀님, 봉사자 여러분들이 아니라면 될 수 있으면 서신을 주고받지 않았던 것입니다. 그런 제가 의원님에게 두 번째 편지를 쓰고 있다는 것은, 오히려 저에게 의원님에 대한 호기심이 생긴 것은 아닐까? 하고 생각하였습니다. ㅎ~

 

이곳은 다양한 사람들이 오고 가는 곳입니다. 오래전에 의원님께서 이명박 대통령과 대립(?)하고 있을 때였던 것 같습니다. 청와대에 근무하다가 구속된 어떤 사람이 운동장에서 저에게 이런 말을 했습니다. 정두언 의원은 여야를 떠나서 말이 통하는 사람이다. 4차원 같은 면도 있지만 밀어 붙이는 힘이 세다. 상대가 누구여도 할 말은 하는 사람이다. 다 기억할 순 없지만 대충 이런 말들을 했습니다. 의원님과 같은 당이지만, 상대편 쪽 사람이었는데도 의원님을 아주 좋게 말하고 있었습니다. 

 

저는 이곳에 살기 시작한 지 17년이고, 64년생, 천주교 신자이며 세례명은 아우구스티노입니다. 바깥에 부모님과 아내와 딸, 아들이 있습니다. 다들 면회 오고 있습니다. -2014. 10. 7 OO 올림

 

나는 10월 21일 이OO에게 이렇게 답장을 썼다. 

 

이OO 님에게,

신은 어디 있을까요. 하늘에? 땅에? 우리 가슴 속에? 저는 우리가 서로 사랑할 때 특히 남의 아픔을 공감할 때 그곳에 신이 계시다고 생각해요, 요즘. 특히 그곳에 다녀와서 그런 생각을 하게 되었어요. 그리스 신화에 일리아드​라고 있잖아요. 자기 동생을 잃은 아킬레스가 트로이의 장군 헥토를 죽이고 복수를 하지요. 그리고 시체를 끌고 왔어요. 그날 밤 아킬레스가 술을 먹고 있는데, 헥토르 아버지인 프리아모스 왕이 몰래 찾아오지요. 그려면서 울며 자기 아들의 시체를 돌려달라고 합니다. 그때 아킬레스는 자기 아버지를 떠올리며 그의 손을 잡고 함께 웁니다. 그의 아픈 마음에 공감을 한거지요. 영어로는 compassion이라 합니다. 나는 그자리에 신이 함께 한다고 믿습니다. 성경의 요한 일서 4장 12절을 보면 이렇게 쓰여 있어요. 어느 때나 하나님을 본 사람이 없으니, 만일 우리가 서로 사랑하면, 하나님께서 우리 안에 거하시고 그분의 사랑이 우리 안에서 온전하게 된다. 놀랍지요? 우리는 서로 사랑하면 할수록 하나님을 만나는 거지요. 예수님뿐 아니라 석가모니나 마호메드, 공자님 같은 소위 성인들의 가르침도 결국 ​공감 이 한마디로 압축된다고 해요. 네가 남이 해주길 원하는 대로 남에게 하라! 황금률이라고도 하지요. 나는 님의 편지를 읽으며 님의 아픔에 마음이 아파 눈물이 났어요. 그리고 내게 신을 만나게 해준 님이 고마웠어요. 우리가 살면서 모든 게 헛된 거 아니겠어요? 헛되고 헛되니 모든 게 헛되도다. 하지만 남의 아픔을 함께 나누는 사랑만큼은 절대 헛된 게 아니겠지요. 우리가 살다 가면서 남는 건 아무 것도 없지만, 우리가 나눈 사랑만큼은 영원히 남아 메아리친다고 생각해요. 신이 함께 했으니까요. 그리고 그게 우리가 사는 이유가 아니겠어요? 님에게 편지를 쓰는 이유는 하나님을 만나고 싶어서라고 이해해 주세요. 그럼 주님 안에서 늘 승리하기를 빌며.... -2014. 10. 21 정두언 드림.

 

내 사건에 대한 구체적인 전말은 최후진술서(별첨)를 보면 상세히 알 수 있다. 2014년 6월 26일 대법원은 내 사건에 ‘무죄취지’의 환송판결을 내렸고, 10월 21일 서울고법은 최종적으로 나의 무죄를 확정했다. 그 후 대한민국 법무부는 나의 억울함에 대해 6350만 원의 보상금을 보내왔고, 나는 그동안 인생공부를 시켜준 신의 은혜에 보답하는 의미로 그 돈 전액을 ‘나눔문화재단’이라는 한 작은 장학재단에 기부했다.​ 

(최후진술서로 이어집니다.)

정두언 전 국회의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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